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고요가 나를 데려오는 방식

관계의 소음이 멀어지던 시간

by 서수정

그녀는 밤이 되면 조용해졌다.

정확히는, 조용해져야 했다.

불을 끄고 누우면 방은 고요해지는데,

그 고요 속에서 낮의 말들이 다시 켜졌다.

누가 던진 농담, 내가 삼킨 대답, 표정을 늦게 읽어버린 순간, 괜찮은 척 넘겼던 장면들이 마치 연습하듯 되감겼다.


눈은 감기는데, 귀는 깨어 있었다.

몸은 쉬고 싶어 하는데, 마음은 퇴근을 못 했다.

‘내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어딘가가 먼저 뻣뻣해졌다.

내일은 다시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다시 웃어야 한다.

다시 묻는 말에 답해야 한다.

힘들지 않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내가 원래 그런 사람인 것처럼.


그녀는 사람을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잘 지내고 싶었다.

그 마음이 문제였다.

잘 지내고 싶은 마음은, 자주 스스로를 더 오래 붙잡아두었다.

그 밤에도 그녀는 침대에 오래 있었다.

몇 번이나 이불을 끌어올리고, 몇 번이나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가 놓고, 몇 번이나 “괜찮아, 별일 아니야”를 혼잣말처럼 반복했다.

하지만 별일이 아니라면, 왜 이렇게 내일이 무서운 걸까.


결국 그녀는 일어났다.

어디로 가야 한다는 계획도 없었다.

그저 지금 있는 곳에서는 한 발짝도 더 편해질 수 없다는 것을 몸이 먼저 알고 있었다.

문 밖으로 나와 걷다가 그녀는 익숙한 불빛을 보았다.

창가의 조명, 그 아래 놓인 의자.

누가 앉아 있지 않아도 그 자리는 묘하게 ‘기다리는 자리’처럼 보였다.

‘여기서는 잠깐 내려놓아도 된다’고,

말 대신 표정으로 말하는 자리.

그녀는 문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누구를 만나러 가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조심스러운지.

그러다 손잡이를 잡았다.

손끝이 아주 조금 떨렸다.

문을 열자 조명은 밝지 않게 방을 채웠고, 의자는 말없이 그녀를 받아들였다.

루미는 조명 곁에 머물러 있었다.

눈을 감은 채, 누군가를 고치려 들지 않는 얼굴로.

그녀는 의자에 앉았다.


앉는 순간, 생각이 조금 느려졌다.

낮의 말들이 멀어지고 몸의 무게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느낌이 들었다.

‘내일이 무서워.’

그녀는 속으로만 말했다.

입 밖으로 내는 순간 두려움이 더 커질까 봐.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 자세 그대로 한참을 있었다.

누구에게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그때 루미가 접어두었던 날개를 아주 천천히 펼쳤다.

어깨에 손이 닿지 않게, 그녀의 위를 덮지 않게,

그저 그녀의 뒤편을 넓게 감싸는 방식으로.

그녀는 그 움직임을 보지 못했지만 느낄 수는 있었다.

방의 공기가 달라졌고, 등 뒤가 덜 비어 보였다.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갑자기 ‘잠을 자야겠다’고 결심해서가 아니었다.

긴장만 하던 몸이 그제야 “이제 괜찮아”라는 신호를 받은 것처럼 조용히 꺼져갔다.

그녀는 의자에서 잠이 들었다.

아주 깊게.


얼마나 잤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알 수 있는 게 하나 있었다.

그날 밤의 그녀는 오랜만에 “한 번도 깨지지 않고” 쉬었다는 것.

잠에서 깨어났을 때 조명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빛나고 있었고, 루미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세상은 바뀌지 않았는데 그녀의 안쪽은 조금 바뀌어 있었다.

내일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사람들이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녀는 알게 되었다.

내일을 견디는 힘은 오늘 밤을 완벽하게 이겨내는 데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

잠깐이라도 쉬어 본 몸만이 다시 걸어갈 수 있다는 것.

그녀는 조용히 일어났다.

그리고 문을 나서기 전에 의자에 손을 얹었다.

고맙다는 말 대신 “다시 올게”라는 마음을 남기듯이.

루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날개를 다시 접었다.

그녀가 잠깐이라도 쉬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오늘 밤은 충분하다고 생각하면서.


"견디는 힘은 의지에서 오지 않았다. 잠깐 쉬어본 몸에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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