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락사스! 내가 나에게 이르는 길

『데미안』

by 책뚫기

어서 오세요.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인생을 바꾸는 ‘우물 밖 청개구리’ 우구리입니다.


1.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최근 나영석 PD님의 유튜브 채널 ‘십오야’를 즐겨보고 있습니다. 나영석 PD님은 한 시대를 풍미했고 여전히 살아있는 ‘1박 2일’을 제작한 PD로 유명합니다. 이 외에도 ‘꽃보다 할배’, ‘꽃보다 누나’, ‘삼시세끼’, ‘신서유기’, ‘윤식당’, ‘뿅뿅 지구오락실’ 등의 굵직굵직한 TV 프로그램을 연출했기에 자타공인 대한민국 대표 PD로 꼽히는 분 중 한 명입니다.


나영석 PD님이 최근 유튜브 라이브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후배 PD나 작가를 초대하여 그들이 TV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겪은 다양한 뒷이야기를 풀어냅니다. 그들이 말을 청산유수로 잘하는 것도 아니고, 목소리가 뛰어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어느새 저는 나영석 PD님과 후배님들의 이야기에 쏙 빠져버리고 맙니다. 그들에게는 어떤 특별한 힘이 있는 걸까요?


제게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나영석 PD님과 후배 이진주 PD님의 대화입니다. 후배 PD들이 입을 모아 고백(?)하길 ‘삼시세끼’ 촬영 당시 나영석 PD님은 늘 평상에 누워있었다고 합니다. 나영석 PD님은 그때마다 “내가 그랬어?”라며 허허 웃었고 자기도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다고 반응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이진주 PD님이 정곡을 찌릅니다.


‘촬영 세트장에 자기의 로망을 담잖아요.’


PD들은 자기 머릿속 꿈꾸는 장면을 영상으로 담아내는 직업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꿈에 적합한 인물, 장소, 시간들을 고민합니다. 거기에는 PD 자신의 취향이 반영되기 마련입니다. 적적할 만큼 평화로운 시골 마을, 호젓한 집 한 채, 그리고 마당에 놓인 평상, 그 평상에 누워 유유자적하는 나. 나영석 PD님의 로망 중 하나였나 봅니다.


나영석 PD님 이야기가 흡입력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듯합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The Most Personal Is The Most Creative.

- Martin Scorsese


봉준호 감독님이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 수상 소감을 말할 때 인용한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말입니다. 창의적인 것은 내 밖에 있는 대단한 무언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철저히 내가 본 것, 내가 들은 것, 내가 느낀 것, 내가 경험한 것으로부터 온다는 말인 듯합니다.


나영석 PD님의 말에 흡입력이 있는 이유는 그의 말이 철저히 개인적인 것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가 본 것, 그가 들은 것, 그가 느낀 것, 그가 경험한 것,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꿈꾸던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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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데미안⟫에 담긴 헤르만 헤세


오늘 소개할 책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읽은 헤르만 헤세의 작품은 ⟪수레바퀴 아래서⟫와 ⟪데미안⟫ 딱 두 편이지만, 벌써 헤르만 헤세의 열렬한 팬이 되었습니다.


짐작건대 헤르만 헤세가 일생동안 품었던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였으리라 생각합니다. 헤르만 헤세가 이런 질문을 품은 이유는 지나치게 규점적이고 강압적인 사회 때문이라고 추측합니다. 그가 살던 시대에는 무비판적인 믿음을 강요하는 종교와 절대적인 국가관을 앞세운 세계대전이 있었습니다.


종교와 국가 안에서 개인은 노예이자 도구였습니다. 개성과 취향 같은 것은 일탈이나 악마의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헤르만 헤세 또한 유년시절 라틴어 학교와 수도원 학교에서 공부했고, 결국 자신의 개성을 억압하는 수도원 학교에서 도망쳐 나와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헤르만 헤세는 시인을 꿈꾸었고 수없이 많은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데미안⟫ 또한 그의 작품 중 하나로 헤르만 헤세가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썼고 전쟁 직후 출판한 책이라고 합니다.


사상적 억압과 전쟁 폭력을 경험한 헤르만 헤세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요? 오늘은 ⟪데미안⟫의 줄거리는 생략하고 ⟪데미안⟫을 통해 그가 전하고 싶었던 생각을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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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

헤르만 헤세, ⟪데미안⟫, 전영애 옮김, 2000(2판), p.123


새는 헤르만 헤세, 알은 세계입니다. 그는 인류가 만들어놓은 세계 속에 태어납니다. 그 세계에는 옳고 그름, 정의와 불의, 신과 악마가 존재합니다. 그는 부모님과 학교로부터 교육받습니다. ‘옳음, 정의, 신의 곁에서 살아라! 그름, 불의, 악마에게서 떨어져라!’


