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글을 쓴 이후 며칠이 지났다. 일 끝나고 연습실로 오는 게 이제는 당연해졌고 또 익숙해졌다. 앞으로도 쭈욱 계속 지속될 거라고 믿었다. 이틀 동안 괜찮다가 삼일 째 되는 오늘, 작심님이 점심시간부터 나를 집으로 보내려고 온갖 술수를 쓰고 있다. 아 안 그래도 귀가 얇아 타인의 말을 그대로 믿어 의심치 않는 내게 유혹은 돈가스와 같은 존재였다.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면서도 끌려가고 만다. 비도 내려 기분도 꿀꿀한데 맛있는 야식과 시원하게 맥주 한 캔 어때?라는 말이 오늘따라 달게 느껴진다. 마시는 물에서도 알코올 맛이 나고 심지어 커피에서는 맥주 향이 풍긴다. 예전의 나라면 일이 끝나기도 전에 배달 어플을 켜고 즐겨찾기에 추가해놓고 사 먹지 못했던 음식점 리스트를 뽑아놓고 어느 것을 골라 먹을까요? 라며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면서도 진지한 고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직장인이 일을 계속하는 이유는 신용카드 할부 값 때문이라고 했나? 그렇다. 내 신용카드도 여느 카드와 다르지 않다. 나란 존재에게 귀한 노트북을 선물하기 위해 기꺼이 할부의 노예가 되었다. 무엇이든 끝까지 해서 골든벨을 울려본 적이 없던 내게 마지막이자 최후의 통첩인 노트북은 달콤한 방황과 쉬고 싶은 욕망을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내가 직접 번 돈으로 조금이라도 할부 값을 갚아 보자! 와 같은 포부까지는 아니지만 이 노트북이라면 어떤 일이든 절벽 끝까지 미루는 자신에게 일말의 여지를 제거할 수 있는, 가장 최상단에 있는 포식자로 충분하다.
그리하여 지친 몸을 이끌고 연습실에 들어와 요가매트 위에 몸을 뉘었다. 그래, 여기까지 끌고 온 자신에게 한 걸음 성장한 걸 축하한다.라는 말을 끝내기도 전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한기가 들어 눈을 뜨니 벌써 1시간이 훌쩍 지났다. 만약 집이었다면 그대로 옷만 갈아입은 채 귀찮아하며 이불 속에 들어가 그 밤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잠으로 도망쳤을 것이다.
처음에는 벽 너머로 들리는 온갖 잡 소음에 당황하고 짜증도 나고 이렇게 투자할 가치가 있을까? 란 물음에 냉면에 겨자 풀듯 헤드폰으로 타협을 했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불편함이 남아 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인간이 망각의 동물이라 그런 것일까? 아니면 적응이 빠른 덕분일까? 내 방보다도 작고, 불편하고 그저 앉아서 망상만 하는 이 공간이 서서히 나를 받아들이고 있음을 느꼈다. 더운 여름, 비가 줄줄이 내리고 이 적지 않은 짐들을 다시 옮기고 새로운 공간을 찾아 나서야 하는 게 사실 제일 귀찮았다.
생각해보면 일하는 곳에서도 가까웠고 비용도 예상금액과 맞아떨어졌고 번화가에 있어 위험하지도 않고 cctv와 버튼키가 있어 분실의 위험도도 매우 낮았다. 딱 하나, 내 방을 침투하는 옆 방의 소음만 해결되면 나에게 최적의 공간이었다.
아직 많은 시간을 살지 않았지만, 나이를 먹다 보면 온전히 내 마음에 드는 상황이나 사람을 만나기 쉽지 않다. 물론 재력과 시간이 맞춰진다면 얼마든지 내게 맞출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참 매몰차게도 내가 원하는 것을 쉽게 가르쳐주지도 알려주지도 않았다. 뭐든 스스로 알아가고 배워가고 터득해가야지만 진정으로 내 것이 되었다. 아직까지 분에 넘치는 시련과 고난은 겪어보지 않아 견딜 수 있을 만큼의 실패와 낙담을 경력으로 여태껏 살아올 수 있었다. 한 번의 경험일 뿐인데 신기하게도 의도치 않게 쓰이는 곳으로 이끌려 사람 취급받고 사람대접받았다.
겁이 많은 아이는 도전도 해보지 않고, 그대로 보낸 기회들에 후회만 하다 이 지경까지 되었다. 처음에는 풀리지 않는 인생에, 화도 내도 욕도 하고 한탄하고, 대상 없는 누군가에게 원망도 해보았지만 그럴수록 나는 더 초라해졌다. 적지 않은 나이에 다시 무언가를 해보는 건 이전보다 더 많은 노력과 감정을 소모해야 하고 시간과 돈은 말할 것도 없다. 어느 기준선에 다다르기 전까지는 모든 실패들이 수련 겸 치명타가 된다. 이 5평의 작은 연습실이 부족한 나와 새싹과도 같은 작은 도전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는다. 지금도 이렇게 마음 편히 글을 쓸 수 있게 도와주는 이 공간을 조금 더 사랑해보고 마음껏 즐기고 피, 땀, 눈물 흘려가며 동고동락 해보고자 한다. 게임도 어중간한 레벨에서 시작하는 것보다 레벨 1 밑바닥부터 시작해야 이것저것 시도해보기 좋다. 나 혼자만 레벨업 안 하는 시대도 아니고 끝이 보이지 않는 항해에 지금은 걱정보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바닷물을 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