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 참고, 또 참지말고
6월이 좋은 건 딱 한 가지다.
장미, 특히 넝쿨 장미를 볼 수 있다는 것.
찬란한 5월과 여름 휴가를 품은 7월 사이에 애매하게 끼어
하마터면 6월은 참 매력없을 뻔했다.
하지만 이 맘때 볼 수 있는 장미 넝쿨 덕분에 나는 영락없이 캔디를 떠올리고,
그래서 나의 6월은 참 좋다.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참고 참고 또 참지, 울긴 왜 울어.
웃으면서 달려보자 푸른 들을
푸른 하늘 바라보며 노래하자
내 이름은 내 이름은 내 이름은 캔디
나 혼자 있으면 어쩐지 쓸쓸해 지지만
그럴땐 얘기를 나누자 거울 속의 나하고
웃어라 웃어라 웃어라 캔디야
울면은 바보다 캔디 캔디야
<출처 : https://blog.naver.com/i__memory/222991933883>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다던 그녀.
그녀의 탓이라 할 수는 없지만, 나는 꽤 오랜 시간동안 캔디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매여 있었다.
우는 모습을 보이는 것, 울음을 터트리고 만다는 것은
그 일이 무엇이든 '패자'가 되는 것이었고, 이것은 나를 엄청난 죄책감으로 몰아세웠다.
심지어 혼자 있을 때조자도 마음놓고 울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괜찮은" 아이였다.
"괜찮아" "안 힘들어" ....
하나도 괜찮치 않았고, 힘들어 다 놓아버리고 싶어도
나는 괜찮은 척을 했고, 어떻게든 기어이 그 일을 해냈다.
대체 왜?
그래서 내가 얻는 것은 무엇이었길래?
어떤 유익함이 있었길래?
그런데, 그런 잔인한 '견딤' 나를 강하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내가 아니라, 자해였는지도 모른다.
내면으로 꾹꾹 눌러 두었던 감정의 찌꺼기들은 그대로 쌓이고 쌓여 퇴적암처럼 변했다.
내 속의 커다른 바위덩이가 웅크리고 있는 듯
나는 내 마음의 무게가 버겁기만 했고,
어느 날에는 더 이상 어떤 희노애락 한 조각도 담아낼 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감정의 끝, 더 이상 눌러담을 공간조차 없는 마음으로
문득 '그냥 한 번 울어나 보자',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그 와중에도 '마침 집 안에는 아무도 없잖아...'라는 생각을 한 채...
.
.
.
나는 철이 든 이 후 내 울음 소리를 처음 들었다.
나는 이렇게 우는 구나...
이렇게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무언가 조여오듯 아프더니 그것이 불처럼 입 밖으로 토해지면,
이렇게 내 가슴과 목을 울리며 소리가 나는구나...
나는 울면서 이렇게 내 슬픔을 바라보고, 아픔도 꺼내 놓을 수 있었다.
이렇게 슬픈 나를 바라보니,
불쌍했고... 안타까왔고, 손을 잡아 주저않은 무릎을 일으켜주고 싶어졌다.
'울지말아.., 일어나...'
감정의 끝까지 가 봐야 비로소 그 감정에서 자유로와 질 수 있다는 말은 진심이다.
그 후로 나는 눈물이 날 때면 애써 참지 않는다.
더이상 내 눈물이 부끄럽지도 않다.
외로와도 슬퍼도 울지 않으려던 내 속의 캔디는 이제 조금은 유연하고 부드러워졌다.
힘들어, 외로워, 나 좀 도와줘.
그 사람이 부러워서 질투도 나.
나도 그렇게 되고 싶어, 나도 그런 거 갖고 싶어.
내 감정에 솔직해 지니,
오히려 그 감정에 묶여 있지 않게 된다.
외롭고 슬퍼도 나는 웃어야 할까? 괜찮아야 할까?
내 속의 캔디도 이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참고 견딘다하여 사라지지도, 해결되지도 않는다.
감정을 이겨내는 것은 오히려 '직면'하는 것이었다.
내 슬픔과 외로움에 직면하고 밖으로 흘려 보내는 것이 해결방법이었다.
덩쿨 장미가 피는 6월.
언제나 캔디를 떠올리는 것은 그렇게 마음껏 울지도 못했던 나를 떠올리는 일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