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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도 춤이 되는 - 헐리우드 스핀, 피앙새

폴댄스 에세이 「폴 타는 할머니가 되고 싶어」

by 최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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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헐리우드 스핀’과 ‘피앙새’라는 새로운 동작을 배우고, 지난 수업에서 배웠던 ‘머메이드’와 ‘이카루스’를 다시 익혔다. 머메이드는 예전에 핀업걸 동작을 한 후 이어서 해봤던 동작이었지만, 다시 하려니 마치 처음 배우는 것처럼 느껴졌다. 먼저 오른손은 높이 폴을 잡고, 왼손은 구스넥 그립으로 잡는다. 오른다리를 ㄱ자로 폴에 걸고 왼다리를 뒤로 힘 있게 뻗는 동작이 ‘헐리우드 스핀’이다. 이 스핀 후, 두 다리를 쭉 뻗었다가 다시 접고, 왼손을 풀어 무릎에 손을 가져다 댄 채 회전하는 동작이 ‘머메이드’다. 다시 왼손도 오른손 높이까지 올려 폴을 잡고, 오른다리만 곧게 펴 시계 방향으로 크게 돌리며 바깥쪽에 폴을 붙인다. 왼팔, 오른팔 모두 엘보를 걸고 오른쪽으로 기울어지며 폴을 안듯이 감싸는 동작이 바로 ‘피앙새’. 마치 연인을 안고 있는 형상이다.


수업이 거듭될수록 동작은 점점 어려워졌지만, 이름도 예쁘고 춤선도 예쁜 동작들이 많아졌다. 피앙새에서 오른 다리를 돌려 폴에 붙이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점점 완성도가 올라가고 있음이 느껴졌다. 물론 선생님 눈엔 한참 멀었겠지만, 다양한 동작을 배웠다는 사실 자체가 뿌듯했다. 지난 수업에 이어 오늘도 인스타그램에 영상을 올렸다. 이번엔 폴에서 미끄러지는 장면도 포함했지만, 실수까지도 모두 담았다. 오늘은 어떤 동작에서 힘들었고, 어느 부위가 아팠는지까지 함께 적었다.


사실 나는 살면서 누군가에게 과시하거나 보여주는 걸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실은, 그것이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 완벽하지 않은 내 모습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 완벽했더라면 수강생이 아니라, 선생님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영상을 여러 번 돌려보았다. 보면 볼수록 완벽하지 않아서 오히려 더 괜찮게 느껴졌다. 폴 위에서는 자신을 부정할 때 느끼는 수치심이나 억울함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당당히 드러낼 때 느끼는 감정이 더 선명하게 올라온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매번 마주하기 때문에, 아주 짧은 순간에도 성취감이 밀려온다. 살아오면서 겪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항상 자신을 깎아내리며 살아왔던 나인데, 지금의 나는 정말, 자유로웠다.


영상이 주는 힘은 크다. 선생님은 각자 연습한 뒤 더 지치기 전에 영상을 찍자고 한다. 힘도 빠지고 어지럽고, ‘못 하겠다’ 싶다가도, 수강생들과 선생님이 지켜보고 있고 핸드폰에 녹화 버튼이 눌린 그 순간, 내 안에서 초인적인 힘이 생겨나기도 한다. 수업이 끝난 후 찍어둔 영상을 돌려보다 보면, 음악이 흐르고, 내 몸이 그 음악과 함께 움직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제야 이것이 운동이 아니라, '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폴을 탈 때는 잘 못한 것 같은데, 막상 영상으로 보면 제법 괜찮아 보일 때가 있다. 반대로 잘한 줄 알았는데, 영상 속 동작이 그리 예쁘지 않게 나올 때도 있다. 그래도 영상은 늘 정직하게 나를 비춰준다. 실수도, 성취도.


수업 말미에 찍는 영상은 마치 발표 같은 느낌이다. 그런데 이 발표는, 유년기에 흔히 겪던 발표의 공포가 아니다. 그땐 실수할까 봐, 친구들이 놀릴까 봐 두려웠다. 그런 부정적인 경험이 몸에 배어 발표를 꺼리는 어른이 되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다르다. 실수해도 누구 하나 비웃지 않는다. 오히려 다들 작은 성공을 더 크게 응원하고, 폴에서 내려오면 진심으로 안타까워한다. 그래서 이 수업은 내 안의 개인적인 경험이면서도, 동시에 타인과 함께 만들어가는 경험이다. 혼자만의 용기가 아니라, 함께한 눈빛과 응원의 박수로 만들어진 작은 무대.


올린 지 얼마 안 돼 댓글이 달렸다. “폴댄스는 몸이 가벼운 사람만 할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아직 입문반 수강생이라,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다. 다만 지금까지 다양한 체형의 수강생들이 있는 걸 봤고, ‘무거워서 못 올라가겠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은 없었다. 중요한 건 몸무게보다, 마찰에 익숙해지고 반복하는 힘이다.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조용히 ‘좋아요’만 눌렀다. 아직은 말 대신 움직임으로 대답할 때니까. 언젠가는 내 목소리로도 답해줄 수 있겠지.


폴댄스 인스타그램 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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