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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간극

사순절 Think 프로젝트 묵상에세이《그러므로 생각하라》

by 최서영

지난 주일, 속초에 있는 엄마의 교회에서 설교를 들었다. 낯선 곳에서 낯익은 이야기를 들으면 묘한 기분이 든다. 마가복음 2장 1절에서 12절, 중풍병자가 고침을 받는 장면이었다.




1절 수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신 것이 들린지라
2절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3절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절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5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6절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7절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을 모독하는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8절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9절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10절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가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11절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12절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마가복음 2장 1절에서 12절 말씀은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장면을 담고 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죄 사함의 권세를 가지고 계심을 강조하는 장면이다. 중풍병자를 고치시기 전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선언하고, 이를 의심하는 서기관들에게 예수님의 권세를 증명하기 위해 실제로 병을 고치시는 모습이다.


예수님께 사람을 데려가기 위해 네 사람이 들것을 들고 지붕을 뜯어내는 장면이 그려졌다. 사람들은 이 장면을 이야기할 때 예수님의 기적에 집중하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곧 중심을 아시고"라고 했다. 기적보다 중요한 것은 믿음이었다. 나는 성경을 관통하는 단어가 ‘믿음’이라는 사실이 참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했다. 왜 하필 '믿음'일까. '믿음'이 아니라 '기적'일 수는 없었을까. 이렇게 많은 기적을 보여주었는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믿지 않았다. 심지어는 믿었다고 했던 사람들조차 믿음을 쉽게 잃어버렸다. 나처럼. 나는 믿는다. 하지만 믿는다고 말하는 순간부터 믿음이 증발하는 것 같다. 기적을 바라는 것과, 기적이 없더라도 믿는 것은 얼마나 다른가. 간절히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실망과 원망이 밀려오는 순간, 믿음은 한없이 얇아진다. 인간의 유약함이 ‘믿음’이라는 단어 안에 담겨 있다.


믿음은 종종 기적의 조건처럼 여겨진다. 기도하고 믿으면, 기적이 일어날 거라고. 하지만 예수님은 기적을 먼저 보여주지 않으셨다. 믿음이 있는 중심을 보셨다. 나는 그 ‘중심’을 자꾸 들여다보게 된다. 기적을 바라며 믿는다고 하는 것과, 기적이 없어도 믿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믿음과 기대, 믿음과 조건부 신뢰의 간극은 얼마나 멀까.


* 본 글은 한소망교회 사순절 Think 프로젝트 《그러므로 생각하라》 묵상집을 토대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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