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가난

_언니

by 최서영

진짜 가난 _언니


비좁은 방, 한가득 쌓인 짐. 내가 그리는 가난의 상징적인 모습이었다.


내 인생 최초의 가난에 대한 기억은 7살 때, 아바이마을에서의 아이들이다. 실향민들이 사는 어촌마을에 나는 학생으로, 엄마는 선생님으로 나의 첫 학교생활이 시작됐다. 엄마와 함께하던 등굣길이 생생하다. 엄마의 첫차는 엑센트라는 연보라색 차였다. 새 차를 뽑고 시트 비닐도 뜯지 않은 차에 엄마, 아빠, 나, 동생 함께 늦은 저녁 첫 시승을 했던 기억이 난다. 시트도 안 벗긴 새 차에, 초보운전이던 엄마는 혹여 흠집이라도 날까, 엄마는 나에게 운전할 때만은 숨죽이고 있으라고 당부했다. 나는 한동안 차에 타면 웅크리고 숨죽여 차창 밖만 바라봤다.

첫 등교 날, 1학년 1반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선생님이 이 중에 절반은 2반으로 가라고 했다. 1반에도 학생이 그리 많지 않았는데, 갑자기 아이들이 모두 2반으로 뛰어나갔다. 2반에 아이들이 다 옮겨지자 당황한 선생님은 다시 1반으로 갈 사람 1반으로 가라고 했다. 또 1반으로 아이들이 모두 뛰어나갔다.


학교 앞에 있는 큰 침엽수를 좋아했다. 특이하게도 그 나무 안에 뾰족한 나뭇잎들을 손으로 뜯어 그 안에 들어가 노는 것을 좋아했다. 손이 아플 법도 한데 나는 그 안에 들어가 노는 걸 좋아했다. 나 혼자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비좁은 속이었지만, 꼭 한두 명은 따라 들어와 함께 나뭇잎을 모아 소꿉놀이를 했다. 놀고 나오면 예쁘게 땋아 올린 머리와 하얀 타이즈가 항상 더러워졌다. 그곳의 아이들은 놀이터 대신 매일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놀았기 때문에, 친구들은 매번 내 하얀 피부를 보며 신기 해했다. 나도 그곳에서 처음으로 우월감이라는 것을 느꼈던 것 같다. 속초라는 작은 지역에 도시가 어딨고, 시골이 어딨겠냐마는, 그때는 자신을 도시아이라고 여겼다. 아이들의 몸에서는 바닷냄새가 났다.


1학년인데도 수업이 끝나면 아이를 찾으러 오는 학부모가 없었다. 집에 안 가고 학교에서 노는 아이들이 많았다. 대부분 수업이 끝나면 학교 앞 백사장에서 놀았다. 한참을 놀다 집에 가는 아이 뒤를 따라간 적이 있다. 낡은 골목을 지나 좁은 단칸방 하나에 등이 굽은 할아버지가 얕은 숨을 내쉬고 있었다. 무서워서 뒤도 안 돌아보고 다시 학교로 뛰어갔다. 그 후 엄마는 속초에서는 가장 학생 수가 많은 다른 초등학교로 인사가 났고, 나도 덩달아 엄마 따라 그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됐다. 속초 안에도 분명히 도시와 시골이 존재한다는 그것을 전학하고 알게 되었다.


사실 우리 집도 그다지 잘 사는 집안은 아니었다. 집에는 붉은 개미나 바퀴벌레가 득실거렸다. 한번은 할머니가 라면을 끓여줬는데 개미가 둥둥 떠 있었다. 동생은 라면을 먹을 때 개미가 있는지 확인하는 버릇이 있었다. 나는 세탁실이 제일 싫었다. 왜냐면 그곳에서 할머니는 항상 담배 피우고 계셨고, 바퀴벌레가 있었다. 할머니가 보고 싶은데 바퀴벌레 때문에 세탁실이 무서워 가질 못 했다. 할머니를 보러 세탁실에 들어가려고 하면 슬리퍼를 신었는데도 항상 발가락에 힘을 주고 걸었다.


