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댄스 에세이 「폴 타는 할머니가 되고 싶어」
비키니, 폴복, 폴웨어, 브라탑. 요즘 내 검색창 근황이다. 가지고 싶은 게 많아지는 건 내 입장에서는 괜찮게 살고 있다는 증거다. 출퇴근길에 폴웨어를 검색하는 재미로 살고 있다. 노출 부위가 많은 비키니 보다는 흡사 발레복 처럼 생긴 예쁜 셔링이 들어간 폴치마를 입고 싶지만 폴댄스는 초보일수록 폴에 매달리는 요령이 떨어져 상대적으로 피부 마찰 표면이 넓어야 폴에 잘 매달려 있어야 하기 때문에 치마 보다는 바지, 바지보다는 삼각 비키니를 골랐다. 뱃살은 가려야 하므로 배를 덮는 하이웨스트 디자인으로만 장바구니에 담아놨다.
또한, 폴을 탈 때는 악세서리는 착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 특히 반지와 목걸이는 폴에 스크래치를 줄 수 있어서 다칠 수 있다.
원피스 형태로 일체형 수영복 보다 맨살이 폴에 닿을 수 있는 투피스 형태가 좋은 것 같다. 첫 수업을 무료로 체험 할 때만 하더라도 노출이 있는 폴웨어가 부담스러웠지만, 한 달이 지난 지금은 오히려 폴을 타기에 안전할 수 있는 노출이 있는 폴웨어를 찾고 있다. 발레복처럼 예쁜 셔링이 들어간 폴복도 입문반을 졸업한 이후에야 가능 할 것 같다. 예쁘게 보이기 위한 폴웨어이지만, 아직까지는 폴 탈 때 내가 폴을 더 잘 탈 수 있고 안전한 옷이면 좋겠다. 속옷처럼 어깨끈이 일자인 것 보다는 끈이 어깨를 가리지 않으면서 가슴 노출을 잡아줄 수 있는 타이트한 홀터넥 브라탑이 폴을 탈 때 내 몸에 더 잘 맞는 것 같다.
내가 처음으로 구매한 폴복은 검은색 홀터넥 브라탑이었지만, 그 이후로는 분홍색 홀터넥 브라탑을 두 개 더 샀다. 단독세탁하기 귀찮으니까 빨래할 때도 변형이 안 되고 물 빠짐도 없는 의상이면 더 좋을 것 같았다. 처음에는 바지는 그냥 짧은 속바지만 입어도 충분했는데 폴을 타다 보니 허벅지 깊은 안쪽 살이 폴에 닿는 동작을 배울 때는 속바지마저도 접어 올려야해서 불편해서 하의도 사고, 처음에 샀던 분홍색 홀터넥이 찍은 영상에서는 옷을 안 입은 것처럼 보여서 다른 색의 브라탑도 여러 개 샀다. 정신 차려보니 옷장 한 칸을 폴웨어로 내어주었다.
“오늘도 폴댄스 가?” 직장동료가 내가 수업을 가는지 눈치 채는 날은 내 목덜미 너머로 홀터넥의 어깨끈이 보이는 날이다. 일주일에 두 번은 꼭 가는 폴댄스 수업. 이제는 폴댄스 하는 내가 직장동료들에게도 화제가 되어 오죽하면 이름 앞에 ‘홀터넥’이라고 호를 붙여 부르며 장난을 치기도 한다. 이름 앞에 붙는 ‘호’라는 것이 자기 인생에 대한 가치관과 취향을 반영한 것이라면 홀터넥이라는 호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홀터넥 최선생. 마음에 든다.
벌써 3일 연속으로 홀터넥 브라탑을 입고 있다. 3일 연속은 처음이라 나에게도 실험이다. 내가 3일 연속으로 폴댄스 수업을 가는 이유는 오늘이 입문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폴 파티를 열기 때문이다.
“여보, 크리스마스 폴파티를 한대. 갔다 와도 돼?”
풀파티는 들어봤어도 폴파티는 처음이었던 남편은 못 들을 거라도 들은 사람의 얼굴로 되물었다. “몇 시에 끝나는데? 술도 마셔?” 남편의 머릿속은 스트립댄서들이 난잡한 광란의 파티라도 벌인 모양이었다. 밤 9시에 시작한 폴파티는 밤 11시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잠깐 중간에 쉬라고 간식을 주셨는데 그 시간을 빼고는 내리 폴만 탔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술은 없었다.
