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북극성 문학일기입니다.
오늘은 여름과 왕사마귀를 주제로 편지를 보냅니다.
아직 봄도, 여름도 오지 않았는데 <제철 편지>를 쓰면서 그 계절에 만날 여러 존재를 생각해요.
이번 편지의 주인공인 왕사마귀를 좋아하시나요?
호불호의 영역에서 사마귀는 많은 사람에게 불호에 더 가까울 것 같아요. 날카로운 외모와 더불어 익히 알려진 사실들. 예를 들면 동족도 잡아먹는다는 점, 자기보다 큰 곤충이나 동물도 잡아먹는 공격적인 먹이 활동 등이요.
채영의 그림 속 왕사마귀를 계속 들여다보니 그 몸체가 우아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우아한 포식자라는 별명이 참 잘 어울려요. 여름은 초록의 계절, 온몸이 초록색인 그림 속 왕사마귀와 채영은 눈이 마주쳤다지요. 눈이 마주친 대상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요. 채영은 그 사마귀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8월, 뜨거운 여름에요.
저는 이 그림을 보며 자신과 눈 마주친 어떤 대상을 두려워하면서도 닮고 싶어 하는, 아주 작은 존재를 그려보고 싶었어요.
여름 편지를 보내며, 다음 주에도 또 다른 작은 존재로 만나요!
북극성 문학일기 드림.
채영의 생태일지 - 여름과 왕사마귀
‘그래, 지금이다! 할 수 있어 랑아.’
누구나 계획은 있다. 비록 방금 또 실패했지만. 내가 골목 귀퉁이에 가만히 서서 형광 연두 철조망 아래를 뚫어지게 쳐다본 지도 어느덧 20분이 흘렀다. 손바닥엔 손톱자국이 깊게 파여 있다. 오줌을 누고 싶은데 저 철조망을 지나가질 못한 채로 참고 있느라 주먹을 펴지 못했다.
골목을 지나가는 인상 좋은 할아버지 뒤에 붙어 자연스럽게 이동하려고 했다. 할아버지는 철조망까지 가질 않고 가운데 길로 빠져버렸다. 방금 지나갔던 고등학생 무리는 철조망 아래에 있는 걔보다 더 험상궂게 생겨서 그냥 보냈고.
더는 참지 못하겠다. 될 대로 되어라, 하는 마음으로 주문을 얼른 걸어본다.
‘나는 투명인간. 투명인간. 아무도 나를 볼 수 없다아아.’
오줌이 마려워 후들거리는 다리가 철조망 근처로 가니 더 세게 흔들린다. 마음도 세찬 파도처럼 출렁출렁 흔들린다. ‘아 그냥 아버지한테 전화할까? 보나 마나 화낼 게 뻔한데.’ 다시 작전상 후퇴할까 아니면 직진할까 요동치고 있는데 아래에서 신호가 찌릿 온다. 여기까지 왔으니 더 물러설 수 없다.
조심히 발걸음을 옮기고 근처에 다다르자 철조망 아래에 착 붙어서 누워있는 저 녀석을 발견했다. 아무래도 눈이 마주친 듯하다. 그와 동시에 천둥처럼 짖어대는 저 미친 강아지.
오전 내내 굶주렸으니 뭐라도 내놓으라는 짐승의 소리가 동네에 울려 퍼진다. 누가 관리하는 강아지도 아니라 하얀 털에 땟국물이 줄줄 흐른다. 눈빛은 사납고 빼빼 말라 숨을 거칠게 내쉴 때마다 뱃가죽에 갈비뼈가 다 보인다. 무엇보다도 저 소리. 왈왈 짖어대는 소리만 들으면 꼼짝도 하지 못하고 얼어붙는다.
주머니에서 반쯤 먹다 남긴 소시지를 꺼내서 강아지 쪽으로 던진다. 제발 이거 먹고 나한테 관심 꺼줘. 강아지는 내가 소시지를 던진 쪽으로 고개를 휙 돌리더니 코를 박고 소시지를 먹기 시작한다. 그 사이 철조망 맞은편, 영웅 태권도장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영웅 태권도장은 우리 아버지가 운영하는 곳이다. 오빠 둘은 아버지를 따라 태권도 선수를 하고 있고, 난 이 태권도 집안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도장으로 오는 내내 긴장해서 땀으로 젖은 티셔츠를 반쯤 벗으며 화장실로 재빨리 들어갔다.
“왜 이렇게 늦었어?”
“오늘 청소 담당이라 늦었어요.”
도장 맞은편에 있는 강아지 때문에 늦었다고 한다면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할지 뻔하다. 아직도 그깟 강아지 한 마리를 겁주지 못하냐면서 나의 정신 상태를 단련해야 한다고 호통을 칠 것이다. 그러니 그냥 핑계를 대고 둘러대는 게 낫다.
게다가 그 강아지는 아버지와 둘이 있을 때는 얌전하기만 하다. 개도 누울 자리를 봐 가면서 눕는 모양이다.