옛날 우리 집도 자가이긴 했지만, 28평 임대아파트에서 할머니, 엄마, 아빠, 나, 동생 5인 가구가 살기엔 많이 좁은 집이었다. 그런데 그 좁은 집에 책이 너무 많았다. 엄마, 아빠 두 분 다 문인이었기 때문에, 거의 매일 우편함에 책들이 꽂혀있었다. 나는 그게 너무 마음에 안 들어 어느 날은 우편함에 꽂힌 책들을 집 밖 쓰레기통에 버린 적도 있다. 책의 내용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엄마와 아빠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대단한 맥시멀리스트였지만, 나는 아빠가 이따금 "대청소하자!"고 말할 때가 좋았다. 내가 버린다고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지만, 나는 늘 잘 버렸다. 우리 집에는 베란다가 두 개가 있었는데, 신문지나 책, 상자 같은 것을 버리는 분리수거 상자가 있었다. 나는 지금도 그 옛날 베란다에 뭘 버리는 꿈을 꾸곤 한다.


나에게 '비움'은 가난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는 생산적 활동이었다. 쓸데없는 것은 때마침 버리자는 심리로 살아왔다. 가난에 대한 기억은 늘 좁은 집, 많은 짐이었다. 그렇지만 살면서 한 번도 내가 가난했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많은 사람이 폐지를 주워 생계를 이어가는 노인들을 보며, 가장 피하고 싶은 노년이라고 말하지만, 나에게 가장 피하고 싶은 노년은 쪽방촌의 풍경이다. 쪽방촌 취재를 간 적이 있다. 쪽방촌도 지역에 따라 기운들이 조금씩 달랐는데, 유독 무기력한 동네가 있었다. 그곳에선 모두가 좁은 방 안에서 짐들에 둘러싸여 TV만 보고 있었다. 나갈 생각도 나갈 기력도 없어 보였다.


처음으로 내가 미니멀리스트가 되어야 하겠다고 다짐한 건, 미니멀리스트라는 단어를 처음 알았을 때다. 남편과 결혼을 준비하면서, 감사하게도 거실 하나, 방 하나 딸린 13평 임대주택에 당첨이 되어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최저가 혼수를 검색하면서, '결혼은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13평짜리 집은 내가 사고 싶은 것을 넣기에는 너무나 턱없이 좁은 공간이었다. 남편은 나무로 된 큰 테이블을 갖고 싶어 했다. 분명 매장에선 그렇게 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우리 집에 놓으려니 테이블이 거실만 했다. 부모님과 함께 임대주택 당첨 후 처음 아파트 내부를 점검하러 간 날, 착잡한 표정으로 집을 둘러보던 아빠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신혼집을 차린 후부터 무언 갈 미친 듯이 버렸던 것 같다. 버리기에 미쳐 버릴 게 없나 온 집안 서랍을 뒤졌다. 어느 날은 정말 집에 버릴 게 하나도 없었다. 영락없는 '버리기 변태'였다. 남편이 제발 자기 물건엔 손대지 말라고 정색할 때도 많았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자기도 버리는 거 아니냐고 할 때도 있었다. 가끔 아쉬운 마음이 들 때 남편과 나는 이 집에서 방 하나만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중얼거렸다.


나에게 부유함은 '자기만의 방'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오랜 시간 동안 내 방이 갖고 싶었다. 동생과 같이 쓰는 공부방이 아닌, 엄마와 아빠의 책들로 가득한 서재 방이 아닌, 할머니와 동생과 바닥에 이불을 펴고 잠을 청하는 공동의 공간이 아닌, 오로지 자기만의 방 말이다. 사실 페미니즘의 선구자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서른이 넘어 페미니즘 공부를 하다가 읽게 되었다. 나는 그냥 '자기만의 방'이라는 단어 자체가 너무 좋았다. 그 어떤 것들에도 속박되지 않은 나만의 고유함이 담긴 단어가 주는 힘이 있다.

‘진짜 가난’이란 무기력함에만 사로잡혀 있는 것, 세상을 단절한 채 가난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닐까?


어렸을 때 아바이마을에서 본 가난한 아이들은 몸은 가난했을지라도 마음은 절대 가난하지 않았다. 가난하면서 짓궂은 아이, 가난하면서 운동을 좋아하는 아이, 가난하면서 산수를 잘하는 아이만 있을 뿐이었다. 적어도 혼자 노는 아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어떤 모습의 친구이든 끼리끼리 노는 법 없이 1반, 2반이 모두 친구였다. 그런 의미에서 가난 자체는 어떤 유형화가 되기 어려운, 특정한 조직체가 아닐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내가 가난이라고 믿어왔던 것은 항상 집이라는 공간에 국한되어 있었음을 한편으론 반성하게 된다.


가난해지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세상과 단절되지 않으려 노력해야 한다. 부단히도 타인들과 연결되려 노력하자. 1반에서 2반으로, 2반에서 1반으로 그 어떤 선도 없이 친구들과 어울리는 사람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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