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지성인들의 신앙 고백, '관용'의 씨앗을 심다
2023년, 세계적인 임상 심리학자이자 작가인 조던 피터슨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사람들은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오랫동안 종교와 도덕, 인간 심리에 대한 연구를 이어왔지만, 신앙을 가지는 것에 대해서만은 신중한 태도를 보여왔었고 그것은 신을 거부하는 태도로 비춰졌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나는 이제 하나님을 믿는다”고 여러 인터뷰를 통해 선언하며, 신앙이 인간의 도덕적 기반과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강조하는 한 명의 그리스도인으로 완전히 그 형태가 변모해버렸다.
이러한 흐름은 국내에서도 발견된다. 최근 ‘너진똑’, ‘유읽남’과 같은 지성을 갖춘 젊은 유튜버들이 기독교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면서 이들을 좋아하던 구독자들 사이에서 적지 않은 충격을 주고 있다. 너진똑과 유읽남은 여전히 그들이 늘 해오던 '방식'으로 논리적인 사고와 지적 탐구를 바탕을 가지고 관심사(현재는 '신앙')를 연구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들이 신을 믿게 된 '계기'가 그 지성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 '방식'과 '계기'를 구분하며 모든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는 점이 개인적으로는 흥미로운 지점이었다. 결론적으로 그들은 현대 사회에서 기독교적 가치가 어떤 의미를 가져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는 것이 바로 PC주의(정치적 올바름)와의 관계이다.
PC주의는 인종, 성별, 성적 지향, 장애 등 다양한 영역에서 소외된 이들을 배려하고, 포용적인 언어와 문화를 확산시켰다. 그러나 PC주의가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버리는 순간, 기존의 신념 체계와 충돌하는 일이 발생한다. PC주의적 세계관에서는 ‘개인의 정체성과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는 원칙에 기반하여, 기존 도덕적 잣대를 상대화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기독교적 세계관과의 성윤리, 죄와 구원, 용서와 화해, 표현의 자유와 검열 등의 논쟁에서 차이가 두드러진다.
이를 테면, PC주의적 세계관에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있는 그대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개념을 강화하면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회개나 변화의 개념이 차별적인 것으로 간주될 때나, 성소수자 문제에 대한 기독교적 입장이 PC주의적 가치관과 대립하는 경우가 그런 예라고 할 수 있다. 신앙에 기반한 표현의 자유와 PC주의적 검열 사이의 갈등도 종종 발생한다. PC주의가 애초에 모든 가치를 포용해야 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다면, 기독교적 가치관도 포용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의문을 품는 것은 당연한 물음일 수 밖에 없다. 다양성을 주장하면서도, 특정 가치를 절대화하는 모순이 발생하는 지점이다.
'배타성'때문이 아니라, '관용 없음' 때문이다
PC주의는 본래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이 핵심 가치다. 하지만 오늘날의 PC주의는 ‘태도’가 아니라, 하나의 절대적 '이념 체계'로 자리 잡았다. “우리는 모두의 생각을 존중해야 해”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이에 반대되는 의견은 ‘차별’이라는 이름으로 배척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것이 PC주의의 가장 큰 모순이다. 기독교적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신념을 이야기할 때, PC주의적 기준에서는 이를 ‘구시대적인 사고’ 혹은 ‘혐오 표현’으로 간주할 때가 있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결국 ‘우리의 기준에 맞는 다양성만 인정한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PC주의는 기독교를 향해 “왜 특정 가치를 절대적이라고 주장하는가?”라고 비판하지만, 정작 PC주의 자체도 다른 가치를 배제하며 또 다른 절대적 진리를 만들고 있다.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면서도, 기독교적 가치는 인정하지 않는 태도 자체가 모순인 것이다.
이런 충돌 속에서, 국내에서 기독교가 비판받는 이유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흔히 사람들은 기독교의 '배타적인 교리'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관용 없음’에 있다고 본다. 기독교가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원자’로 믿는 것은 그 자체로 배타적인 교리이지만, 그런 접근으로 따진다면 천주교도 마찬가지이며, 그 외에도 다른 종교들도 각자의 신념을 절대적이라고 믿으므로, 종교의 배타성은 모든 종교가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특성이다. 문제는 이 배타성이 사회적 태도로 이어질 때다.