폴댄스 학원에 들어서자 다들 산타복장을 하고 수업을 기다리고 있었다. 간단하게 손목과 발목을 풀어주며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어준 뒤 각자 잘 할 수 있는 동작을 연습했다. 지금까지 했던 영상들을 돌려보면서 계속 연습만 했다.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동작으로 영상을 찍기 위함이었다. 영상은 선생님이 다 찍어주었고 편집까지 다 해서 보내주신다고 했다. 헐벗은 몸이라 지금까지 SNS에도 올리지 않았던 폴댄스 영상과 사진. 앞으로도 이걸 올릴 수 있을까, 올릴 용기가 과연 내 속에서 생겨날까 의문이었지만 사진도 열심히 찍고 영상도 열심히 찍었다.
두 시간 내리 다들 열과 성을 다해 폴댄스 촬영에 임했다. 더블폴이라고 해서 함께 하나의 폴에 두 명이 올라 동작을 해보기도 했고, 폴 아래서 예쁜 포즈를 취하고 다함께 촬영을 하기도 했다. 나에게 폴댄스란 우울증을 벗어나기 위한 탈출구이자 매순간의 도전이었는데, 처음으로 선생님과 수강생들에게 폴댄스란 무얼까 상상해보고 어떤 의미일지 가늠해보는 시간이었다.
“이번엔 놀이터를 해볼 거에요.” 선생님이 폴 거의 꼭대기 까지 올라가 왼손을 잡아주면 오른손으로 나도 폴을 잡고 힘차게 뛴다. 선생님이 잡아주기 때문에 그간의 동작처럼 어렵지 않고 쉽게 폴 위에서 새처럼 날 수 있다. 멀리서 보면 정말 놀이기구처럼 보인다. 언젠가 “운동을 하면 온 세상이 놀이터가 된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오늘은 정말 내게 폴은 놀이터가 되어주었다.
수업 때마다 새로운 동작을 배우고 특별한 커리큘럼으로 새로운 경험을 하지만 이번 수업은 폴 앞에서 거울 셀카를 찍고 간식도 먹고 자신에게 어울리는 옷도 입어보며 20대 때 여자친구들과 했었던 여행에 놀러온 기분이었다. 몇 번 만나보지 않은 사람들과 심지어 오늘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지만, 너무도 뜻하지 않게 아무 준비도 없이 들이닥친 내 오랜 친구를 만난 기분이었다. 폴댄스는 내게 처음으로 사회적 잣대나 대상화에서 벗어나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함이 아닌, 오로지 스스로의 건강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한 도전이고 기회되어 주었다. 폴 앞에 선다면 매일이 도전이고 기회였다.
두 시간의 폴 파티가 끝났다. 남편에게 말한 예정시간보다 한참이 지나 신데렐라처럼 황급하게 신발을 신고 밖을 나서는데 선생님이 말했다.
“고생했어요. 여기서만큼은 내 안에 있는거 다 끌어올리세요.”
선생님의 그 말 한 마디에 나오려던 눈물을 삼키고 눈물을 들킬까 서둘러 학원 밖을 나왔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억누르고 있던 것들에 대한 분출을 말하는 걸 수도 있고, 아름다움에 대한 것일 수도, 잠재력에 대한 것일 수도, 자신감에 대한 것일 수도, 힘에 대한 것일 수도, 아니면 이 모든 것들을 통칭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무엇에 대한 것이든 내 안에 있는 거만 집중하자! 나는 정말로 춤바람이 난 게 분명하다.
폴 파티를 했던 수업이 끝나고 며칠이 지나 선생님에게서 그날 찍었던 영상편집본을 받게 되었다. 어린이집에서도 이렇게 지극정성으로 원아의 개인영상을 보내주지 않는데 폴댄스 선생님이 되려면 폴댄스 실력만큼이나 영상편집 실력도 갖춰야되는구나 딱히 어디에 쓸데는 없는 깨달음을 또 얻었다.
막상 선생님이 지극정성으로 편집해주신 폴파티 영상을 받고 보니 감히 엄두도 안 나던 마음이 생겨났다.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싶어진 것이다. 그래서 남편에게 허락을 맡았다. 내가 운동해서 내 계정에 올리겠다는데 남편에게 허락을 맡는 것이 이상하지만, 폴댄스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물어보았던 것 같다. 역시나 남편은 자기한테 그런 허락은 받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다들 좋게 봐줄 거 같아.”
정말이었다. 다들 좋게 봐주었다. 그래도 섹시하다는 댓글 하나 정도는 달릴 줄 알았는데 짜맞춘 사람들처럼 하나같이 섹시하다를 제외하고, 귀엽다고들, 멋있다고들, 건강해보인다고들 했다. 이제는 매수업마다 인스타그램에 올릴 계획이다. ‘여보, 방금 한 말 후회하지 않기로 약속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