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과 은무늬밤나방

by 북극성 문학일기

안녕하세요.

북극성 문학일기입니다.


점점 더 추워지는 겨울에, 가을과 은무늬밤나방을 주제로 편지를 보냅니다.


은무늬밤나방이라니! 이번 시즌 4를 준비하면서 이 생소한 나방으로 어떻게 글을 써야 하나 고민이 참 많았습니다. 게다가 은무늬밤나방은 본 기억이 없을 정도로 관심 밖의 존재이기도 했고요. 인터넷에도 정보가 많지 않았는데요.


고민은 강릉으로 떠난 여행길에서도 계속됐고 바다를 보면서 이번 글의 소재를 정하게 됐어요.

은무늬밤나방의 검은색 날개와 은빛의 무늬를 주인공 특징으로 보여주기로 했습니다. 채영은 이 나방을 소금강 근처 펜션에서 발견했지만, 강이 아닌 바다를 배경으로 가져왔어요. 아, 그리고 채영의 생태일지를 보니 너무 늦게 태어난 나방이라 외로워보이길래, 그런 요소도 추가했습니다.


막상 소재를 정하자 글은 또 쓸 수 있겠더라고요. 이런 이야기를 채영에게 전하니, 이번 제철 편지 네 편의 그림 중 채영은 은무늬밤나방을 그릴 때 가장 재미있었다고 말했어요. 채영이 나방에 관심이 많음을 알고 있었기에, 나방에 더 공을 들였겠구나 싶었습니다. 결론적으로는 저도 글을 쓰기 위해 정보도 살펴보며 가장 공들인 편이 되었고요.


이제 어느덧 겨울 편지만을 남기고 있습니다.

다음 주에도 또 다른 작은 존재로 만나요!

북극성 문학일기 드림.


채영의 생태일지 - 가을과 은무늬밤나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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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의 소설

형광 연두 철조망


은무늬는 모래사장에 비스듬히 파묻힌 유리 조각을 줍는다. 진한 갈색과 짙푸른 녹색 파편. 그걸 녹여서 유리 공예로 다양한 작품을 만든다. 가지고 온 헝겊 주머니에 조각을 담기 위해 허리를 숙이자 푸른 빛의 동그란 원물이 목 사이로 보인다.


지난여름에 비하면 유리 조각도 훨씬 줄었다. 피서지로 해변을 선택한 사람들은 더위를 이길 차가운 술도 잔뜩 이고 지고 왔는데, 다음 날 아침이면 바닷가에서 들뜨고 낭만적인 밤을 보낸 증거만을 남기고 빠르게 사라졌다. 덕분에 여름날 바닷가는 하늘도 반짝, 모래도 반짝. 햇볕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 동요 가사를 충실히 따랐다. 이젠 가을이라 단풍 구경하러 사람들도 산으로 몰렸을 것이다.


“솔방울님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어요?”

“아이고 반가워요. 최근에 이직해서 적응하느라 바빴어요. 어머머 근데 은무늬님 얼굴 좋아 보여요.”

“감사해요. 바다 근처로 이사 와서 그런가 봐요. 바닷바람 매섭고 짭짤하긴 한데, 바다 많이 보니까 행복해요.”


해변엔 은무늬와 함께 솔방울, 긴꼬리, 푸른, 헤엄 등 해변 봉사를 온 대원들이 곳곳에 흩어져 쓰레기를 줍고 있다. 오늘은 달에 한 번씩 해변 정화를 하는 정기 모임 날이다. 낚싯줄, 폐어망, 쓰고 버린 폭죽, 각종 생활 쓰레기. 삼삼오오 모여서 쓰레기를 줍고, 봉사가 끝나면 가볍게 차도 마시며 각자 사는 이야기를 나눈다.


직업도, 나이도, 사는 곳도 다른 그들은 각자의 이유로 바다를 사랑한다. “삶이 휘청이고 위태로워서 도망치려고 바다를 찾아왔는데 파도도 똑같이 휘청거리고 울렁거리더라고요. 아아, 그게 얼마나 큰 위로인지 알아요? 다들 점잖은 척 무표정을 유지하는데, 있는 그대로 다 드러내는 바다가 너무 좋아요.” 은무늬는 푸른 대원의 수줍은 고백을 기억한다. 파도 속에서 균형 잡고 헤엄치기.’ 서핑 광인인 헤엄 대원이 오른쪽 날갯죽지에 새긴 타투 문장도.