국내 일부 기독교계는 타 종교나 비신자들에 대한 이해와 존중보다는, 강한 배척과 비판의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종교적 신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적 발언을 하거나, 상대의 생각을 존중하기보다는 강요하는 태도를 보일 때, 사회적 반발이 커질 수밖에 없다. 결국, 기독교에 대한 비판의 핵심은 “너희가 믿고 싶은 걸 믿는 건 좋은데, 왜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느냐”는 것이다. 신념의 다양성을 인정하려면, 기독교 역시 자신의 신앙을 지키면서도 타인의 신념을 존중하는 태도를 가질 필요가 있다.
기독교적 세계관은 때때로 '우리만이 옳다'는 독선적인 태도와 결합되어, 타 종교나 비신자들의 가치관과 신념을 존중하지 않고, 자신들의 방식으로만 도움을 제공하려는 '관용 없음'으로 이어졌다. 관용 없는 이러한 태도는 개인의 고유한 상황과 필요를 고려하지 않고, '도움 받을 사람들'이라는 획일적인 기준으로 판단하고, 그들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결과로 이어졌다. 기독교적 세계관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불경한 것' 또는 '악의'로 규정하는 태도는 '관용 없음'의 한 형태다. 이는 건설적인 비판을 통해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하며 종교의 폐쇄적인 태도를 통해 배타성을 유발하는 것이다. 이는 강압적인 선교 방식으로도 이어지기도 하는데, 관용이 부족한 선교활동은 종교 간 갈등을 야기하고, 사회적 분열을 심화시킬 수 밖에 없다.
배타성이 '대상' 자체에 대한 배척성을 가진다고 한다면, 관용 없음은 '태도'에 대한 배척성을 가지고 있다는게 중요한 지점이다. 배타성은 특정 집단이나 신념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를 의미한다면, 관용 없음은 다양한 의견이나 행동을 수용하지 못하는 태도라고 보아야 한다.
특정 단어나 표현을 사용하는 것 자체를 비난하거나,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개인의 발언을 비판하는 경우는 PC주의에서도 기독교에서도 분명히 존재했다. 특히 기독교의 관용 없는 태도로 인하여 기독교의 이미지를 고착화되어 수많은 선입견을 만들어낸 것에 대해 기독교인들 대부분이 이를 인정할 것이다.
PC주의는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없애기 위한 노력이지만, 때로는 지나치게 경직된 사고방식을 사회적으로 강요하는 분위기를 낳기도 했다. 일부 PC주의자들도 자신과 신념이 다른 사람들을 '무지'하거나 '혐오주의자'로 낙인찍는 경향이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PC주의는 소수자에 대한 권익 보호하며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라는 긍정적인 가치를 추구하지만, 때로는 소수자를 지나치게 일반화하거나 이상화하는 경향으로 인하여, 소수자 내부의 다양한 의견과 경험을 무시하고, 그들을 획일적인 존재로 바라보는 시혜적인 태도로 이어져왔다.
젊은 지성인들의 신앙 고백이 던지는 의미
기독교는 '신에 대한 믿음'에 그 원형이 있고, PC주의 또한 '인간 존중'과 '평등'이라는 보편적 가치에 그 원형이 있다. 중요한 것은 기독교라는 종교나, PC주의나, 본래 취지를 살리면서도 타인의 의견을 존중하고 사회적 합의를 이루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태도가 필요하는 것이다.
내가 '신념'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는 한, '배타성'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가치 체계를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었을 때, 다른 가치를 배제하는 모순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당연하게 인식해야만 한다. 이런 맥락에서, 젊은 지성인들의 기독교적 신앙 고백은 현대 사회에서 우리의 각자 다른 신념과 가치가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지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이들은 기독교적 가치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고민과 논쟁을 거쳐 자신만의 신념을 정립하고 있다.
온라인이라는 세계는 다양한 사상이 공존하며 충돌하는 공간이다. 이제는 교회라는 물리적 공간에서만 국한하지 않고 유튜브와 같은 공간에서도 신앙이 발현되고 논쟁이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PC주의와 기독교적 가치가 충돌하는 부분도 있지만, 동시에 서로를 자극하며 새로운 논의를 만들어갈 가능성도 분명히 존재한다. 우리가 우리가 추구하는 신념을 존중하며 살기 위해서는, 그 논의의 과정에서 반드시 '관용'이 필요하다. 젊은 지성인들의 신앙 고백은 이런 과정을 촉진하는 하나의 촉매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이는 신념과 가치를 어떻게 형성해나가야 할지를 고민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