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의 크리에이티브
창작은 부서지기 쉬운 것이라 믿었다. 단단한 형태를 가지려는 순간부터 그것은 서서히 닳아 사라지기 시작한다. 모든 것은 흐르고, 유튜브의 세계는 특히 그러하다. 도킨스의 ‘밈’ 이론처럼, 이곳에서 콘텐츠는 하나의 유전자가 되어 무한히 복제된다. 원본은 희미해지고, 그저 다음 밈을 위한 재료로 남는다. 창작자로서 나는 그것을 처음에는 제대로 인지하지 못 했던 것 같다. 하나의 작은 아이디어가 퍼져나가고, 형태를 바꾸고, 새로운 의미를 가지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마치 유기체가 진화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과 같다.
내가 유튜브를 시작하게 된 이유는 거창하지 않았다. 회사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었고, 개인 채널을 만들어 소셜미디어에 대해 더 깊이 배우고 싶었다. 또한, 임신을 하게 되면서 출산과 육아 과정을 기록하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내 경험이 비슷한 환경에 놓인 엄마들에게 작은 위로와 도움이 되길 바랐다. 그렇게 시작된 브이로그는 별다른 기획 없이 일상을 담는 것이었기에 꾸준히 지속할 수 있었다. 주 타겟층이 또래 엄마들이었기에 광고 협찬도 자연스럽게 육아 관련 제품들로 진행했다.
처음 영상을 만들던 날이 떠오른다. 밤을 새워 촬영하고 편집한 후, 작은 떨림과 함께 업로드 버튼을 눌렀다. 몇 개의 조회수, 몇 개의 댓글이 모이면서 나의 세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나는 그 세계가 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느 순간 내가 만든 콘텐츠는 내가 시작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유행의 일부가 되었고, 나는 점차 그것을 따라가는 사람이 되었다. 처음에는 나만의 창작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밈을 소비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콘텐츠를 만들고 있었다.
유튜브는 창작자의 개성을 필요로 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소모한다. 유행하는 밈을 따라야 했고, 시청자들이 원하는 것을 고민해야 했다. 처음엔 나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점점 알고리즘이 원하는 이야기를 만들게 되었다. 밈은 복제되며 의미를 잃고, 나는 더 이상 내가 무엇을 만들고 싶은지 알 수 없었다. 창작은 언제나 나의 것이어야 했지만, 그것은 이미 타인의 것이 되어 있었다. 창작의 주체로 남고 싶었지만, 점점 더 피로감이 쌓였다. 그것은 단순한 피로가 아니라, 점차 나의 감각과 욕망을 닳게 하는 지루함이었다. 권태는 그렇게 찾아왔다.
‘퇴사해도 되려나?’, ‘이거 잘하면 파이프라인이 되겠는데?’, ‘전업 유튜버가 되어볼까?’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었다. 프로 N잡러, 디지털 노마드라는 단어만 들어도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구독자 수와 조회수는 정체기를 맞았고, 유튜브에 권태를 느끼기 시작했다. 권태를 벗어나기 위해 시작한 유튜브에서 또다시 권태를 느끼다니. 회사에서 남의 돈을 받으며 일하는 것만큼이나, 유튜브에서 돈을 벌어가는 것 또한 엄청난 정신적, 육체적 노동이라는 걸 깨달았다.
권태는 단번에 오는 것이 아니다. 천천히 스며든다. 나의 것이 아닌 것들을 만들면서도, 나는 여전히 ‘창작자’라는 이름을 붙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창작이 아니라 생산이었다. 그런 매너리즘은 다시 우리를 처음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나는 왜 유튜브를 하려고 했을까?’ 충분한 고민 없이 시작하면 결국 원점으로 돌아가게 된다. 누군가 “유튜브할 거예요.”라고 말하면, 나는 “왜요?”라고 되묻고 싶다. 유튜브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유행에 휩쓸릴 뿐이다.
알고리즘의 강요 속에서, 나는 클릭을 부르는 제목을 고민하고, 보다 강한 자극을 주는 편집을 연구했다. 그 과정에서 나 자신을 소모했다. 무언가를 만들어낸다는 것보다, 무언가를 빠르게 소비하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해졌다. 이 과정에서 나의 창작 윤리는 서서히 무너졌다. 처음에는 조금씩, 그러나 결국에는 완전히.
이것이 창작자의 윤리에서 가장 멀어지는 순간일 것이다. 밈이 재생산될수록, 창작자는 자신의 본질에서 멀어진다. 나는 점점 창작을 사랑하지 않게 되었다. 반복되는 패턴 속에서 벗어나려 할 때마다, 유튜브는 나를 다시 끌어당겼다.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두가 원하는 이야기. 그것을 말해야 한다고,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속삭이며. 그리고 나는 그 유혹을 매번 뿌리치지 못했다. 살아남기 위해, 나는 창작을 버리고 밈을 선택했다. 그것은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나를 조금씩 무너뜨리는 일이기도 했다.
크리에이터로서 번 돈은 수익이 되었고, 생활을 채우는 파이프라인이 되었다. 이번 달 돈이 부족하면 유튜브를 열심히 하고, 생활이 고되다 싶으면 블로그가 살림 밑천이 되어주었다. 마음의 양식이 필요하면 브런치에 글을 올렸다. 조각조각들이 모여 나를 이루었다.
“유튜브할 거예요.”라는 말 뒤에는 어떤 '권태'가 자리하고 있다. 내가 본 유튜브를 하겠다는 사람들은 대개 ‘퇴사’를 꿈꾸고 있었다. 지금 하고 있는 것 이외에 무언가 새로운 것을 도전하고 싶은 마음, 권태로운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 누군가에게는 돈, 누군가에게는 재미, 누군가에게는 못 다 이룬 꿈, 누군가에게는 공감. 그 권태는 형태는 다르지만 향하는 방향은 같았다. ‘크리에이터가 되어보자!’
그러나 우리는 신중해야 한다. 창작은 자신을 잃어버리는 행위가 아니다. 타인과 연결되기 위해 자신을 복제하는 순간, 창작자는 가장 큰 유혹에 빠진다. 모든 것이 밈이 되는 세계에서, 내가 만드는 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그래야만 창작은 살아남는다. 그리고 그래야만, 우리는 스스로를 잃어버리지 않는다. 밈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면, 최소한 그 안에서 나를 잃지 않기 위해 발버둥쳐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유혹에 빠지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저자 최서영
공공기관에서 14년 차 소셜미디어 담당자로 일하며, 다양한 콘텐츠를 기획하고 운영해왔다. ‘미니부부’라는 유튜브 채널을 잠시 운영한 경험이 있으며, 현재는 꾸준한 연재 콘텐츠는 없지만, 인스타그램, 브런치, 유튜브, 블로그 등 여러 소셜미디어 플랫폼에서 단발적으로 콘텐츠를 발행하고 있다. 다양한 채널을 통해 나만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점에 매력을 느끼며, 항상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다양한 콘텐츠를 통해 사람들과의 연결을 강화하고, 소셜미디어를 더욱 풍부하고 의미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자 노력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