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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영 Feb 23. 2021

나는 무엇을 위해 열심인걸까

라면에 대한 여러 조리법이 있지만 난 라면봉지 겉면에 써진 대로 조리하는 것을 선호한다. 물도 조리 방법대로 정량을 맞춰 끓인다. 라면에 대해 쓰다 보니 그게 내가 늘 인생에서 무언가를 선택하는 것에 선호인 것이다. 일단 하라는 대로 다 한다. 가끔 라면의 고수들이 요령들을 알려주면 ‘아, 그렇게도 되는구나’ 생각하는 것이다. 가끔 그것을 따라 해볼 때도 있다. 딱히 정석을 지키고 마치 이것 아니면 안 된다는 듯이 구는 것은 아니다. 그냥 나라는 사람의 단순하고 무식함이 그 기본을 선호할 뿐이다.      


그 기본을 만들기 위한 오랜 연구들이 있었다는 걸 안다. 이 라면이 팔리게 된 이유가 이 기본 안에 있는 것이라고. 그런데 가끔 고루하기도 한 것이다. 때로는 이게 무슨 맛이람! 말도 안 되는 맛을 도전해보고도 싶은데, 그냥 생각하기 싫어서 기본을 따라 만든다. 때로 나도 이런 내가 싫다. 되도록 많은 레시피를 아는 것만이 내 성정을 벗어날 유일한 방법일 수도 있겠다.      


나도 내가 이런 사람인지 잘 몰랐다. 참새방앗간 글쓰기 수업에서 1분기 동안 매일 글을 쓰는 과제를 하고 있다. 그래서 매일 미루지 않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과제를 낸다. 아이가 책상 위에 올라가 놀아달라고 떼를 쓰는데도 그 난리통에 글을 쓰고 급하면 핸드폰 앱을 켜서 결국 하고야 만다. 매주 주말 아침 두 시간 비대면으로 하는 수업에 지각하지 않는다. 유튜브를 시작한 지 3년 차, 한 번도 업로드를 미룬 적이 없다. 나는 고루하다 못해 지독할 만큼 무언가 한번 꽂히면, 그리고 과제를 해야 하면 반드시 해야 한다. 교실 맨 앞자리에서 제일 열심인 사람. 내가 그런 사람이다.      


그런데 이런 내 모습을 보며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나의 재능처럼 보이기도 하나보다. 이런 내가 잘난 체 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이건 전혀 자랑이 될 일이 아니다. 나 같은 사람들에게도 나름대로 고충이 있다. 일단 앞서 말한 것처럼 나는 내가 고루하다고 느낀다. 나라고 이런 내가 좋은 아니다. 나도 좀 과제를 미뤄보고 싶고 게으름을 피우고 싶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또 까칠하고 재수 없다고 느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실제 그렇다. 내가 열심히 한다고 해서 잘하는 게 아니고, 뭐든 열심히 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것이라면 지금처럼 이렇게 궁시렁거리고 있지 않을 것이다. 뭐든 열심인 사람의 삶이 주체적인 삶은 또 아니니까.  


   나는 무엇을 위해 ‘열심’인걸까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해볼 수 있겠다. 나는 무엇을 위해 ‘열심’인걸까. 열심히 하는데 잘 안 돼서 문제다. 대학입시 공부를 할 때부터 따라온 문제다. 입시를 치르는 과정, 대학 교육 과정, 조직문화 내에서도 끊임없이 계급화을 당했다. 당하며 살았다. 내 의지와는 상관 없는 사회의 커리큘럼인 셈이다. 계급화가 당연시되는 사회다. 프리랜서, 디지털노마드, 사이드프로젝터라고 불리는 사람들 내에서도 이런 계급화를 발견한다.      


책을 읽는 사람보다 책을 쓰는 사람이 더 많아져서 독립출판시장이 비대해졌다고들 한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이 그냥 출판업계의 돈벌이 수단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퍼스널 브랜딩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결국 나를 팔아 돈을 번다는 의미인데, 주체적 삶으로의 최소한만을 취하는 것만으로도 ‘브랜딩’은 충분하지 않나 싶다.    

