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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뚫기 Sep 27. 2023

소설 쓰는 법, 사람을 이해하는 과정

『소설가의 일』김연수 지음

어서 오세요.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인생을 바꾸는 ‘우물 밖 청개구리’ 우구리입니다.


좋은 소설책은 책장을 덮은 뒤에도 긴 여운을 남깁니다. 소설 속 주인공의 삶에 푹 빠져서 현실로 돌아오기 힘들 때가 있습니다. 소설 속 세계가 현실 같고, 제가 사는 현실이 소설 같다는 느낌에 허우적거립니다.


긴 여운이 사라질 때쯤 소설가를 찬양하기 시작합니다. 이 소설가는 천재야! 이건 또 하나의 세상을 창조한 수준이잖아! 어떻게 소설가 혼자서 이토록 많은 인물과 배경을 섬세하게 그려낼 수 있지? 세상에 대한 깊고 깊은 통찰이 없고서야 이런 글을 쓸 수 없어! 이 소설가는 신이 아닐까?


제정신이 돌아올 때쯤 저 또한 소설가처럼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을 품게 됩니다. 그러나 소설은 신의 영역이라는 생각에 곧장 허황된 꿈을 포기하곤 합니다. 대신 궁금증을 품습니다. 소설가는 어떤 과정을 거쳐 신이 되는 걸까? 소설가는 어떻게 인간과 세상에 대한 깊은 통찰을 얻을까?


우연찮게 소설가의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책을 발견했습니다. 절판되어 중고책으로 구입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소설가의 세계를 쉽고 명쾌하게 그리고 솔직한 유머를 담아 소개하는 김연수 작가님의 책 ⟪소설가의 일⟫을 소개합니다.



1. 이야기의 기본 공식


소설을 쓴다는 건 참 막막한 일입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어디로 흘러가야 할지,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 처음부터 끝까지 쉬운 게 없습니다.


이야기를 만드는 공식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학창 시절 주입식 교육을 받아온 저로서는 공식을 알려준다면 달달 외워서 잘 써먹을 자신이 있는데요. 뜻밖에도 김연수 작가님은 이야기에 기본 공식이 있다며 선뜻 알려줍니다.


(캐릭터 + 욕망) / 방해물 = 이야기

김연수, ⟪소설가의 일⟫, 문학동네, 2014, p.37


모든 소설에는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각 캐릭터는 서로 다른 배경과 개성을 지니고 있는데요. 캐릭터의 개성은 소설 속에서 어떻게 드러날까요? 답은 ‘감각’입니다. 캐릭터가 무엇을 보고 듣는지, 그리고 보고 들은 것을 어떻게 느끼는지에 달렸습니다.


한편 우리는 모두 저마다 욕망을 품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세상은 우리의 욕망이 이루어지는 걸 쉽게 허락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욕망은 온갖 방해물로 인해 쉽게 충족되지 않고, 우리는 그 욕망을 어떻게든 실현시키려고 온갖 생고생을 감수합니다.


김연수 작가님은 위와 같은 부연 설명 끝에 ‘이야기의 기본 공식’을 다음과 같이 변형하기도 합니다.


(보고 듣고 느끼는 사람 + 그에게 없는 것) / 세상의 갖은 방해 = 생고생(하는 이야기)

김연수, ⟪소설가의 일⟫, 문학동네, 2014, p.40



2. ‘불타는 다리(플롯 포인트)’만 생각하라


이야기 공식을 외웠다고 해도 막상 이야기를 만들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에 작가님은 처음에는 불타는 다리(플롯 포인트)만 생각해 보라고 조언합니다.


불타는 다리란 ‘핵심 방해물’입니다. 주인공의 욕망을 방해하거나 자극하는 핵심 사건, 주인공의 좌절 포인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리가 불 탄 이후 주인공은 결코 이전과 같은 삶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돌아갈 수 있는 다리가 활활 불탔기에 주인공은 전혀 다른 세상으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만약 주인공이 좌절하여 포기한다면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납니다.


김연수 작가님은 다리를 불태우는 두 가지 방식을 소개합니다. 우선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에 등장하는 스밀라 방식입니다. 한 소년이 건물에서 떨어져 죽습니다. 경찰은 실족사로 결론을 짓지만 주인공 스밀라는 그렇지 않다는 걸 압니다. 스밀라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다리를 불태웁니다.


나는 영웅이 아니다. 한 아이에 대한 애정이 있었을 뿐이다. 나는 그 아이의 죽음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그 손에 내 집념을 맡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 말고는 아무도.

페터 회,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박현주 옮김, 마음산책, 2005


다리는 불태우는 방법, 다른 하나는 ⟪파이 이야기⟫에 나오는 피신 몰리토 파텔의 방식입니다.


배가 가라앉았다. 괴물이 내는 금속성 트림 같은 소리가 났다. 물건이 수면 위로 쏟아져 나오더니 사라졌다. 모든 게 비명을 질러댔다. 바다며 바람, 내 마음까지. 구명보트에서 보니 물속에 뭔가가 있었다.

