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떻게 방관자가 되는가?
클레이 키건 <이처럼 사소한 것들>
대구시립희망원. 우수 부랑인 복지시설로 2006년 대통령상까지 수상한 가톨릭계 사회복지시설이다. 그러나 주님의 이름으로 자행된 학대의 실상이 밝혀지며 2018년에 문을 닫았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는 예수의 말씀은 어디로 흘린 채, 오갈 데 없는 이들을 돌본다는 미명 아래 약자들의 죽음을 가렸다. 그들은 감히 ‘주님의 사랑 받는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했다고 한다. 막달레나 세탁소와 닮아 있었다.
이런 식으로 뒤늦게 진실이 드러나는 어두운 과거사는 이미 흔치 않지가 않다. 사건을 접할 때마다 종교에 대한 깊은 회의감이 든다. 동시에 문득 깨닫는다. 나 역시 그들과 다를 바 없이 침묵으로 동조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나는 도덕적으로 흠결 없는, 깨끗한 나에 취해 있을 뿐이었는지도 모른다.
죄란 무엇인가? 그런가 하면 완전한 사죄란 무엇인가?
그들만이 죄인이고 그들만이 사죄해야 하는가? 학대가 자행되던 현장에 있지 않았다고 해서 과연 나는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일까? 침묵 속에 묻힌 죽음들 앞에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책의 주인공인 빌 퍼론은 작은 마을의 상인으로, 곧 다가올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바쁘게 일하던 중 수녀원에서 벌어지는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다. 그곳에서는 젊은 미혼모들이 강제로 노동에 동원되고, 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입양 보내진다. 마을 사람들은 이 실태를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빌은 주저하다가 미혼모 소녀를 돕기로 결심한다. 엄청난 결단은 아니었다. 그가 한 일은 단지 소녀에게 따뜻한 담요와 신발을 건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사소한 행동이 소녀의 삶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다.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작은 행동의 힘’이었을 것이다. 모두가 모른 척하고, 가만히 눈을 감을 때, 사소한 행동이 침묵을 깨는 시작이 될 수 있다는 것.
침묵도 죄가 되는가?
대구시립희망원, 막달레나 세탁소, 키건의 소설 속 마을까지. 약자들이 고통받고 학대받는 현장에 ‘나’는 없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동안, 나는 그저 나의 안온한 일상에 머무르는 캐릭터에 가깝다. ‘그래도 나는 죄를 짓지 않았다’며 스스로를 다독였을 것이다. 그 안도감이야말로 가장 나쁜 종류의 침묵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키건의 소설이 남긴 작은 희망이 있다. 중요한 건 거대한 영웅적 결단이 아니다. 침묵이 죄가 되지 않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다. 작은 담요 한 장, 신발 한 켤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