  

껍데기만을 포장해서  몸값을 올리고  네임드를 알려서 스피커로서의 기능을 수행한 뒤에야 주체적인 삶을   있는 것이라면 나는 노땡큐인 것이다. 요즘 내노라하는 사람들이 클럽하우스에 들어가고 있다. 그들의 추종자들로 방이 비대해진다.


이 모든 게 내가 잘 나지 못 해서, 자격지심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이건 명백히 자격지심이다. 나는 잘난 사람들이 내 앞에 많이 보이는 게 싫다. 좀 못난 사람도, 우울한 사람도, 병든 사람도 내 눈앞에 많이 보였으면 좋겠다. 내가 요즘 더 반가운 건, 내 주변에 내성적이면서도 말 조금 걸어보면 굴비처럼 하고 싶은 말을 술술 늘어놓는 사람들이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발견하면 좋은 책 한 권을 만난 것처럼 기쁘다. 너도 그랬구나! 세상에,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나는 그런 생각 못 해봤는데 너는 그런 생각을 했구나. 그 사람에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당장 녹음해놓거나 필사하고 싶을만큼 감명 깊고 좋은 것이다.       


못 나고 병든 사람의 삶을 더 들여다보고 싶다

목소리를 내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을 이용해서 돈벌이 수단으로 삼는 사람보다, 못 나고 우울 하고 지치고 병든 사람들의 말과 삶을 더 들여다보고 싶다. 우월감을 느끼려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세상이 원래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거라고. 부딪히며 사는거라고.      


이런 이유들 때문에 돈벌이 수단이 되는 자본시장의 수업과 프로젝트를 나는 참여하지 않는다. 설령 전에 참여했다 쳐도, 이제는 안 할 것이다! 나는 그런 마음의 선언을 하고 말았다. 마음으로 그것을 거부한다. 그것이 그저 나의 자격지심일 수도 있고, 나의 정치적인 선언일 수도 있겠다.      


주체적인 삶을 살라고 하면서, 결국엔 그 목적이 돈 많이 벌고 성공하는 것이라면, 세상 모든 이들이 그런 식에 주체적 삶을 쫓고 있다면, 그 속에서 도태되는 사람들의 삶은 무엇인 걸까. 그 도태에 불안을 느끼고, 내가 없어지는 느낌을 받는다거나, 인생이 추락하는 기분을 그들이 느끼고 있다면, 스스로 실패했다는 좌절감이 그 사람을 어디로 데려갈지 나는 그게 너무 섬뜩한 것이다. 책임지지도 못 할거면서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더 불안하고, 더 초조하고, 그것을 결국 해내지 못 한 자신을 자책하는 삶. 그런 사람들의 삶에는 박탈감, 소실감, 자격지심 같은 것만이 자꾸 초대될 것이다.      


라면봉지에 써진 조리방법대로 조리를 하면 그건 그냥 라면인 것이다. 그냥 잘 만들어진 라면일 뿐인 것이다. 그냥 정석대로의 라면만 끓여먹는 사람은 세상에 어떤 식의 라면이 있는지 알 길이 없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그러려면 다양한 사람들이 세상 밖으로 목소리를 내야 한다. 나 같이 형편없고 무식한 사람도 좀 나와서 말을 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힘을 길러서 마이크를 잡는 방식이 아니라, 마이크 없이도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다양한 사람들의 방식이 채택되는 사회를 먼저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가끔 이상한 조리방법들도 나오고, 비로소 내가 넣고 싶은 것도 생기는 것이다.      


기왕 이렇게 말한 김에 더 말하고 싶다. 당신은 잘못되지 않았다. 서서 말하는 사람도 있고, 앉아서 말하는 사람도 있고, 누워서 말하는 사람도 있고, 물구나무를 서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지!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 그거 사실 별로 안 중요할 수도 있는거다. 정답인 것처럼 떠들던 것들도 결국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태도에서, 몇몇 사람들의 경험치로 만들어진 사례일 뿐이다. 당신도 정답인 것처럼 떠들면 뭐 어떤가. 다만 당신으로부터 박탈감만 느끼지 않는 선에서, 떠들면 그만인 것이다.그것이 병든 것이건 재미없는 것이건 허무맹랑한 것이건 간에.


아몰랑,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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