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리 May 13. 2024

우리는 무엇을 찍는 것일까?

기약 없는 나중은 이제 그만,


삼척이란 곳.

막연하게 강원도 남쪽 끝자락 어딘가에 있으며, 

지하자원과 탄광, 석회석 등의 단어가 떠오르던 이곳을 오게 될 줄이야.


오랜만에 휴가를 즐기게 된 남편은 그의 버컷리스트를 또다시 내밀었다.


13. '배틀바위 오르기'


순전히 그의 13번째 버컷리스트를 돕는 심정으로 끌려오다시피 왔다.


삼척은 생각만큼 멀었지만 석탄, 석회석 등의 이미지는 아니었다.

깨끗한 바다와 나지막한 산이 어우러진 곳, 작고 조용한 마을들이 모여있고, 

동해 바닷가를 따라 이어지는 해안선이 무엇보다 아름다웠다. 



"사진은 좀 그만 찍고 경치를 감상해 봐"

"사진으로 남겨놔야 나중에 기억할 수 있지, 안 그러면 다 잊어 버린다구"

"사진보다 그냥 보는 게 더 멋지다니깐"


멋진 풍경 앞에서 우리가 늘상 주고받는 대화이다.




"과연 무엇을 남겨놔야 하는 걸까?"

오늘도 역시나 같은 질문을 한다.


나는 언젠가부터 '풍경 사진'은 거의 찍지 않는다.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 멋지면 멋질수록 더욱 그렇다.


'나중에' 보기 위해 숱하게 많은 사진을 찍고 남겨 놓았지만, 

'나중에' 보기로 한 약속은 거의 지켜지지 않았고, 

'나중에' 그 사진을 봐도 '지금' 만큼의 감동이 느껴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급하게 카메라를 켜고 셔터를 누르는 대신, 

오랫동안, 열심히 지금 내 눈앞의 풍경들을 바라본다.


카메라 렌즈로는 미처 담기지 않는 풍경들이 

내 눈의 렌즈로는 다 들어온다.


그럴 때마다, 내 눈은 카메라 렌즈보다 더 강렬하게 사진을 찍는 듯 느껴진다.

눈 앞의 풍경들이 시선을 따라 흘러가 버리지 않고, 

어떤 감흥으로 마음 속에 저장되는 느낌이다.


이런 감동을 놓치고 싶어 않아서 

나는 더 열심히, 더 오랫동안 풍경을 바라본다.


비록 사진처럼 실체로 남는 것은 없다 해도

기꺼이 이 감동을 마음속에 저장하는 쪽을 택한다.


그렇게 마음에 충분히 새겨졌다 생각되면,

그제야 천천히 한 두장 사진으로 남긴다. 

이럴 땐 급하게 셔터를 누를 필요도 없다. 그저 한 두장이면 족하기 때문이다.




남편의 말이 맞다.

감탄스러웠던 풍경 자체는 선명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바닷가 해안선이 정확히 어떤 모습이었는지, 

풍경 속에 무엇이 있었는지...


하지만 당시 풍경이 주는 소리, 마음으로 느꼈던 감동은 

도장처럼 새겨져 잊히지 않을 수 있다. 





'나중에' 본다는 것은 어쩌면 필요 이상의 욕심인지 모른다.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멋진 풍경이 있다면, 

나중을 위해 일단 많이 찍어놓고 보자는 마음에 앞서 

현재의 감동과 소리에 먼저 귀를 기울이고 눈을 맞추어 보았으면 좋겠다.


카메라의 렌즈처럼 왜곡되지도, 필터링되지도 않은 

오리지널 그대로의 감동을 놓치지 않도록 말이다. 


우리의 삶도 다르지 않다.  

결국 산다는 것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가 아닌가?

어찌 될지 모르는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서 

'지금', '현재'가 주는 생생한 감동을 희생하지 말기로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하루키에 다가가는 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