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과 음악 - H에게

by 북극성 문학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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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과 음악


H, 안녕하세요. 잘 지내고 있나요?

저는 지난여름 템플스테이에서 만난 S이에요.


해가 뜨거웠던 8월의 금선사를 기억하고 있나요. 우리가 공유한 짧은 여름을 추억하는 마음으로 H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우선 만나서 반가웠다는 말부터 하고 싶어요. 그때 저는 하루 연차를 내고 금선사로 처음 템플스테이를 갔어요. 금선사가 서울 은평구에 있는 줄도 이번에 알았고, 템플스테이도 맨날 가고 싶다고 말만 했지 첫 시도에요.


H도 이번에 한국 첫 방문이죠. 단체 패키지여행으로 한국 곳곳을 돌아다니다가 단 하루, 금선사에 머물렀고 그날 마침 저도 그곳에 머물렀기에 당신을 만날 수 있었어요. 만나서 반가웠어요. 인연이란 참 신기해요.


싱잉볼 체험을 한 넓은 공간 기억하죠. 벽에 108배 기도문이 붙어 있었어요. 영어로 병기되어 있어 아마 봤다면 기억하실 수 있어요. 좋았던 문장을 기록해 뒀다가 종종 읽어보는데 오늘 편지를 쓰며 다시 살펴봤어요.

- 내가 가진 열정과 생명력을 소중히 여기며 절합니다.

- 내 안의 가능성, 잠재력을 믿고 참된 나의 성품이 무엇인지 알고자 절합니다.

-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는 길을 걷고자 절합니다.


열정, 생명력, 가능성, 잠재력, 나를 사랑하는 길. 단어들에 계속 눈길이 갔어요. 쨍하고 눈부셨어요. 무기력하고 지칠 때 이 중 한 가지 단어라도 기억해 내면 다시 몸을 일으킬만해요. 슬프게도 그날 제가 절에 올라가면서 들고 간 단어는 ‘힘들다’뿐이었고 그건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서도 마찬가지였죠. 어디로 도망치고 싶었고 스스로와 적절한 타협하에 절에 온 것이죠.


반나절 우리를 안내한 스님은 영어를 잘하셨잖아요. 오히려 한국어보다 영어로 더 많이 말씀하시고, 한국어로 설명을 생략하는 탓에 귀 쫑긋하며 절 곳곳을 돌아다니느라 살짝 피곤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절 체험의 마무리. 싱잉볼. 여러 싱잉볼로 현란하게 연주하는 스님 덕분에 연주 소리와 함께 여기저기서 코 고는 소리가 들렸던 게 기억나요.


모든 일정이 끝나고 긴 숨을 쉴 수 있는 공간, 귀뚜라미와 매미 소리 들리는 여름밤. 취침하기 전에 작은 불만 켜둔 산속에서 우연히 H과 대화 나눌 수 있었어요. 열 몇 명이 넘는 외국인들 사이에 H와 친구들의 독일어 대화 소리가 들렸는데, 반갑더라고요.


우리가 앉은 벤치는 명당이었어요. 저 멀리 건물들이 별처럼 반짝였고, 남산타워가 보였죠. 아주 맛있는 절밥을 먹고 소화도 시킬 겸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 나눌 수 있어서 즐거웠어요. 이번에 템플스테이를 가면 묵언 수행하겠다고 다짐했거든요. 전 사람을 좋아하니까 여행 갈 때마다 꼭 새로운 사람들과 이야기하곤 하거든요. 이번엔 절에 간 거니까 내면의 나와 대화하자고, 다짐했는데.


그러기엔 H와의 대화가 너무 즐거웠어요. 일단 저 멀리 우리 눈앞에 보이는 남산타워 가봤냐는 질문을 시작으로, H의 패키지여행 코스를 들어볼 수 있었는데요. 땀 흘리며 입었을, 경복궁 가서 한복 입고 찍은 사진을 보여주셨는데 그게 무척 귀여웠던 기억이 나네요. 여행 일정이 다소 빠듯했던 것으로 기억해요. 저야 한국에 살고 있으니 보통 여행을 가면 한 두 지역만 가고, 그 안에서 천천히 둘러본다면, H의 여행 일정은 부산 찍고, 경주 찍고, 후다닥 제주도 가야 했죠.


저도 H와 같은 나이인 20살에 일본으로 패키지여행을 간 적이 있는데, 그때 생각하면 정신없이 돌아다녔던 것 같아요. 단체 관광버스 타고 눈 뜨면 여행지 쓱 보고, 다시 이동하고 랜드마크만 쏙쏙 방문했죠. 한 번 오면 언제 올지 모르는 해외이기에 바쁜 일정이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요. 1시간 정도 여행 이야기를 포함해, 방탄소년단, 드라마, 가족 구성원, 좋아하는 도시, 연주할 줄 아는 악기 등 사소하지만 흥미로운 이야기를 나누다가 취침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잖아요.


