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해도 괜찮아

_ 언니

by 최서영

실패해도 괜찮아 _ 언니


준비물, 사과와 과도.


사과를 깎는 것이 초등학교 실기였던 때가 있었다. 사과에 과도로 탁 소리를 내며 칼집을 낸 뒤, 사과껍질이 돌돌 끊기지 않으면서 얇게 썰어낸다. 껍질이 깎인 사과를 반반씩 잘라내고 사과씨를 잘 깎아낸다. 사과를 잘 깎는 아이들 주변으로 다른 아이들이 둘러 모였다. 아이들은 끊기지 않고 깎여나간 사과껍질을 보고 감탄했다. 반면 내 실기는 엉망이었다. 껍질을 늘어뜨리기는 커녕 껍질과 함께 두껍게 멀쩡한 사과살도 함께 깎았다. 집에서도 나는 사과 구경도 하기 싫었다.


나는 스무살이 넘어서도 과일을 잘 깎지 못 해서 창피스러울 때가 많았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교수님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던 날, 교수님은 내 앞에 매끈한 사과 한 알과 과도를 내오셨다. 교수님께 드릴 말과 사과를 동시에 신경쓰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교수님 앞에 깎아 내어드린 사과는 내 졸업작품과 닮아있었다. 시인인 내 엄마를 알고 계시던 교수님은 내게 "어머니는 잘 계시지?"라고 안부를 물었지만, 그 사이 나는 엉망으로 사과를 깎느라 손이 바빴다. 결국 교수님은 내가 깎던 사과를 자신이 직접 마저 깎았다.


최근에 가족들 앞에 내가 깎은 사과를 내놓았는데, 다들 놀란 얼굴로 내게 말했다.


"사과 잘 깎네!"


칭찬을 연거푸 하는 가족들을 보며, 나는 도리어 황당했다. '왜들 저러지?' 순간 엉망으로 깎았던 사과들이 머리를 스쳤다.


언제부터 사과를 잘 깎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독립을 하고 자취를 하면서일수도 있고, 사과 말고도 다양한 것들 깎다보니 그렇게 잘 깎는 사람이 되어버렸는지 모르겠다. 처음 사과를 깎을 땐 사과를 깎는 모든 사람들이 경쟁자처럼 보였지만, 사과 깎는 것이 더 이상 내 인생의 시험이고 과제가 아니게 되어버렸을 때, 나는 그 과업을 내 인생에서 지우고 살게 되었다. 내가 하는 사과를 깎는 모든 행위는 그저 먹기위함이었고, 지금은 사과를 못 깎아도 사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 그런데 나는 사과를 잘 깎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가끔 살면서 그렇게 성공이 성공스럽지 않고, 실패가 실패스럽지 못 할 때를 마주한다.

회사에서 일을 하다가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낸 적이 있다. 한번 높은 성과를 내고 나면, 스스로 과제를 만들고 스스로 성패를 가른다.


다음 성과는 어떻게 낼지 밤잠을 못 자고 고민하는 날이 많아졌다. 그렇게 매번 성과를 내려고 노력하고 스트레스를 받는 내게, 한 선배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떻게 매번 성과를 내니, 서영아."

놀랍지만, 선배의 그 말 한 마디를 들은 뒤로는, 나는 더 이상 성과내기에 열을 올리지 않게 되었다. 선배의 말에 위로를 받았다기 보다는, 그 때 당시엔 선배의 그 말 한마디가 대단한 상처가 되었다. 항상 나를 가까이서 지켜보았던 선배이자, 항상 내게 일침을 가하는 선배였기에 그 선배의 입에서 나온 그 한마디가, 내 주위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뱉는 한마디처럼 다가왔다.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인정하기 싫었던 사실을 확인사살 당하는 기분이었다. 그 후 나는 나의 온몸과 마음을 다해 의기소침해졌고, 무기력해졌다.


내가 만든 성과는 외부의 평가와는 달리, 내부평가가 사실 형편 없었다. 사람들의 얼굴은 마치 내가 실패하길 바라는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사람들이 원하는대로 망했는지도 모른다. 아이러니하게도 성공을 했음에도 내 마음은 어떤 이름모를 실패들로 매일이 어두운 구석에 내동댕이쳐진 기분이었다.

그렇게 나는 더 이상 성과에 연연하지 않게 되었다. 처음엔 해오던 버릇을 고치려니 여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 마음이 한층 가벼워지고, 경쟁자로만 보이던 사람들의 얼굴이 한 배를 탄 동료의 얼굴로 바뀌었다. 그 뒤로는 일적인 면에서는 성과보다는 팀워크를 우선순위에 두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내가 성과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기 보다는, 나혼자만 내는 성과보다 모두가 함께 만들어서 낸 성과를 만드는 것에 집중하는 것으로 일하는 방식을 바꾸게 된 것이다. 그리고 깨달은 것은 이전에 나는 참 공적인 일을 사적인 일처럼 매달리고, 감정을 쏟았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지나온 과정이 슬럼프였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내가 지금 구독자는 많지 않지만 유튜버로 활동하는 것이나, 대단한 사람은 아니지만 책을 내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 있다. 애초에 누가 시킨 과업도 아닌, 내 인생에 내가 하고싶어서 벌린 일들에 대해 감히 성공과 실패라는 단어를 오르내리게 하고 싶지 않다. 성과보다는 하고 싶은 마음이 더 중요하고, 시작했다면 꾸준하게 해내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내가 해야할 일은 사람들의 평가를 의식하지 않고, 그저 내 소신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지금 보다 더, '내가 하고싶었다'는 그 마음만 더 집중하는 사람으로. 그러다 가끔 다들 놀란 표정으로 내게 말을 걸어올지라도 조금 새삼스럽다는 표정을 짓는 사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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