어차피 내일이면 다른 쓰레기가 모래에 새롭게 파묻힐 테지만 대원들은 개의치 않는다. 우리의 행동이 무가치하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힘이 빠지는 일은 없으니까. 오늘 긴꼬리가 폐어망을 줍지 않았다면, 바다로 흘러가 어떤 바다생명의 몸을 휘감았을지 모르는 일이다.


은무늬는 해변 봉사를 마치고 긴꼬리와 함께 자신의 공방으로 갔다. 해변에서 차를 타고 20분 정도 가면, 작은 공방들이 모여 있는 동네가 나온다. 긴꼬리는 지난달에 의뢰한 팔찌도 가져가며 그 김에 공방과 이사한 은무늬의 집을 구경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허리 굽히기를 반복하느라 허기진 배를 달래기 위해 공방 바로 옆에 있는 은무늬 집부터 들렀다.


소면을 빠르게 삶고, 달걀 고명과 당근을 올린 따듯한 국수 완성. 은무늬가 긴꼬리에게 젓가락을 건넸다. 두 사람은 후루룩 소리와 함께 두 볼을 빵빵하게 채워 넣으며 먹기 시작한다. 우엉을 우린 시원한 물을 꿀꺽 삼키며 식사를 마무리했다.


마무리로 단 감을 깎아서 먹은 뒤 은무늬는 옷장을 보여줬다. 해변 플리마켓이 열리면 판매할 목적으로 모아둔 옷이 가득했다. 주로 검은색 원단에 은색 실로 자수를 놓은 옷들이 많았는데, 그건 은무늬가 차린 옷 브랜드의 특징이기도 했다.


화려함을 사랑하는 사람. 패션디자인학과를 전공한 은무늬는 어딜 가나 존재감이 선명했다. 개성 넘치는 옷과 음악을 사랑하고, 깊고 어두운 밤도 사랑했다. 밤은 은무늬를 더 또렷하게 만들었다. 홍대 클럽을 돌아다니며 웅장하고 화려한 밤을 가슴에 차곡차곡 쌓았고, 그 밤은 또 영감으로 돌아와 은무늬가 만드는 옷에도 수놓였다. 대학 졸업 후 옷 브랜드를 만들어 5년간 열심히 옷을 제작해 왔다.


강릉 해변 근처에 작은 공방을 차리고 운영하게 된 지금은 옷을 만들지 않는다. 이사 오면서 상당수를 이미 버렸지만, 이전에 샘플을 제작하거나 은무늬 본인이 입으려고 만든 옷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


“은무늬는 겨울 쿨톤이지? 은무늬가 만든 옷은 겨울 쿨톤한테 잘 어울리는 것 같아.”

“손님, 우리 제품은 모든 톤 다 커버 가능해요. 하하, 마음에 드는 거 있으면 말해봐. 오늘 팔찌도 구매했으니 싸게 줄게.”


은무늬는 긴꼬리가 자신의 엄마에게 선물할 그린란드 상어 모양 팔찌를 상자에 포장해서 전달한 뒤 인사를 나누고 배웅했다. 이른 오전에 시작한 일정이 해가 지는 저녁에 끝났다.


근처 절에서 얻어온 돼지감자를 우려 마시면서, 공방 달력에 일정을 표시했다. 올해 12월까지 공방에 수업을 들으러 오는 학생들의 일정을 정리해 뒀다. 오늘은 10월 19일, 달력엔 푸른 바닷속 귀여운 거북이와 그 거북이 위에 있는 노랑 바다생물 열 마리를 찍은 사진이 있다.


은무늬는 옷을 만들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화려함을 사랑한다. 다만 지금은 도심이 아닌 조용하고 적막한 바다의 화려함에 매료돼 이곳에 살기를 선택했다. 스쿠버다이빙에서부터 시작된 사랑. 푸른 바다의 매력은 직접 파도 속으로 들어가야만 진가가 드러난다.