다음날 사진 같이 찍자고 말해줘서 고마웠어요. 인스타그램 아이디도 주고받고, 무엇보다도 한국에서 여행하다가 종종 연락해달라고 말했는데 그걸 기억하고 연락해 줘서 정말 고마웠어요. H 덕분에 저는 서울 사무실에 앉아 있으면서도 H이 보내준 사진으로 인해 한국 여행하는 기분이었어요.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나희도 집에 방문했다며 전주에 있는 사진을 보내주고, 37도 뜨거운 태양 아래서, 동궁과 월지의 멋진 야경 풍경도 보여줬죠. 부산에 도착해선 감천문화마을 어린왕자 간판도 찍어서 전달해 주고, 바로 2일 뒤엔 제주도에 도착했다는 연락까지. 여름이라 보내준 사진이 다 쨍하게 잘 나와서 보기 좋았어요.


8월 마지막 날엔 이제 여행을 끝내고 오스트리아에 도착했다고 해서 긴 여행을 끝내고 무사히 잘 도착했음에 기쁘기도 하고, 즐겁고 소중한 추억을 한국에서 남긴 것 같아 제가 괜히 뿌듯했어요. 단 한 번의 만남이었지만 한국을 여행하는 동안 H의 소중한 추억을 공유해 줘서 진심으로 감사해요. 그리고 편지를 보내도 되겠냐는 저의 제안에 응해주신 점도요.


저는 사실 H에게 궁금한 게 많아요. H이 사는 오스트리아는 어떤 매력이 있는지, H는 어쩌다 한국 여행을 이렇게 길게 올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직접 여행을 해보니 한국이 어떻게 느껴졌는지도요. 가능하다면 편지 답장으로 미처 다 하지 못한 여행 후기를 들려주시겠어요? 또 이 외에도 제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편하게 말해주세요.


이 계절 편지의 주제는 여름과 음악인데, 어쩌면 H가 한국 여행을 겨울에 왔어도 ‘여름’처럼 돌아다녔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앞서 108배 문구로 인상적이었다는 단어들.


열정, 생명력, 가능성, 잠재력, 나를 사랑하는 길. 단어들을 계절로 따지면 꼭 여름 같아요.


그날 벤치에 앉아서 대화 나누던 H와 H의 친구 두 명 역시 마찬가지였어요. 여름 같았어요. 반짝이는 두 눈에 열정이 보였고, 생명력 넘치고, 가능성과 잠재력이 마음에 웅크린 상태로 이제 막 세상에 진입하는 모습으로 보였어요. 그게 참 보기 좋았어요. 이십 대 후반인 제가 나이를 이야기하며, 역시 젊은 게 최고야! 라고 말하는 건 아니에요. 벅차다 못해 터질 것 같은 마음이 스무 살의 저에게도 있었고, 그 시기가 아름답지만은 않았지만 그 시기를 지나올 수 있어서 참 좋았거든요.


지금 경험한 모든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H의 취향, 가치관, 성격 등을 만들어나갈 텐데요. 이미 한국을 좋아하고 문화에 익숙해 그런 요소들도 H의 한 부분이 되어 씩씩하게 서른으로 향해가겠죠. 어떤 음악을 추천할까 생각했는데 악동뮤지션의 [SUMMER EPISODE] 라는 앨범을 소개하기로 했어요.


이미 악동뮤지션을 알고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음반 소개 문구가 인상적이에요. ‘사춘기를 막 끝낸 악뮤가 어떤 흥미로운 이야기로 앨범을 채웠을까?’ 이 앨범엔 DINOSAUR와 MY DARING 이 두 곡이 수록되어 있는데요.


둘 다 여름에 듣기 참 좋은 노래예요. DINOSAUR은 들으면 시원해지는 매력이 있고, MY DARING은 해변에서 둠바둠바 흥얼거리며 리듬타기 좋은 노래예요. 이 중에서 DINOSAUR은 멤버 이찬혁 가수가 유년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만든 노래인데요. 밤에 느낀 알 수 없는 두려움과 공포를 공룡에 비유해서 표현했어요. 노래를 듣고 있으면 그 상상력에 감탄해요.


반지하 빌라에서 가족들과 살던 경험. 어린아이 시선에서는 알지 못했던 상황들. 그리고 더 크게 느낄 수 있는 두려움을 멋진 음악으로 표현한 이찬혁 가수는 정말 천재 같아요. 이 노래 말고도 악동뮤지션의 노래는 전부 다 개성 넘치고 남들과는 다른 시선으로 대상을 바라본다고 느껴요. 다른 곡들도 더 들어보기를 바라요.


꼭 작가가 아니더라도, 자기 서사를 어떻게 바라볼까는 중요한 문제 같아요.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이고 삶은 내가 만들어가는 이야기니까요. 나를 조연이나 엑스트라로 여기지 않으면서, 나를 마음껏 사랑해 주면서 내가 가고 있는 길을 기억하는 것. DINOSAUR이 좋았던 이유는 물론 노래 자체가 좋기도 했지만, 이찬혁 가수가 자기가 걸어온 길을 다시 재조명하고 그걸 또 창작의 원동력으로 쓴다는 점에서 더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H는 H이 주인공인 세계에서 어떤 이야기를 스스로 만들어가고 싶나요? 거기엔 어떤 두려움이 있고, 그걸 맞서서 싸울 용기를 어떻게 낼 것인지도 궁금하네요.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세계를 경험하고,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고, 여러 관계를 통해 배워나갈 일만 남은 H의 출발점을 응원합니다.


다음에 온다면 제가 적극 추천한 춘천도 꼭 방문하기를 바라요.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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