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는게 체질

나갔던 시간들이 내 인생의 역사가 되었다

by 최서영

※ 본 에세이는 언니와 동생, 시인 엄마, 극작가 아빠 4인의 릴레이 에세이입니다.

어렸을 때 나는 골목대장이었다고 한다. 내 기억 속엔 누구와 어떻게 놀았는지는 까마득히 잊혀지고, 울퉁불퉁하고 언덕진 그 길들과 골목 어귀만이 남아있다. 가끔 그 골목이 꿈에 나온다. 어렸을 때 이후로 그 골목을 가본 적은 없지만, 다시 그 골목 어딘가에 놓여진다면 나는 다시 내가 살던 그 집으로 갈 수 있다.


사실 나는 골목대장일만큼 그렇게 활달한 성격은 아니었다. 그 사람을 알려면 그 친구들을 보면 된다는 말이 있는데, 나로 따지면 내 친구들은 대부분 조용한듯 보이지만, 어딘가 하나씩 괴짜 구석이 있었다.


한 친구는 학교에서 말을 안 했다. 실제로 말을 못 하는 아이도 아닌데 말이다. 그 친구와 어떻게 사귀게 된 건진 기억이 안 나지만, 친구는 학교에선 입도 뻥긋하지 않고, 항상 노트에 자기 할말을 적었다. 분명히 말을 할 줄 아는데, 학교에선 말을 하지 않았다. 가끔씩 내 귀에 대고 귓속말을 해주는게 너무 재밌었다. 친구와 매일 노트에 그림을 그렸다.


학교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김현정의 <멍>, <그녀와의 이별>, <되돌아본 이별> 노래를 좋아해서, 해보지도 않은 이별을 온종일 노래했다.


중학교 때 친구들과 항상 방과 후 놀았는데, 고무장갑이나, 요구르트병, 빈 우유곽에 물을 넣어 물싸움을 하고 자주 놀았다. 집에 돌아갈 땐 온몸이 다 젖어있어 체육복을 갈아입고 돌아갔다. 쉬는 시간엔 1층, 2층, 3층 전 학년 복도를 뛰어다니며 잡기놀이를 했다. 친구를 잡으러 뛰어다니다가 모르는 아이와도 친구가 되어 있었다. 공부 잘 하는 아이, 공부 못 하는 아이, 키 큰 아이, 키 작은 아이, 모두가 각자 다른 반일정도로 어디 하나 친구가 될만한 공통점이 없는 아이들이 모여 친구가 되었다. 방과 후 친구들과 교실에 모여 만화책을 읽는 아이, 만화책 줄거리를 칠판에 침 튀기며 설명하는 아이, 그러다 갑자기 공부를 제일 못 하는데 벼락치기가 체질이라면서, 시험공부한걸 설명하는 아이까지, 그 모습은 오합지졸 그 자체였다. 나는 친구들과 릴레이소설을 쓰는걸 좋아했다. 릴레이소설 속엔 실존하는 친구들의 이름과 좋아했던 아이돌 이름, 만화 속 주인공 이름이 자주 거론됐다. 릴레이소설은 딱히 친구들이 성실히 써주지도 않았는데, 내가 아는 얼굴들이 나오는 릴레이소설을 상상하는게 재밌어서 수업시간에도 항상 교과서 밑에서 릴레이소설을 읽고 썼다.


나는 고등학생 때까지 방방을 탔다. 방방을 요즘 말로는 '트램폴린'이라고 불린다. 초등학교 때도 학교 앞에서 방방을 타는걸 좋아해서 많은 날을 방방을 타다 집에 들어갔는데, 고등학교를 다닐 때까지 친구와 교복을 입고 방방을 탔다. 집에 오면 화장대 앞에서 혼자 춤을 췄다. 유행하는 댄스노래를 틀고 혼자 막춤을 췄다. 왜 췄는지는 모르겠는데 무아지경이 되어 온몸이 젖을 정도로 격렬히 춤을 췄다. 고등학생일 때까지 속초에 살았던 나는 방과 후 교복을 입고 바닷가에 가서 물놀이를 하다가, 오징어회를 먹고 집에 돌아가기도 하고, 치킨집을 했던 친구삼촌네 가게에서 후라이드 치킨과 콜라를 공짜로 먹다가 집에 돌아오기도 했다.


대학생이 되어도 딱히 그 기질이 어디가진 않았다. 매학기 성적장학금을 탈만큼 학교생활에 성실했지만, 밤에는 나이트클럽을 다녔다. 밤 9시쯤 들어가 춤을 추기 시작해 새벽 5시까지 춤을 췄다. 나이트클럽이 문을 닫을 때까지 춤을 추고 새벽 첫 차를 타고 집에 갔다. 서울, 경기도 가리지 않고 좋은 나이트클럽과 클럽이 있으면 친구들과 원정을 다녔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지만, 이 세상에는 공짜술이 있었다. 나이트클럽에서 공짜술을 마시고, 새벽 첫 차를 탈 교통비만 있으면 원 없이 놀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밤새 쉬지 않고 놀았던 나도 참 대단하지만, 허구언날 같이 놀았던 친구들도 대단하다.


내 학창시절은 한마디로 맥락이랄게 없이, 그저 feel 가는대로 놀기에 급급했다. 회사생활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회사 밖에서 회사와 관계없는 모든 일들이 재밌었다. 회사생활이 재미없다거나, 회사생활을 성실히 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내 삶을 돌이켜보면, 항상 그래왔다. 이 세상에 태어나, 그저 태어난채로, 태어나서 사는게 아닐 수 있었던건, 내가 항상 내 feel에 충실하게 놀았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배웠던거나, 회사에서 일했던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내 삶은 놀았던 기억들로 가득하다.


결국 그런 기억들이 내 인생을 만들어줬다. 결국 나는 평생을 그렇게 수시로 놀았기에, 내가 놀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란걸 새삼스럽지만 깨닫게 되었다. 만약 내가 놀지 않았더라면, 아침 7시 반에 일어나 8시 반 통근버스를 타고 출근하고 6시 반 통근버스를 타고 퇴근하는 삶만을 살았더라면. 하마터면 나는 내 삶의 주체가 되지 못 할 뻔 했다. 복도를 뛰어다니면서, 거울 앞에서 막춤을 추면서, 방방 위에서 점프를 하며, 이 모든 놀이가 나만의 리듬을 만들었고, 어떤 형태의 일 앞에서도 균형감 있게 흔들릴 수 있는 나로 살 수 있게 만들었다.


그 놀이가 나를 살렸다. 할까 말까 고민이라면, 나갈까 말까 고민이라면 나가자. 나갔던 시간들이 내 인생의 역사가 되었다. 나는 노는 게 확실한 체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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