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킹맘 무기징역을 선고 받은 모범수

워킹맘 다이어리

by 최서영

페이스북 피드를 읽다 손가락이 멈춘 기사. “맞벌이 부부, 여성 가사노동 남성의 3배” 당연한 것 아닌가 싶은 생각에 이르다, 지금의 내 삶이 당연하지 않을 날도 있으려나 싶어지는 것. 나로 따지면, 딸 조아 어린이집 하원을 시키기 위해 단축근무를 하니 원래 정시퇴근보다 2시간 일찍 퇴근하고, 남편은 야근하는 일이 많으니 정시퇴근보다 2시간 늦게 귀가할 때가 많다. 집에 머무는 시간만큼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에 할애하는 시간에 대해서는 여성인 내가 많을 수밖에 없다. 만약 나에게만 하루 한 번 정지버튼을 누를 수 있는 특권이 부여된다면, 나는 아마도 퇴근 후 아이를 돌보는 2시간에 정지버튼을 누르지 않을까. 아이와 함께 있기 싫다는 말도 아니고, 가사노동을 억울하게 더 하고 싶다는 말도 아니다. 그저 나에게도 야근이라도 좋으니 혼자 있고 싶은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회사에서 대대적인 인사발표가 난 직후, 새로운 직원들을 만날 생각에 새벽 5시에 겨우 잠들었다. 11년 차 직장인인데도 나는 매번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데 신입인 셈이다. 새로운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다가 나는 기어코 새빨간 얼굴을 식히며 상대방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한다. 내향적이라던가, 내성적이라던가 이런 말은 솔직히 내가 봐도 재미없다. 이건 부끄러움이 아니라 긴장에 가깝다. 내가 상대방에게 혹시라도 미운털이 박혀 곤란을 겪지는 않을까. 지금의 내 모습은 나를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불안과 강박에 가깝다고 느낀다.


얼마 전, 한 칼럼을 읽다가 ‘공적자아’와 ‘사적자아’라는 단어를 처음 접하게 되었다. 찾아보니 문학적 표현이나 수사가 아니라 심리학 용어였다. 칼럼에는 일에 중독된 사람의 경우, 공적자아가 발달하는 반면, 사적자아는 미발육 상태나 다름 없다고 했다. 나뿐 아니라 직장인이라면 하루 24시간 동안 비율적으로 보았을 때, 공적자아로 할애하는 시간이 훨씬 많다. 공적자아도 필요하고, 사적자아도 필요하다. 사적자아를 키우는 방법은 나만의 시간을 갖는 것이다. 무엇이 되어도 좋으니 나만의 시간을 가지면 사적자아를 만난다. 아무리 고단하다 할지라도 하루를 마감하며 조용히 책을 읽거나, 글을 쓴다. 이 모든 게 사적자아를 키우는 일이다. 시간의 물리적 크기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사적자아를 추구했는지가 더 중요한 것 같다. 생각해보면 결혼하기 전에 사적자아를 충분히 키울 수 있는 물리적 시간이 있었을 때에도 내 시선은 공적영역에 있었다. 사적자아라는 것을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살아왔던 것 같다.


그러나 내 삶에 사적자아는 분명 존재했다. 내 사적자아는 미발육 상태로 여지껏 존재했으니 늘 불안할 수 밖에 없었을거라는 생각에 이른다. 나는 지난동안 만삭의 몸, 그리고 아이를 낳고서도 백일도 안 돼 기어코 출근하는 내가 가여웠다. 그러나 한편으로 남들도 다하는 일, 별일 아닌 일에 질질 짠다고 여겼다. 내가 나를 가여워하는 건지 나약하다고 여기는 건지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누구인가. 쉽고 짧은 질문인데 오랜 시간 답을 찾지 못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가여워했던 것도, 나약하다고 여기던 것도 모두 나다. 아마도 가여워했던 건 사적자아고, 나를 채찍질했던 건 공적자아인 것 같다. 하루를 쪼개보다가 이런 질문이 내 머리를 스친다. 육아는 공적영역인가, 사적영역인가. 솔직히 정답은 없다고 여기지만, 공적영역이라는데 내 머리가 더 기운다. 육아도 분명한 ‘노동’이다. 그런데 사적영역 같아 보이는 건, 집이라는 공간이 오랜 시간 사적영역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육아가 어려운 것은 이거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생각에는 육아와 가사노동은 공적영역인데, 타인의 인정을 받을 곳이 전혀 없다.


나는 공적자아를 해내는 데 너무나 지쳐버렸다. 이 방법이 아닌 걸 알면서도, 재택근무를 오래 하게 되면서 아이를 방치하고 있다는 죄책감을 벗어나기 위해 도피성으로 다시 회사로 출근했다. 시어머니에게 이런 고민을 털어놓았다. “어머니, 재택근무를 하면서 아이에게 종일 유튜브를 보여줍니다. 육아도 육아지만 일해야 하잖아요. 육아도 하지만 일을 합니다. 그런데 육아도 잘 해내지 않고 그렇다고 일을 잘 해내는 건 또 아닙니다. 촉감놀이도 하루 이틀이고, 어떻게 놀아줘야 할까요?” 어머님도 오랜 시간 워킹맘이었다. 아이들을 떼어놓고 일본으로 유학 갈 정도였으니까 여러모로 나보다 만랩이다. 그렇게 오래 워킹맘이던 어머님이 내게 말한 것은 지난날에 대한 후회였다. “커리어가 무슨 소용이 있었을까. 지금 날 봐. 그냥 손자 돌보는 할머니야. 그때 아이를 최우선으로 하지 못 한 걸 난 지금 제일 후회해. 아이를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해.”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잃고 싶지 않은 게 있었지만 결국 잃었다는 것이고, 한 인간을 길러낸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깊은 책임을 수반하는 일이다. 세대 차이로 받아들일 문제는 아니다. 공적자아와 사적자아의 균형을 지키는 건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인생이란 게 마음처럼 쉽게 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이해한 어머님의 요지는 그랬다. 결국 어머님은 지금 자신의 삶으로 ‘헌신’을 말하고 있었다. 어머님에게 자식은 ‘소명’이었다. 나에게 어머님의 모습은 수행자, 스스로 무기징역을 선고하고 묵묵히 죄를 인정하고 수감생활을 하는 모범수 같아 보였다. 어머님과 나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 안에 희망이 있고 대안이 있을 것만 같다. 오늘의 넋두리는 여기까지. 오늘도 죄책감으로 아이를 키우지 말자고 다짐하고 죄책감으로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하루였다. 오늘도 정말 몰라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