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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영 Feb 19. 2021

좋은 일, 좋은 삶

워킹맘 다이어리

힘들다면 힘내라는 말이 자동응답 되는 사회 

유튜브에서 좋소기업을 재밌게 보고 있다. 좋소기업을 보다 보면 우리 조직 내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너무나 유사해서 공감이 가서 웃기고, 또 내 회사생활 보다 더 형편없는 중소기업이 놓인 환경이 씁쓸하기도 한 것이다. 힘들다고 내색하면 힘내라는 말이 자동응답 되고, 아프다고 말하면 건강하라는 것이 덕담이 되는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런데 골똘히 생각해보면 정말 힘을 내야 할까. 힘을 내는 것이 고정값이 되어야 할까. 그런 사회에서는 자연히 힘이 센 사람이 강자가 되고, 건강한 사람이 기준이 될 수밖에 없다. 약육강식이라는 생물학적 가치로 보아 당연한 결과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옛날 미래학자의 말은 정말이지 옛날 미래에나 적용되는 말이다. 그러니까 힘이 센 사람, 건강한 사람이 필요한 곳은 어디인가. 노동과 생산이 이뤄지는 곳. 바로 ‘일터’다.      

집에 있는데 집에 가고 싶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중얼거리고, 지금 출근했는데 퇴근하고 싶다는 말을 아침 인사로 나누던 때가 있었다. 노동 분량이 많지도 않은데 일하는 게 적당히 재밌고 적당한 성취가 있는데도 집에만 가면 기절하듯 쓰러져 잠을 잤다. 퇴근하고 집에 가면 저녁밥을 먹고 평균적으로 8시나 9시 그 어디쯤에 잠이 들었던 것 같다. 평일에는 회사에서 정말 일만 하는 것이다. 아침 출근길이 어제 출근길이랑 데칼코마니였다. 마치 5초 전에 벌어진 것처럼 붙여넣기 한 느낌이었다.   

출근버스에서 내리면서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쳇바퀴를 돌고 있는 다람쥐가 된 것처럼 내 생활이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어디서부터 멈춰야 하는지, 용기가 안 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언제든 회사에게 버림받을 수도 있겠다는 위기의식이 잔잔히 내 마음속에 자리 잡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일이 또 그렇게 싫은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일이 엄청 좋은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일이라는 것이 내 삶에 너무 큰 부피를 차지하고 있다. 나는 그 부피만 어떻게 줄여보고 싶다.      

대략적으로 서술하자면 이러한 번 아웃을 꽤 오래 앓았다. 그래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그리고 시작했다면 어디쯤에서 멈춰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시작할 수 있었던 건 내 삶에 그래도 육아라는 외부적 요인이 있었다는 거다. 반년가량을 생각만으로 돌파구를 찾았다. 그렇게 싫지도 않고 좋지도 않은 이 적당한 일에 내가 너무 많은 것을 헌신하며 살고 있었던 것 같다고. 그래서 이 쳇바퀴를 멈추고 싶은데, 그렇다고 너무 싫지도 않은 이 일을 아예 멈추고 싶지도 않다고. 그렇게 해서 시작한 게 글쓰기였다.      

‘일’이란 생계 수단이자, 이 사회에서의 정체성, 사회공헌, 그리고 무엇보다 물리적으로 내 삶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맘껏 놀고, 맘껏 쉬는 것이 게으르고 나태하다고 배웠다. 어른들은 게으르고 나태한 것이 나쁘다고 가르쳤다. 그렇게 학습된 우리는 한참이나 어른이 되었는데도 어른들 눈치를 보느라 바쁘다. 좀 힘들면 어떻고, 아프면 어떤가. 골똘히 생각해보는 것이다. 지금의 번 아웃이 어디에서부터 작동한 것인지.      

맘껏 논 적이 언제였던가. 노는 게 뭔지, 쉬는 게 뭔지 나는 솔직히 모른다. 실은 나는 맘껏 논다는 게 뭔지도 모르고 어른으로 커버렸다. 그저 바쁘게 일하고, 좋은지도 싫은지도 모른 채 일하기에 바빴던 나다. 일터에서의 나는 어떠한가. 젊은 여성, 하급자, 나의 목소리, 나의 욕구, 나의 역할. 이대로 괜찮은가. 유정한 동료들 덕에 이 모든 게 나쁘지 않게 돌아가고 있다고 평을 내리지만 모든 게 좋았다고 말하기는 모호하다. 

우리 사실 회사에서 너무 모범생으로 착하게 지내고만 있었던건 아닐까. 일을 하다보면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싶은 일이나, 상대가 불편해할까봐 말하지 못 하고 참았던 순간들이 있지 않나. 그때마다 무조건 하겠다, 해보겠다 대답하지 않았나. 남들 속을 너무 신경쓰느라 정작 내 속이 썩고 있는지도 모르고 살고 있었던건 아닐까. 나한테 노크 한 번 없이 저녁 밥 먹고 쓰러져 자기만 했던건 아닐까. 그러니까 내가 지금 해야할건 나에게 노크하고 물어보는 것이다. 그때 네 상급자가 너의 목소리를 무시했던게 불편하지 않았냐고. 그때 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고 조금의 내색이라고 해보지 그랬냐고. 

내 삶의 모호함이 바로 일터에서의 모호함에서 기인한 것이다. 내 노동력, 내 노동 값은 지금의 일터에서 과연 동등하게 매겨지고 있는가. 사실 변해야 할 것은 내가 아닐지도 모른다. 노동자의 다양한 의견을 수용하고 맘껏 개진할 수 있도록 포용하는 우리 조직의 문제다. 이 모든 문제가 사람의 값이 너무 싸서 생긴 문제다. 모두가 일터에서 동등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조직 분위기, 뭐 그런 게 필요하다는 요지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누구나 좋은 일 그리고 좋은 삶을 추구한다. 일을 좋아하기 위해서는 일을 좋아할 수 있는 조직의 분위기가 필요하고, 일을 좋아할 수 있는 조직의 분위기를 위해서는 노동자의 다양한 목소리를 반영하고 사람의 노동력을 너무 싸게 돌리지 않는 조직의 기준이 먼저다. 그러니까 우리 목소리를 어떻게든 내보는게 어떨까. 반영을 할지 말지는 물론 그들이 결정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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