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6펜스』를 공간의 이동으로 읽다
그는 런던에서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살고 있었다.
가족이 있었고, 함께 일하는 동료가 있었고,
하루를 마치면 돌아갈 집도 있었다.
문을 닫으면 바깥의 소음에서 한 걸음 물러설 수 있었고, 식탁에는 늘 사람이 앉아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그곳은 충분히 머물 수 있는 공간이었다.
삶은 흔들리지 않았고, 아직은 설명 가능한 세계 안에 있었다.
그런데 스트릭랜드는 어느 날 아무 말도 남기지 않은 채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난다.
남겨진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 선택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왜 지금이었는지,
왜 이렇게 갑작스러웠는지,
무엇이 그를 이만큼 멀리 밀어냈는지...
이 질문 앞에서 나는 그의 마음보다
그가 머물던 공간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그의 삶은 어디서부터 어긋난 것이었을까.
혹은 정말로 어긋난 것이 있었을까.
런던을 떠난 그는 파리에서 전혀 다른 공기 속에 놓인다.
이곳에는 그를 오래 아는 사람이 거의 없고,
과거를 설명해야 할 이유도 없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며 산다.
공간은 분명 달라졌다.
그러나 이곳은 안식처라기보다 아직 도착하지 못한 중간 지점에 가깝다.
자유로워 보이지만 불안이 있고, 선택은 가능하지만 마음을 내려놓을 수는 없다.
시선은 여전히 남아 있고, 비교와 인정의 기류도 사라지지 않는다.
공간이 바뀌었지만 그의 의식은 아직
어디에도 완전히 머물지 못한 상태다.
떠났다는 사실만으로 사람은 곧바로 숨 쉬기 쉬워지지 않는다.
그가 도착한 곳은 타히티였다.
이곳에서 공간은 더 이상 그에게 무엇도 요구하지 않는다.
설명도, 조율도, 관계를 위한 준비도 필요하지 않은 곳.
그는 이곳에서 자신만의 공간을 갖는다.
누구의 집도 아닌,
누구를 위한 방도 아닌,
오직 자신에게만 허락된 자리.
그는 그 공간의 벽에 그림을 그린다.
팔릴 것을 염두에 두지 않은 그림,
이해되기를 바라지 않는 이미지들.
그림은 소통의 수단이 아니라 말을 대신하는 마지막 방식에 가깝다.
벽화로 채워진 그 방은 안식처라기보다
자기 자신에게로 깊게 닫힌 공간처럼 느껴진다.
이곳에서 그는 타인의 기대를 감당하지 않아도 되고,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을 조율하지 않아도 된다.
그 대신 타인의 고통에도 점점 덜 반응하게 된다.
타히티는 자유로운 곳이지만, 그 자유는
타인을 밀어내도 가능한 쪽에 놓여 있다.
어쩌면 스트릭랜드는 자신만을 생각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에게서
더 멀어질 것 같았던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곳에서 병들고, 시력을 잃어가면서도
끝까지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그가 남긴 벽화는 세상에 오래 남지 않는다.
타히티는 그가 쉬기 위해 선택한 공간이라기보다,
더 이상 자신을 붙잡고 애쓰지 않아도 되는 쪽에
가까웠다.
이쯤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스트릭랜드를 떠나
나 자신에게 시선을 옮기게 된다.
만약 내가 그와 비슷한 마음의 상태라면,
나는 정말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나야만 할까.
아마도 나는 타히티로 가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내 안에 작은 공간 하나를 만들 것 같다.
성과를 요구하지 않는 곳,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곳,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아도 괜찮은 공간.
눈을 자극하지 않는 빛,
몸의 온도를 받아들이는 웜톤의 벽,
책을 읽다 잠들어도 괜찮은 소파.
이 공간은 나를 숨겨주기보다
다시 나갈 힘을 남겨두는 곳에 가깝다.
완전히 등을 돌리기보다, 너무 멀어지지 않도록
잠시 숨을 고를 수 있게 해주는 자리.
스트릭랜드의 공간이 자기 자신에게로의 마지막 수렴이었다면, 내가 만들고 싶은 공간은 다시 사람들 사이로 돌아오기 위한 여백에 가깝다.
우리는 그처럼 살 수 없고, 어쩌면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그래서 우리의 공간 역시 끝으로 달려가기보다
잠시 머물 수 있는 쪽을 택한다.
삶은 늘 정면에서 말하지 않는다.
걷는 중에, 옮겨가는 사이에서, 우리가 잠시 멈출 때 이렇게 묻는다.
지금의 나는
편안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