짐승도 사람도 다 똑같다. 딱 보고 자기보다 약해 보이면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골목을 걷다 보면 갑자기 다가와 소리를 빽 지르고 당황하는 나를 지켜보는 걸 재미로 여기는 정신 나간 사람들도 많았다.
아버지가 도장을 운영하면 뭐 하나. 사람들은 그런 강인한 아버지 아래에서 나처럼 약한 존재가 태어났다는 사실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매번 우리 오빠들에게 지는 태권도장 남자애들. 그들은 대련에서 지는 날이면 나를 더 짓궂게 놀리곤 했다. 머리를 잡아당기거나 별명을 부른다거나 하는 유치한 장난. 그럴 때마다 아버지에게 더 혼이 났고, 기를 펴지 못하고 다닌다는 타박을 듣곤 더 위축됐다.
오늘은 대련이 있는 날은 아니었고, 발차기 연습을 하고 아버지에게 자세를 교정받고 집에 돌아갔다. 나에겐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는 태권도 시간이지만 원생들은 다들 누가 더 기합을 기세 있게 하나 내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문을 닫고 나가는데도 계단에 기합 소리가 윙윙 울려서 귀를 살짝 막았다.
철조망에서 벗어났지만 그렇다고 오늘의 이벤트가 끝나진 않았다. 메인은 따로 있다. 가방 속에 꼬깃꼬깃하게 접힌 수학 시험지. 60점을 받았다. 아버지야 태권도 외길 인생. 아버지가 나에게 관심 있는 것이라곤 발을 뻗었을 때의 미세한 각도, 주먹을 쥘 때의 자세이겠지만, 엄마는 다르다.
엄마의 관심사는 온통 이 시험지이다. 지난 중간고사 성적이 76점이었는데, 기말을 60점을 받아버렸다. 어차피 가서 혼날 거 집에 아예 늦게 들어가고 싶지만, 날이 어두워지면 집 가는 길도 쉽지 않다. 주황색 불빛 가로등 아래 뿌연 담배 연기와 술 취한 아저씨. 노상 방뇨하는 노인을 수도 없이 봤다.
그럴 땐 방법이라곤 하나다. 골목 가장 끝에서부터 숨을 참고 달리기하기. 누가 말을 걸거나, 고함을 지르든 갑자기 악 소리를 질러서 나를 놀라게 하는 일에 재미를 느끼든 상관없다. 무작정 내달려서 집에 무사히 도착하는 게 장땡이다.
여름이라 해가 늦게 떨어져서 다행이다. 이 시험지를 들고 집에 일찍 들어가고 싶진 않으니 집 근처 마트에서 더위사냥을 사 먹으며 더위와 아까의 긴장도 좀 달래본다. 엄마는 네가 커피아이스크림을 사 먹어서 키가 안 크는 거라고 잔소리한다. 그치만 맛있는 걸 어떡해.
“아이스크림 맛있어 보인다.”
더위사냥 윗부분의 종이 포장지를 돌려서 벗긴 뒤 이제 막 먹으려고 하던 차였다. 나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뒤를 돌아보니 이 근처 중학교의 짧은 교복 치마가 보인다.
“네?”
“맛있어 보인다고.”
14세 짧은 인생. 아이스크림을 빼앗긴 건 이번이 처음이다. 더위사냥을 반쪽으로 쪼개서 달라는 건가 싶어서 내가 다리 부근에 아이스크림을 가져다 대고 두 동강 내는 시늉하자 그 언니는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그리고 부드럽게 손을 까닥거리며 내밀었다.
한 입도 못 먹은 아이스크림은 그렇게 그 짧은 치마에게 갔다. 운이라곤 아예 없는 날이다. 그 짧은 치마는 아이스크림 외에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는데, 그래도 그렇게 얌전히 아이스크림만 바치고 몸 하나 다치지 않고 돌아갈 수 있음을 감사하게 여겨야 하나.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다. 이제 마지막 남은 골목길에 진입하기 전에 은아가 사는 빌라 3층을 올려다본다. 오늘 있던 이 황당한 일을 은아에게 가서 말하고 싶은데 운이 나쁘면 아까 험상궂게 생긴 고딩 언니 오빠 무리를 다시 마주하게 될 수 있다.
몇 개월 전부터 은아를 만나러 빌라 앞에 가면, 일회용 쓰레기에 꽂힌 나무젓가락과 담배가 발견됐는데 아마도 그들의 짓일 거다. 빌라 주차장 후미진 곳에서 돈 뜯기고 침 퉤 얼굴에 맞고, 눈 아래로 깔아야 하는 무서운 상황의 엑스트라가 되고 싶지는 않다.
나에게 이 골목길은 어딜 가나 공포물이다. 어떨 땐 차라리 골목길에서 마주치는 게 사람이 아닌 강아지인 게 더 낫다는 생각도 든다. 나를 보면 마구 짖는 굶주린 강아지도 무섭지만, 골목길에 홀로 비틀거리며 서 있는 술 마신 사람을 보는 일은 더 공포다.