얀 마텔, ⟪파이 이야기⟫, 공경희 옮김, 작가정신, 2022


스밀라는 한 아이의 죽음에 대한 원인을 막연하게나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밀라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그런 설정 때문에 스밀라는 아이의 죽음에 책임감을 가지고 사건 속으로 뛰어듭니다. 반면 파이는 자신의 성격과 상관없이 배가 가라앉았기 때문에 새로운 삶에 놓입니다.


스밀라처럼 주인공이 자신의 캐릭터 설정 때문에 다리를 불태우면 캐릭터 중심, 파이처럼 캐릭터 성격과 무관하게 외부 사건 때문에 다리가 불타면 플롯 중심의 소설이라고 합니다.



3. ‘왜? 어떻게?’ 상자


불타는 다리를 상상했다면, 다음으로는 ‘왜? 어떻게’ 상자를 이용하여 이야기의 백스토리와 디테일을 덧붙여야 합니다.


김연수 작가님은 자신의 소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을 썼을 때를 예시로 듭니다. 먼저 김연수 작가님이 상상한 불타는 다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입양아가 자신의 출생과정에 대해서 알아내려고 고향을 방문했다가 수많은 비밀을 접하게 (되면서 생고생을 하게) 된다.

김연수, ⟪소설가의 일⟫, 문학동네, 2014, p.59


이제 틈날 때마다 ‘왜? 어떻게?’ 상자를 이용하여 질문을 만들고 답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왜 한 입양아는 자신의 출생과정에 대해 알아내려고 하는가?'
'어느 날, 양부가 보낸 소포 중에 친모와 함께 찍은 사진이 나왔기 때문이다'가 나의 대답이다. 대답이 나오면 또 상자에서 ‘왜?’를 꺼내서 거기에다가 붙인다.
'왜 어느 날, 양부는 소포를 보냈는가?' 혹은 '왜 친모가 사진을 찍었는가?'
'어떻게'를 꺼내서 붙여도 된다.
'어떻게 어느 날, 양부는 소포를 보냈는가?'
이 질문에는 '이십 킬로그램짜리 페덱스 상자 여섯 개에 담아서 보냈다'가 나의 대답이다. 여기에는 다시 ‘왜?’를 붙일 수 있다.
'왜 양부는 이십 킬로그램짜리 페덱스 상자 여섯 개를 입양아에게 보냈는가?'

김연수, ⟪소설가의 일⟫, 문학동네, 2014, p.59


‘왜?’ 상자를 반복하여 얻어낸 대답들은 모두 백스토리, ‘어떻게?’ 상자를 반복하여 얻어낸 대답들은 모두 디테일이 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야기의 구석구석이 채워질 때까지 ‘왜? 어떻게?’ 상자를 반복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4. 입체적인 캐릭터 만들기


평면적인 캐릭터는 유치해 보입니다. 나아가 소설 속 모든 캐릭터가 평면적이면 선과 악의 구도가 명확해지고, 나아가 스토리도 권선징악으로 단순해집니다. 그런 글은 독자들도 관심이 없을뿐더러 실제 삶과도 거리가 있습니다.


실제 세계에는 다양한 욕망을 지닌 인물들이 저마다의 사정(백스토리)을 품고 부딪칩니다. 따라서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하고, 그 덕분에 살아 숨 쉬는 스토리가 만들어집니다. 즉 실제 세계 속 인물들은 입체적입니다.


그럼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보이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김연수 작가님은 다음 그림을 통해 캐릭터의 내면 공식(?)을 보여줍니다.


김연수, ⟪소설가의 일⟫, 문학동네, 2014, p.127


캐릭터는 자기만의 가치관으로 세상을 저울질하며 살아갑니다. 그 가치관 바깥에 욕망이 자리합니다. 그리고 욕망 바깥에 감정이 자리합니다. 감정은 다시 진짜 감정과 사회적 감정으로 나뉩니다. 진짜 감정은 표정, 몸짓, 행동으로 드러나고 사회적 감정은 말로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주말 출근을 요구합니다. 일순간 부하 직원의 몸과 표정이 굳어집니다. 잠깐의 정적 이후 부하 직원은 “네 그러죠.”라고 답합니다. 이때 부하 직원의 진짜 감정은 표정, 몸짓, 행동으로 드러나며, 사회적 감정은 “네 그러죠.”라는 말로 드러납니다. 이처럼 소설 속 캐릭터는 진짜 감정을 결코 말로 드러내지 않으며, 다만 숨기지 못하는 표정, 몸짓, 행동에 진짜 감정이 묻어날 뿐입니다.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보이게 하려면 저울(가치관), 원하는 것(욕망), 진짜 감정을 절대 직접적으로 쓰지 말라고 김연수 작가님은 조언합니다. 쓸 수 있는 건 오직 표정, 몸짓, 행동이며 사회적 감정을 드러내는 말 뿐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5. 소설가의 문장


소설가는 어떤 인물의 저울(가치관), 원하는 것(욕망), 진짜 감정을 직접적으로 서술하지 않습니다. 그럼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까요?