총천연색의 산호초와 바다생물. 좁은 수족관에 갇힌 생물을 볼 때와는 차원이 다르게, 바닷속 생태는 살아있음 그 자체였다. 물속에 들어가는 순간, 완전히 다른 세계에 들어가는 것 같았고 때때로 무서웠지만 포근함과 안락함도 느꼈다.


바닷속 생명과 우연한 조우, 어설픈 교감. 물속에서 할 버킷리스트도 생겼다. 바다거북도 만나고, 상어, 니모, 수백 마리의 물고기 떼와도 인사했다.


달력 속 거북이 사진은 하와이로 휴가를 떠나서 새로운 일을 시도해 보고자 큰 기대 없이 신청한 첫 스쿠버다이빙 때 찍은 것이다. 스쿠버다이빙이 너무 좋아서 다른 프로그램은 다 미뤄두고, 일주일 내내 물속에서만 살았다.


“그땐 몰랐네~ 여기에 있을 줄은.”


콧노래를 부르며 찻잔을 정리한 은무늬는 오늘 해변에서 주운 소주병 조각을 장갑으로 꺼내서 세척 과정을 거쳤다. 라벨과 접착제를 완전히 제거한 유리를 녹여서 반지를 만들 예정이다. 동그란 모양이 잡힌 유리는 바다색을 닮아 아름답다. 누구도 반지를 보고 모래 속에 파묻힌 소주병을 바로 떠올리진 못할 테다.


스쿠버다이빙을 지속하면서 은무늬는 불편한 진실을 마주했다. 바다는 자연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사람이 만든 총천연색 쓰레기가 모여 있다고. 녹이면 아름다워지는 이 유리 조각을 포함해서.


내가 버린 모든 쓰레기는 다 바다로 모이는 걸까 싶을 정도로 은무늬는 아주 다양한 쓰레기를 바다에서 발견했다. 간혹 뉴스에서 보는 환경 오염 사례는 남의 나라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투명 비닐봉지를 해파리로 착각한 바다거북은 비닐을 삼켜 장폐색으로 굶어 죽거나 소화 장애가 생긴다. 고스트 넷이라고 불리는 폐어망에 바다생물이 붙잡히거나 몸 한 부위가 얽히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줄이 점점 살을 파고들면서 지느러미가 절단되거나 감염되어 죽는다. 산호 위에 마스크나 포장지가 덮이면, 광합성을 하지 못해 괴사하고, 한 산호가 죽으면 그 생태계도 없어진다.


은무늬는 이미 바다가 좋아졌기에 바다의 화려함을 지키고 싶었다. 바다를 화려하게, 살아있게 만드는 생태를 지켜주고 싶었다. 정기 봉사활동을 하다가 점점 더 사태의 심각성을 직접 봐 오며, 해양 보호 활동에 적극적으로 바뀌었다.


은무늬는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스쿠버다이빙을 하던 첫 순간의 경험을 바꾸고 싶진 않지만, 그래도 그 경험이 은무늬의 삶의 방향을 너무 크게 바꿔버렸다.


은무늬는 그 경험 이후 시간을 지나오며 여러 감정을 마주했다. 인생은 길지만, 이런 바닷속 세상을 너무 늦게 알았기 때문에 죄책감과 조급함도 들었다. 조금만 더 빨리 알았더라면 살아오는 과정에서 덜 실수하면서 살아왔을 것이라는 생각.


그와 반대로 그가 본 바닷속 세상은 아직 많은 사람이 접해보진 못한 것이니 너무 일찍 도착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걸 느끼며 외롭고, 외롭고 또 외로워졌다. 착한 척을 한다는 말이나 이것 또한 시대의 흐름에 탑승하려는 움직임 아니냐는 시선 또한 알게 모르게 받았다.


‘그러니 외로움은 어쩔 수 없는 거 아니겠어?’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은무늬는 환경에 관심이 없었다. 스쿠버다이빙을 하지 않았더라면 평생 바닷속 세상의 빛과 어둠을 몰랐을지도 모른다.


