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 완주

_언니

by 최서영

※ 본 에세이는 언니와 동생, 시인 엄마, 극작가 아빠 4인의 릴레이 에세이입니다.

twitter @bysau_


"배움에는 나이가 없다."


외할아버지는 손자 손녀들에게 늘 말씀 하셨다. 할아버지는 그 말의 의미를 매번 몸소 보여주시는 분이셨다. 지금도 거실에는 할아버지가 각종 마라톤, 걷기 대회에서 따온 메달들과 상장들이 빼곡하다.


춤과 노래도 좋아하셔서 할아버지의 컴퓨터에는 몇 백 개의 뽕짝과 트로트 플레이리스트가 있고, 노인대학에서 무언가 끊임없이 배워 오신다. 할아버지가 달리기를 시작한 건 60이 다 돼서라고 한다. 시작했다면 끝까지 완주한다, 완주하면 된다. 메달과 상장은 자연히 딸려오는 것들이다.


나는 SES의 <달리기>라는 노래를 좋아했다. 그 노래를 들으면 할아버지가 달리는 모습이 떠오른다. 더우나 추우나 달리던 할아버지는 어느 날 입이 돌아가는 병인 구안와사라는 병을 얻어 자식들을 걱정시켰지만, 다행히 며칠 집에서 쉬니 다시 입이 돌아왔다. 그 후로도 할아버지는 계속 달렸다.


외할머니는 가끔 내게 남자친구랑 잘 지내냐고 물었는데, 그때마다 남자친구는 달라져 있었다. 나는 어른이 되고 많은 연애를 해왔다. 대부분 연애 기간은 6개월 남짓으로 짧았다. 나는 어째서 이렇게 사람을 오래 사귀지 못 하는가 잘 몰랐었다.


"완벽한 사람은 없다. 60%만 마음에 들어도 그냥 그런 사람이구나 하고 만나라."


할머니가 들려준 '사귐'에 대한 조언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지만, 그때 당시 사귀던 남자친구 역시 금방 헤어졌다. 인간관계를 달리기에 비유한다면 나에겐 완주란 거의 없었다. 비단 연애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었다.


관계가 잘 이어지는 듯 하다 마음이 확 돌아서기도 하고, 마음이 돌아서지도 않았는데 선뜻 먼저 말을 걸기 어려워 관계가 끝나기도 했다. 상대에게 화가 나는 순간이 있다면, 나는 그 관계를 최대한 빠르게 중단해왔다. 어느 날 뒤 돌아보니 내 주변에 남은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외롭다는 생각이 들면 새로운 사람을 사귀었다.


나는 친구들 인생에 과몰입 하는 안 좋은 습관이 있었다. 친구들은 그런 나를 '오지라퍼'라고 불렀다. 내가 특히 과몰입 했던 부분은 친구 엄마나 친구 아빠의 병이었다. 내가 고등학생이던 때 엄마의 신장병을 헤아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친구의 인생으로 환생해서 내 앞에 불쑥 나타났다. 그래서 친구 앞에서 울고 있는 내가 너무 싫었다.


한번은 대학에서 복학생 선배들과 같이 문예 창작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학기를 마무리하다가 알게 된 것인데, 수업을 가끔 안 들어오고 공부에 게을렀던 한 선배가 나와 같은 성적을 받았다는 거다. 나는 매번 퇴고를 열심히 했는데, 그 선배는 지난 수업 때 제출 했던 원고 그대로 들고 오는 날도, 뻔뻔하게 원고를 들고 오지 않아 합평 시간에 입으로만 때우는 날도 있었다. 심지어 마지막 수업에서도 원고는 초고와 거의 그대로였다.


"저 선배는 교수님이랑 그렇게 수업이 끝나고 술을 마셨대."


