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리스트와 제너럴리스트

_언니

by 최서영

스페셜리스트와 제너럴리스트 _언니


스물두 살에 처음 국회라는 곳에서 인턴비서로 나의 첫 사회생활이 시작됐다. 사회에 나가 처음으로 한 일이 나보다 한참 어른을 보좌하는 일이라니. 나 하나 건사하는 것도 버거운 여자아이에게 국회 앞 마당은 너무나 넓었다.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전공이던 나는 처음엔 아빠처럼 방송작가가 되는 게 꿈이었지만, 졸업 즈음에는 내가 원하는 글쓰기는 사회적 글쓰기에 가깝다는 것을 깨닫고, 국회로 가게 됐다. 문예창작과에서 나는 합평 시간이 너무 싫었다. 사회생활은 매 순간이 합평의 시간들이었다. 작품이 품은 의미를 음미할 시간도 없이, 계획서를 제출하고 수정 내역을 확인하고 결과물을 제출 하는 합평의 시간.

국회에서는 스피치라이터인 보좌관님의 업무보조 역할이 나의 주 업무였고, 블로그와 트위터 등의 소셜미디어 채널을 관리하는 업무가 부 업무였다. 그 곳에서 SNS라는 걸 처음 전담하게 되었고, 그 때의 경력으로 지금까지 SNS홍보 업무를 해오고 있다. 보좌관님이 항상 연설문이나 기자회견문을 뚝딱 10분 만에 쓰는 게 너무 신기했다. 나한테 가끔 의원이 읽을 원고를 써오라고도 하셨는데, 10분 만에 쓰는 건 고사하고 34년의 세월을 점핑하는 방법을 너무 알고 싶었다. 20대 여자가 50대 남자의 언어를 어떻게 하면 쓸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영구미제다. 그 때 나의 사수였던 보좌관은 항상 내게 “스페셜리스트가 되라”고 했다. "넌 스페셜리스트가 될 재목"이라고 칭찬도 아끼지 않으셨다. 어떻게 하면 그런 사람이 되는지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어서 길을 걸을 때도 울었다.


아빠는 내가 정치에 발을 들이는 걸 탐탁지 않아 했다. 아빠는 정치엔 냉소자였고, 나는 문학의 길은 정치와 사회 속에 담긴 거대담론을 알아야 쓸 수 있다고 믿었다. 또, 아빠는 그 옛날 수기로만 공문서를 작성하던, 그러다 타자기가 들어와 타자기 잘 하는 공무원이 최고이던 아빠가 나만 했을 때 이야기를 들려줬다. 아빠가 들려준 이야기의 요지는, SNS가 나의 평생 직업이 된다? 좀 말이 안 된다는 거였다. 그 이야기도 벌써 10년이 훌쩍 넘은 이야기다. 그러면서도 아빠는 국회에서 일하는 나를 자랑스러워했다.


나는 내가 찍은 사진과 글이 의원의 채널에 실리고, 내가 찍은 사진이 포털메인에 뜨는 게 참 재밌고 신기했다. 국회에서 일을 하며 좋았던 건 뉴스에만 일어나는 일들을 내 눈으로 직접 목격하는 것, 그리고 뉴스 밖에 채 실리지 못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내 눈으로 직접 목격하는 것이었다. 내가 알리고 싶은 이야기와 실제로 기사로 만들어지는 이야기들은 너무나 달랐다.

나는 국회에 일했던 2년 동안 '지는 법'을 배웠다. 총 7번의 선거에서 져봤다. 국민들의 투표를 받기 전 당내선거라는 게 있는 것도 처음 알게 됐다. 모든 선거에서 끝내 지고 의원이 의원직을 내려놓게 되자, 의원실 사람들도 덩달아 실직자가 되었다. 보좌진들과 함께 거의 매일 홍대에서 낮술을 마셨다. 일하면서는 알지 못 했던 동료들의 개인사를 들을 수 있었다. 머지않아 어떤 사람은 국회에 다시 취직했고, 어떤 사람은 전화번호도 바꾸고 잠적하면서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길을 가게 됐다.

