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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영 Jan 25. 2021

코호트 격리 된 인간의 존엄

오랜만에 지난 다이어리를 보다가 필사메모를 발견했다. "타인을 견디는 것과/외로움을 견디는 일/어떤 것이 더 난해한가...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허상/녹슬어 부서지는 동상보다는/방구석 먼지와 머리카락의 연대를 믿겠다/어금니 뒤쪽을 착색하는 니코틴과/죽은 뒤에도 자라는 손톱의 습관을 희망하겠다//" (허은실의 <목 없는 나날>) 


필사를 하던 그 날 밤이 떠올랐다. 그래도 나는 "연대를 믿겠다"는 말과 "희망하겠다"는 글귀에 힘을 주어 써내려 갔던 것 같다. 다음 장에는 그때 당시 내가 좋아하는 유튜버가 추천한 책에 대한 이야기들로 가득했다. 파스칼 메르시어의 <자기결정>,<삶의 격>. 책들은 하나같이 인간의 '존엄'을 말하고 있었다. 인간의 존엄 관련 책추천을 해주길 즐겨하던 유튜버의 이름은 장혜영. 3년 전에 나는 그가 정치인이 될거라곤 상상하지 못 했다. 발달장애를 가진 동생을 시설에서 꺼내 어떻게든 동생이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길 바라던 사람, 그저 한 사람일 뿐이었다. 그는 소시민으로서 가능한 시설의 민낯을 알렸지만, 세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결국 그는 세상을 바꾸겠다고 정치인이 되었다. 그가 그토록 외치던 '탈시설'은 모든 인간의 해방이자, 모든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일이었다. 


코호트 격리. 이 단어에 나오는 코호트는 '함께, 같이'와 '뜰'을 뜻하는 단어의 복합어다. 그런데 '코호트'와 '격리'라는 어울리지 않은 단어가 결합되었다. 작년 12월, 그러니까 한달전쯤 그는 "10년 내 장애인시설 완전 폐쇄"라는 조항이 들어간 준엄하고도 선언같은 법률안을 발의했다. 그 법률안을 발표하기 전에도 정치적 색깔을 떠나 인간의 존엄을 외치던 그를 그저 멀리서 응원했다. 그런데 오늘 입에 담기도 싫은 기사를 봤다. 이쯤 되면 여성의 삶은 아주 감쪽같이 코호트 격리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어른이 되면>의 장혜영이 성추행 피해자가 되고, 페미니스트 시장이 되고싶다던 신지예 대표는 성폭행 피해자가 되는, 피해자가 살인죄로 가해자가 되고, 지금 내가 숨쉬고 사는 대한민국 땅엔 정말이지 출구가 없었다. 나는 이번 일이 막막하고 수상하다. 장혜영 의원처럼 최전선에서 인간의 존엄을 외치던 자들이 그리도 존엄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지독하게 수치스럽다. 그들은 존엄을 모르지 않았다. 알면서도 격리를 한 것이다. 장혜영 의원이 오늘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읽고 또 읽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는 사람 처럼 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문장을 읽고 또 읽는다. 정치인이기에 더욱 맞서야 한다는 문장을 읽고 또 읽는다. 연대를 믿겠다. 희망하겠다. 그것만이 이 코호트격리에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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