그는 세계가 만들어놓은 단단한 알에서 살아갑니다. 알(세계)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그는 안전하고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알이 없다면 얼마나 두려울까요! 길과 방향을 일러주는 사람이 없다면 얼마나 곤란할까요! 그래서 많은 친구들은 알에 순응합니다.



그런데 알 속에 살다 보니 자신을 부정해야 하는 순간이 생깁니다. 대표적으로 ‘성욕’입니다. 순결과 청정이 신의 것이라면 성욕은 악마의 것이었습니다. 청소년이 되자 성욕은 자연스레 피어나 헤르만 헤세의 것으로 자리합니다. 그런데 알은 그 성욕을 부정하라 강요합니다. 그는 질문합니다. 성욕은 나쁜 것인가? 신은 왜 나쁜 것을 내 안에 싹트게 하는가?


친구들은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알의 명령을 따릅니다. 성욕을 비롯한 무수한 욕구를 거세하고 알이 허락하는 것만 추구합니다. 그러니 자아는 늘 갈등합니다. 자기 목소리를 부정하면서도 자꾸만 올라오는 자기 목소리 때문에 악마에게 빠질까 두려워합니다.


사람들은 나아가 패거리를 짓습니다. 불안하고 두렵기 때문입니다. 자기 힘으로 올곧게 서보지 못한 사람들은 패거리를 짓고 그 안에 옳음, 정의, 신이 있다고 믿습니다. 사람들은 늘 밖에서 옳음, 정의, 신을 찾습니다. 그 과정에서 진짜 ‘나’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습니다.



헤르만 헤세는 당당히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합니다. 알을 깨고 태어나고자 애씁니다. 어떻게 하면 알을 깨고 태어날 수 있을까요? 먼저 헤르만 헤세는 끊임없이 알에 대해 질문하고 의심합니다. 성경 속 이야기를 무작정 받아들이기보다 의심하고, 충분히 상상하고, 나름의 이야기를 만들어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안에서 솟아오르는 충동과 유혹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충동과 유혹을 존중하고 사랑하려 애씁니다.


생각을 스쳐간 모든 것을 그냥 행동으로 옮기라는 게 아닐세. 다만 좋은 뜻을 가진 착상들을 몰아내고 그걸 이리저리 도덕화해서 해롭게 만들지 말라는 걸세. (중략)

그런 행위 없이도, 자신의 충동과 유혹을 존경과 사랑으로써 다룰 수 있어. 그러면 그것들이 그 의미를 내보이지. 그런 것도 모두 나름의 의미가 있거든. 다시 한번 무엇인가 정말 근사한 생각 혹은 죄 많은 생각이 떠오르거든, 싱클레어, 누군가를 죽이거나 그 어떤 어마어마한 불결한 짓을 저지르고 싶거든, 한순간 생각하게. 그렇게 자네 속에서 상상의 날개를 펴는 것은 압락사스라는 것을!

헤르만 헤세, ⟪데미안⟫, 전영애 옮김, 2000(2판), p.151


압락사스! 헤르만 헤세는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의 결합을 상징하는 압락사스를 강조합니다. 그는 알(세계)이 부정하는 자기 안에 있는 충동과 유혹을 존중하고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충동과 유혹을 받아들이고 마음껏 상상의 날개를 펼친 끝에 자신의 운명을 발견하리라고 말합니다. 이후 한치의 망설임 없이 운명의 길을 걸어가리라고, 아니 걷고 있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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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압락사스! 내가 나에 이르는 길


4.1. 내가 경험했던 압락사스


사상적 억압과 전쟁 폭력을 경험한 헤르만 헤세가 ⟪데미안⟫을 통해 전하고 싶은 말을 한 문장으로 요약해 본다면?


네 안의 부정한 충동과 유혹을 사랑하고 존중하라. (압락사스)


요약한 문장을 읽고 나니 떠오르는 장면이 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교사로서 경험한 ‘압락사스’입니다. 과연 저의 경험이 ‘압락사스’가 맞는지 들어보시겠어요?