그 후 나는 시청 홍보과로 이직을 했다. 그리고 나는 내가 그토록 그리고 바라던 '스페셜리스트'가 되었다. 스페셜리스트가 되는 방법을 알게 되었는데, 그 방법은 참 어려우면서도 쉬웠다. 남들이 하는 것을 따르지 않으면 된다. 똑같이 열심히 시험 보고 들어온 공무원 사이에서 애초에 그들과 나는 그 시작점도 달랐거니와, 생각도 다를 수밖에 없어서 더 빨리 스페셜리스트가 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 때 왜 그 보좌관님이 나에게 스페셜리스트가 되라고 말했는지도 지나고 보니 알 것 같았다. 상대의 장점을 알아봐주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본격적으로 홍보과에서 일을 하면서 다른 기관의 홍보담당자들과 업무 협조 할 일들이 많아졌다. 그들과 미팅할 일도, 전화할 일도 많아지면서, 또한 그들이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내 나이 또래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사적인 모임을 가져보자! 내 주관으로 사적 모임을 가지게 되었다. 한 달에 한번 모여 그냥 술 마시면서 일 이야기도 하는 친목모임이었다.


그 모임을 시작으로 나의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이 조금은 모호해지기 시작했고, 그 모임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또 다른 공동체를 만나게 되었다. 그곳에서 남편을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그 공동체의 이름은 '리드미'다.


‘리드미’는 ‘사람도서관’을 한다고 했다. 처음에 ‘사람도서관’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감이 잘 오지 않았다. 사람도서관은 사람이 곧 책이 되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거라고 했다. 내가 읽고 싶은 사람을 책을 고르듯 고르고, 그 사람의 경험을 읽는다. 처음엔 뭔가 싶었지만, 내가 사람책이 되고, 사람책을 읽는 독자가 되어보면서, 금방 사람도서관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다.


가장 좋았던 건 내가 평소 하고 싶었던 일들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곳에선 무엇을 하든 격려해줬다. 그 곳에서 팟캐스트도 해보고, 내가 직접 행사를 기획도 하고, 사회자로 나서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청년조례도 개정해보고 싶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공모사업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아무도 시키지 않은 그 일을 모두가 도왔다.


특히 남편은 그런 활동들을 좋아하고 또 잘 하는 사람이었다.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일을 하는 게 남편의 주특기였다. 친구들의 근황인터뷰를 묶어 잡지를 만들기도 하고, 갑자기 친구들과 뮤직비디오를 찍겠다고 녹음실을 빌려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소규모 잡지를 발간하면서 인쇄소를 다녔다. 그 덕에 출판에 필요한 인디자인도 어느 정돈 다룰 줄 알았고, 영상을 배운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영상을 만들 줄 알았고, 공연기획자도 아닌데 공연, 행사 들을 기획 할 줄 알았다.

나는 이런 사람과 살면 정말 재밌겠다고 생각했다. 그 덕에 우리의 결혼식은 리드미를 통해 다진 기획력으로 스몰웨딩으로 치러졌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하고 싶은 것은 하며 살자는 게 우리 부부의 인생철학이 되었다. 부족하지만 꾸준히 영상을 업로드 하며 '미니부부'라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것도 그런 연장선상에 있다.

나와 남편은 신혼여행으로 일본의 큰 화산섬인 오키나와를 갔다. 해안선을 낀 작은 언덕에 레드포크라는 게스트 하우스에서 하루 묶은 적이 있다. 그 게스트 하우스는 헨젤과 그레텔에 나올법한 동화 같은 집이었다. 할머니 혼자 운영하셨는데, 그 할머니는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저렇게 늙고 싶다, 라는 롤모델이 되었다. 도쿄에서 도시생활을 하던 그 할머니는 은퇴 후 오키나와에 와서 레드포크라는 식당을 차렸다고 한다. 꽤 요리를 잘 하시는 편이라 손님들도 제법 있었지만, 손님 받는 것이 벅차서 게스트 하우스로 바꾸고 1층만 있던 공간에 다락방을 직접 더 올려 게스트 하우스를 만들었다. 나무 위에 걸친 2층 다락방은 그 안에 모든 것이 사랑스러웠다. 2층으로 올라갈 때 삐걱거리던 계단소리도 참 좋았다. 식당을 하셨던 분이라 아침조식은 정말 맛있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할머니 혼자 그 집에 있는 것들을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할머니가 직접 만든 다락방과 직접 만든 커튼, 이불보, 바닷가에서 주운 조개들로 붙여 만든 스탠드조명까지. 어느 것 하나 멋있지 않은 게 없었다.

사실 변화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안전함을 추구하는 사람일수록 그 기동력을 가지기 쉽지 않다. 스페셜리스트이면서도 동시에 제너럴리스트인 사람, 그런 사람이 꼭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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