친구 입에선 나대신 험담이 나왔다. 결국, 글쓰기도 사회생활인가 너무나 화가 났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여태껏 살면서 지각을 하는 일이나, 숙제를 해오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오답 노트 같은 숙제는 한번 쓰는 거로는 스스로 성에 안 차 두 번씩 써가는 날도 있었다. 약속 시각을 지키는 것도 칼 같아서, 밖에서 친구를 만날 때 늦게 오는 친구들 덕에, 만나는 장소를 자주 서점으로 정했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친구를 기다리며 서점에서 책을 읽었다. 초등학생 때는 방학이 끝나고, 학교에 갔는데 찰흙으로 만든 방학 숙제가 잠깐 화장실 갔다 온 사이 깨져있었다. 깨진 방학 숙제를 엄마 교실에 들고 갔더니 다른 선생님들이 내 과제를 대신 만들어준 적도 있다. 성실함이 성적이 된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 성실함에 대해서는 엄마의 성격을 많이 닮았다. 여러 날 몸이 아팠던 엄마는 매일 약을 챙겨 먹어야 했는데, 약 먹는 시간을 꼭 알람으로 해두었다. 병원에서 하지 말라는 건 절대 하지 않는 게 엄마의 원칙이다. 지금도 엄마를 만나면 어디선가 계속 알람이 울린다. 엄마와 해외여행을 간 날, 엄마는 깜빡하고 약 시간을 놓치면 계속 왜 내가 약 먹는 걸 잊었을지 곱씹었다. 내가 본 엄마의 모습은, 오랜 교직 생활을 해온 선생님들에게 주어지는, 안식년 같은 쉼 한 번이 없었다. 방학 기간에도 선생님들은 항상 바빴고, 휴가도 엄마는 자주 어딘가로 여행을 떠났다. 엄마의 진짜 쉼은 오직 병원에서 아픈 자신의 몸을 치료하는 시간뿐 이었던 거다.


나도 일에 대한 면에서도 엄마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는 지인 중엔 아이를 돌보기 위해 일을 그만둔 엄마들이 많았다. 나는 결혼하기 전에도 꼭 그런 사람들에게 "후회되지 않냐, 힘들지 않냐, 정말 괜찮냐" 물었다.


나는 일을 하러 나갈 때, 꼭 아이에게 '엄마 다녀올게'라고 꼭 말한다. 누워 잠을 자는 아이의 뒤통수에다가도 말한다. 나의 출근길, 그 옛날 엄마가 나만 했을 때의 출근하는 모습이 떠올라 아침 댓바람부터 울면서 청승맞게 통근버스를 탄 날도 있었다. 한 사람의 하루엔 얼마나 많은 타인이 그늘처럼 들어서 있는 걸까.


인간관계에선 내치려고 해도 내쳐지지 않는 사람들도 존재했다. 끝났다고 생각했던 관계가 꺼지지 않은 불씨처럼 다시 이어지기도 했다. 그 때문에 인간관계라는 것은 함부로 재단해선 안 되며, 되도록 척을 지지 않는다면 언젠가 약처럼 쓰이는 관계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특히 내 결혼식 날 왔던 엄마 아빠의 수많은 지인의 면면을 보며, 인간관계는 애초에 내 뜻대로 흐르게 두어서는 안 된다는 효험까지 발견했다. 그들의 얼굴에선 엄마, 아빠가 쌓아온 인생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말한 60%의 의미도 함께 말이다. 사람에게 매번 그 60%를 찾는다면 우리의 인생은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성장이 될 것이다.


그러다 내가 가끔 할아버지처럼 구안와사나 엄마 같은 신장병에 걸리면 어쩌지, 병에 대한 두려움은 분명 있다. 그러나 병에 대한 걱정을 미리 한다 해서, 또는 성실하게 내 몸을 지켰다고 해서 내 몸에 병이 생기지 않으리란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러니 때때로 일을 그만둘 수 있는 용기와 임기응변으로 사건을 때우기도 하는 마음의 여유, 인생에 있어 진짜 중요한 게 무엇인지를 아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사람들의 질투를 받는다고 하여도 기분 나쁘지 않을 수 있을 그것만 같다.


무엇이 되었든 달리기를 완주한다면 딸려오던 메달과 상장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