작년 ‘학부모 공개수업의 날’이었습니다. 저는 보호자님들이 단순한 구경꾼이 아니라 관객이 되길 바랐습니다. 수업 중에 스무 명 남짓한 관객을 모시기는 어려운 일이기에 ‘학부모 공개수업의 날’을 기회삼아 아이들에게 발표회 경험을 주고 싶기도 했습니다.


‘학부모 공개수업의 날’ 한 달 전, 저는 4학년 아이들에게 과제를 하나 던져주었습니다. 과제 이름은 ‘보호자 울리기 프로젝트’였습니다. 가장 먼저 저는 아이들과 ‘보호자 울리기’를 주제로 브레인스토밍을 했습니다.


4학년 아이들은 아이디어를 충동적으로 발표했습니다. 그중에는 어이없는 아이디어도 많았습니다.


‘싸워서 보호자님들이 속상함의 눈물을 흘리게 하자’

‘우리가 인공눈물을 넣고 우는 연기를 하면 보호자님들도 울 거다’

‘마늘, 양파, 고춧가루를 보호자님들에게 뿌리자.’


이 외에도 온갖 이상한 아이디어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면 곧장 지워야 할 아이디어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의 충동을 그대를 두었고, 아이디어를 모두 모은 뒤에는 비슷한 아이디어끼리 분류하였습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아이디어를 조합하여 ‘학부모 공개수업의 날’ 진짜 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만들어보라고 했습니다. 그 끝에 탄생한 아이디어가 ‘내가 더 사랑해!’라는 주제의 영상 촬영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싸우기 + 개그 + 영상 + 인공눈물’을 조합하여 ‘내가 너보다 부모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크거든!’이란 주제의 영상을 찍자고 한 것입니다!


“너 부모님 얼마나 사랑하냐?”

“너보다는 훨씬 더 사랑하지!”

“뭐래? 내가 더 사랑하거든?”

“너 부모님 생각하며 울 수 있어? 난 울 수 있어! (인공눈물 넣고 우는 연기)”


이런 대본이 탄생하였습니다. 이 외에도 세 가지 아이디어가 덧붙여져 우리는 총 11분 길이의 영상이 만들었고, ‘학부모 공개수업의 날’은 가벼운 웃음으로 시작하여 끝내 눈물바다가 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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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좋은 글을 쓰는 길, 내가 나에게 이르는 길


저는 좋은 글을 쓰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글이 좋은 글일까요? 어떻게 하면 좋은 글을 쓸 수 있을까요?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는 마틴 스코세이지의 말과 ‘네 안의 부정한 충동과 유혹을 사랑하고 존중하라’는 헤르만 헤세의 말이 힌트를 주는 듯합니다. 마틴 스코세이지와 헤르만 헤세가 입을 모아 제게 하는 말은


“너는 너를 너무 몰라.”


저는 저의 삶이 별 볼이 없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인생에 있어 큰 실패도 없었고, 큰 고난도 없었습니다. 특별히 용감하지도 않았고, 탁월한 능력도 없습니다. 수없이 존재하는 훌륭한 작가님들과 책들 사이에 제가 있을 자리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무엇을 더 배워야 가능성이 생길까? 어떤 기술을 연마해야 가능성이 생길까? 저는 늘 외부의 누군가에게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영석 PD님은 누가 시켜서 프로그램을 만들지는 않았을 겁니다. 오히려 자기 안에서 솟아오른 충동과 유혹을 사랑하고 존중했을 겁니다. 성공을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나영석 PD님은 스스로를 잘 아는 사람이 되었을 거고, 그렇게 자신의 운명을 발견하고 사랑하게 되었을 겁니다. 종종 그가 제작한 프로그램 속에서 활짝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합니다. 만드는 사람이 그토록 즐거운데 보는 시청자가 즐겁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저의 인생은 오직 저의 것입니다. 하지만 도덕적인 잣대 때문에, 때로는 저의 자기 비하 때문에 소중하고 값진 경험들을 별 거 아닌 것으로 무시하고 지나쳐왔습니다. 이미 보석은 제 안에 있는데 남의 보석만 부러워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요? 그렇게 삼십 년이 넘는 세월을 버리듯 살아온 건 아닐까요?


덕분에 요즘은 생각이 가벼워졌습니다. 저도 언젠가는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길은 분명합니다. 제가 저에게 이르기만 하면 되니까요. 저를 제대로 알기만 하면 좋은 글은 따라올 테니까요. 헤르만 헤세의 조언을 따라 제 안의 충동과 유혹을 도덕화하여 해하지 않고 사랑하고 존중할 겁니다. 그 모든 게 저일 테니까요. 비로소 저는 저를 참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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