혼자 해결하지 못하는 거대한 문제 앞에서 은무늬는 자신이 한없이 작은 존재임을 거듭 경험했다. 그렇게 외로운 마음을 가진 채 살다가 해양 생명 보호 협회에 가입하게 됐다. 흐르는 대로 왔더니 이곳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그만큼 활동할 곳이 많지 않다는 말이기도 했다. 작고 작은 존재끼리는 뭉쳐야 하는 법. 똘똘 뭉쳤다가 또 생업을 위해 흩어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모두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느슨하게 유연하게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것 같다가도 세차게, 집요하게 철썩이는 파도처럼 활동을 멈추질 않았다. 은무늬도 마찬가지였다.


가을밤, 주변이 깜깜해지기 시작했다. 한때 화려했던, 여전히 화려함을 동경하는 외로운 은무늬는 공방을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 하루의 마무리는 108배이다. 불자가 아니지만 108배 역시 종이학 천 마리 같은 일종의 반복 수행으로 생각하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은무늬는 어릴 적 애인에게 종이학 천 마리를 선물한 적 있다. 그걸 선물 받은 애인은 은무늬에게 이별을 고하고 떠났기에 천 마리의 효능을 믿지는 않는다. 그러나 천 마리를 접는 동안 종이접기에만 집중했던 시간이 좋았다. 지금에 와선 그런 생각도 한다. ‘아, 내가 우리 사랑 영원하게 해주세요. 빌면서 접지 않고, 종이접기 자체에만 몰입해서 헤어지게 된 걸까?’


은무늬에게 자기 전 108배를 하라고 추천한 스님은 사념이 들어올 새 없이 그냥 “맑은 생각”이라는 단어만 떠올리면서 절한다고 했다.


은무늬는 절하는 동안 단 하나의 문장만을 속으로 읊는다. ‘나의 한 생각이 우주의 한 생각임을 자각하며 절합니다.’ 108배 문장 중 하나였다. 이 문장을 보고 마음에 들어서 따로 메모해 뒀다.


모두 각자의 우주가 있다면, 은무늬는 본인의 우주를 은무늬를 비롯한 우주인으로만 채우고 싶진 않다. 산호초, 바다거북, 상어와 고래, 멸치 떼. 살아 숨쉬기에 반짝이는 모든 존재로 우주를 가득 채우고 싶다.


이런 마음이 은무늬를 더 외로운 길로 이끈다. 그렇지만 외로울지언정 고독한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 더 다채로운 풍경을 보고 싶은 소망을 이어가기 위해 은무늬는 지금 이 108배처럼 반복적으로 쓰레기를 줍는다. 종종 사람들과 해양 캠페인을 하고, 휴가나 시간이 남을 때면 바다를 개구리처럼 유영한다. 바다에 퐁당 빠져서 마음껏 수영하고 수평선 아래로 노을이 지는 장면을 눈에 담는다.


“나의 한 생각이 우주의 한 생각임을 자각하며 절합니다.”


어느새 마지막 절을 끝내고, 살짝 더워진 몸을 식히기 위해 창문을 열었다. 모든 일과를 마친 은무늬의 우주는 고요하다.


바닷바람이 집안으로도 들어와 방문에 매달아 놓은, 폐어망을 엮어 만든 썬 캐처가 살짝 흔들린다. 스테인드글라스 썬 캐처는 은무늬가 좋아하는 은무늬밤나방 모양으로 만들었다. 까만 날개에 은색 무늬가 있는 밤나방. 아침이면 나방 모양의 썬 캐처는 햇빛을 반사하며 아름다운 모습을 벽에 비춘다.


다시 창문을 닫고 은무늬는 잘 준비를 한다. 아침이 되면 다시 햇볕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 썬 캐처에 반사된 햇빛을 보며 일어난 뒤 출근 준비를 할 것이다. 어제와 비슷한 하루겠지만, 벽에 비친 썬 캐처의 모양이 날마다 조금씩 다르듯, 아주 조금은 다른 하루가 되길 기대하면서.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방향, 출렁거리는 파도의 세기, 공방을 찾아올 새로운 관광객들의 이모저모. 목이 살짝 칼칼하니 이번 한 주는 유자차. 짭짤한 감자조림을 해서 밥을 먹어야겠다는 계획.


그렇지만 어김없이 틈만 나면 짭짤한 바다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

비슷하고 조금 다른 하루. 오늘을 잘 마무리한 은무늬가 보낼 내일의 모습은 이러하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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