친구고 뭐고 더 이상의 이벤트를 만들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앞섰다. 그냥 집 가야지. 집 앞에 도착하자 형광 연두 철조망이 다시 보인다. 우리 학교의 세 배 크기의 공터를 둘러싸고 왼쪽 끝엔 아버지의 도장이, 오른쪽 끝엔 우리 집이 있다. 대체 누가 이 공터를 그냥 둔 걸까. 나 같으면 빌딩을 크게 세웠을 텐데. 하긴 이 동네는 높은 빌딩은 없다.
우리 집 근처 철조망에는 나팔꽃 같은 식물들이 타고 오르며 자라서 강아지가 있는 곳보다 아주 평화롭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거길 그냥 스쳐 지나가려고 하는데, 철조망에 붙은 사마귀의 탈피 껍질 무더기를 발견했다.
사마귀는 탈피를 총 7번 정도 한다고 생명과학 시간에 배웠다. 내 검지만 한 탈피 껍질을 두고 사마귀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문득 호기심이 일어 근처를 둘러보니 사마귀 한 마리가 나를 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눈이 마주친 것 같다.
사마귀는 이내 몸을 옆으로 돌리더니 주변을 둘러보며 무엇을 찾는 듯했다. 바로 집 앞이니 이젠 진짜 엄마에게 시험지를 들고 가서 혼날 일만 남았기에 대문 앞에 앉아서 사마귀를 구경했다. 곧 시야에서 사마귀가 사라졌고, 변명 거리를 위해 가방에서 시험지를 꺼내 고민하고 있었다.
‘대체 왜 이 간단한 문제를 틀렸지? 엄마한테 뭐라고 말해….’
빨간 비가 그어진 시험지의 문항을 하나씩 보고 있는데, 철조망에서 내려온 사마귀가 뭔가를 대롱대롱 매달고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가방을 대문에 두고 조금 더 자세히 확인하기 위해 공터 근처로 다가가니 사마귀의 얇고 날카로운 다리에 붙잡힌 축 늘어진 들쥐를 발견했다.
들쥐를 먹는 과정까지는 보기 힘들어 얼른 시선을 돌려 땅을 바라봤다.
자기 몸의 몇 배는 더 되는 쥐를 사마귀는 어떻게 잡을 수 있었을까. 알 수 없지만 이상하게도 그걸 보는데 징그럽다기보다는 부럽다는, 아주 기이한 마음이 들었다. 방금 봤던 탈피 껍질을 만지자 햇빛을 오래 받아서인지 부스러졌다.
자기보다 약한 존재를 이기기는 너무 쉽다. 이 골목엔, 아니 골목을 벗어나도 이 논리는 어딜 가나 다 통한다. 나도 화가 나면 괜히 나팔꽃, 무궁화, 분꽃. 아름답게 피어 있는 꽃을 꺾어다 잎을 하나씩 짓이기도 했다. 누가 관리하지 않는 꽃이라 그럴 수 있었다. 정성껏 화분에 담아 기르는 꽃은 건들지도 못했다. 치사한 줄 나도 안다.
일곱 번의 탈피를 거치는 동안 사마귀는 계속 강해졌던 걸까. 문득 사람도 탈피의 과정을 거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 탈피 후 키가 쑥쑥 커진다. 주변을 둘러보지 않고 핸드폰만 보면서 길을 걸어가도 아무도 나를 귀찮게 하지 않는다. 두 번째 탈피가 이뤄지자 몸이 아주 단단해진다. 철조망 강아지를 비롯해 모두 내가 다가가기만 해도 깨갱거리고 사라진다.
세 번째 탈피하자 동네 횟집 작은 수족관에 있는 생선 같은 내 마음이 자신감으로 가득해진다. 튀어 오르면 맨바닥인 걸 이미 알고 있어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 마음. 이제 없다. 네 번째 탈피 이후엔 세상 모든 존재의 눈을 또렷하게 쳐다볼 수 있다. 아주 쉽게 땅으로 가는 시선에서 벗어나서.
다섯 번째 탈피로는 존재를 드러낸다. 존재를 최대한 지우고,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한다는 양 골목길을 숨 참으며 뛰어가던 랑은 이제 여기 없다. 여섯 번째 탈피가 끝나면 나도 내 몸짓의 더 큰 무언가를 잡아 먹어버린다. 언제나 잡아먹는 쪽보다는 잡아먹히는 쪽에 익숙했지만.
일곱 번째 탈피 후에는 그 모든 것을 아무렇지 않게 반복할 수 있다. 위협하고 죽이고 선전포고하는 일.
감고 있던 눈을 다시 떴다. 손엔 아직 시험지를 들고 있고, 대문 앞 돌바닥에 앉아 있어서 그런지 엉덩이는 차갑다.
이제 상상도 다 했으니 쪼그라들 차례다. 열쇠를 꺼내 집으로 들어간다. 잠깐 만져보았던 탈피 껍질의 감각은 잊은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