여기서 몇 번이고 강조하고 싶은 것은, 글을 쓰기 전에 소설가는 생각하지 않고 감각한다는 사실이다.

김연수, ⟪소설가의 일⟫, 문학동네, 2014, p.221


소설가는 캐릭터가 외롭다고 쓰지 않습니다. 대신 서른셋의 가장이 그해 추석에 미국 유학 간 아들과 그 아들을 뒷바라지하러 간 아내에게 ‘보고 싶다’는 문자를 보내고, ‘저도요’라는 무성의한 짧은 답을 받은 이야기를 합니다.


소설은 감각의 세계입니다. 캐릭터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에 캐릭터의 진짜 감정, 욕망 그리고 가치관이 묻어납니다. 그러나 캐릭터의 감각을 써내려면 캐릭터를 충분히 이해해야만 합니다. 캐릭터를 이해하지 못한 글은 거짓과 위선의 냄새가 납니다.


결국 소설가의 일이란 캐릭터의 감각을 써낼 수 있을 때까지 캐릭터를 이해하는 일입니다. 핍진성(현실성)이 생길 때까지. (핍진성 이야기가 궁금하시다면 책을 읽어보시길 ^^)



6. 초고 쓰기, 토고 쓰기, 고쳐 쓰기


소설가들은 자신이 쓴 초고를 보면 토할 거 같은 역겨움을 느낀다고 합니다. 너무 조잡하고 단편적이며 추상적인 말들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김연수 작가님은 초고 쓰기를 토고 쓰기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토고를 쓰지 않고서는 소설을 쓸 수 없다고 덧붙입니다. 토고를 쓰고 나면 비로소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가 드러나고, 모르는 것을 쓰기 위한 소설가의 일이 시작된다고 합니다.


소설가는 모르는 일에 대해 쓰기 위해 자료를 조사하거나, 인터뷰를 하거나, 직접 체험해 봅니다. 소설 속 캐릭터라면 어떻게 감각할지 상상하며 캐릭터를 끊임없이 탐구하고 이해합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캐릭터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게 되고, 비로소 소설가는 토 나오는 초고 속 문장을 하나씩 하나씩 캐릭터의 감각 언어로 바꿔나갑니다.



7. 사람을 이해하는 일, 소설


⟪소설가의 일⟫에는 인간과 인생에 대한 김연수 작가님의 통찰이 군데군데 담겨 있습니다. 그중 두 가지를 소개해보겠습니다.


인생 역시 이야기라면 마찬가지리라. 이 인생은 나의 성공과 실패에는 관심이 없다. 대신에 얼마나 대단한 걸 원했는가, 그래서 얼마만큼 자신의 삶을 생생하게 느꼈으며 또 무엇을 배웠는가, 그래서 거기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겼는가, 다만 그런 질문만이 중요할 것이다.

김연수, ⟪소설가의 일⟫, 문학동네, 2014, p.41


인생이 이야기와 같다면, 즉 인생이 ‘(캐릭터 + 욕망) / 방해물 = 이야기’라면 우리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훌륭한 이야기는 주인공이 욕망을 성취했느냐 못했느냐가 아닙니다. 주인공이 얼마나 자신의 욕망을 원했는가? 세상의 온갖 방해에도 자신의 삶을 걸만큼 욕망을 원했는가? 우리는 그런 이야기에 함께 좌절하고, 불안하고, 환호하고, 박수를 보냅니다.


제게도 질문을 던져봅니다. 나의 진짜 감정, 진짜 욕망은 무엇인가? 나는 그 욕망을 위해 내 삶을 던질 용기가 있는가? 나는 소설 속 주인공보다 생동감 있는 삶을 살고 있는가?


또 한 구절을 소개합니다.


정리하자면, ‘과거-안다, 현재-산다, 미래-모른다’의 공식이다.

(그새 호를 바꾸신) 모사 김연수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인생 문제의 해결책은 시간에 맞게 단어를 사용하라는 것이다. 인생 문제의 대부분은, 자꾸만 과거 속에서 살려고 하거나, 현재에 일어나는 일들을 모르거나, 미래를 알려고 할 때 일어나니까. 그중에서도 문제의 근원은 자신이 지금이나 미래의 일들에 대해서 뭘 안다고 생각하는 일이다.

김연수, ⟪소설가의 일⟫, 문학동네, 2014, p.202


⟪소설가의 일⟫을 읽으면서 무릎을 탁! 친 부분입니다. 과거는 안다. 현재를 산다. 미래는 모른다. 이처럼 간단한 공식을 지키지 못한 데서 괴로움이 싹틉니다. 찬란했던 과거에 살면서 현재 괴로운 사람. 현재에 일어나는 일을 외면하고 모른 체하여 괴로운 사람. 미래를 다 안다는 듯 예측하고 투자하여 좌절하는 사람.


과거는 알고, 현재는 살고, 미래는 모르는 겁니다. 각 시제에 맞는 서술어를 써야 불행을 막을 수 있는 듯하니 서술어에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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