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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뚫기 Oct 02. 2023

집단주의·권위주의의 몰락

『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송길영 지음 (1/2)

어서 오세요.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인생을 바꾸는 ‘우물 밖 청개구리’ 우구리입니다.


저는 지독한 개인주의자입니다. 다른 사람의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너는 너, 나는 나.’ ‘나도 상관 안 할 테니, 너도 상관 마.’ 게다가 내향적이어서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하기에 친한 친구에게 “소시오패스냐?” 는 놀림을 받곤 합니다.


제가 개인주의자라고 해서 세상일에도 관심이 없을 거라는 건 오해입니다. 저는 개인주의를 침해하는 시스템과 문화에 무척 예민합니다. 개인으로서 의무를 다했는데 나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그럼 나도 너 인정 못해!


이런 저의 성격 때문에 군대에서 엄청 고생했습니다. 저는 사오십 명이 함께 생활하는 소대 생활관에서 군생활을 보냈는데, 선임과 후임들이 떼거리로 모여있는 소대 생활관에는 부조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인사 담당 행정병으로서 병사들의 근무, 휴가, 진급 업무를 맡았고, 선임들의 각종 유혹에 시달렸습니다.


“야 맛있는 거 사 왔는데 같이 먹자. 대신에 근무 (빼주는 거) 알지?”

“나 이번에 휴가 나가는데 (기차비 지원) 알지?”


누군가에게 돌아가는 특혜는 다른 누군가의 손해를 낳습니다. 선임들에게 돌아가는 특혜는 맨 아래 후임들의 희생을 낳습니다. 선임들은 나중에 짬 차면 다 누리는 거라며, 자신들도 후임일 때 다 희생했다며, 이게 사회생활이라며, 군대에서 사회생활을 배웠다는 자부심마저 내비쳤습니다.


어우! 싫어! 절대 안 돼! 이게 사회라고? 이게 사회생활이라고? 나는 그런 사회 인정 못해! 지독한 개인주의자인 저는 선임들의 유혹에 원칙으로 대응했고, 그 대가로 온갖 수난을 견뎌야 했습니다.


아~ 개인주의자의 삶이란 이토록 험난하단 말인가. 그런데 송길영 작가님이 말합니다. 이제 집단주의와 권위주의의 시대는 지났습니다. 핵가족이 아닌 핵개인의 시대가 옵니다. 분명히 오고 있습니다. 이건 시대예보입니다.



1. 집단주의·권위주의로 찬란했던 과거


군대는 집단주의와 권위주의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남자는 군대를 다녀와야 사람 된다’는 말을 종종 듣고는 했는데 이는 우리 사회 곳곳에 군대 문화가 자리하고 있다는 방증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집단주의와 권위주의가 힘을 얻은 이유는 효율이 최고의 기준이었기 때문입니다. 기업은 덩치를 키울수록 더 많은 돈을 벌었고, 큰 덩치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도록 만들기 위해 계급, 명령, 권위의 체계를 만들었습니다.


집단주의는 간단히 말하자면 “집단이 정답이다”입니다. 각 개인은 자신의 고유성과 개성을 드러내면 안 되고, 집단이 원하는 모습에 맞추어야 합니다. 심지어 식당에 가서도 집단이 원하는 메뉴를 선택해야 합니다. “저도 짜장면이요…”


권위주의는 간단히 말하자면 “집단이 우월하다”입니다. 집단에서 오래 근무하고 높은 자리에 위치한 사람이 권위와 권력을 갖습니다. 오래 근무하고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일수록 집단에 동기화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집단주의와 권위주의는 “집단이 우월하고 정답이다!”라고 소리칩니다. 이는 “집단에서 멀어지면 열등하고 오답이다!”라고 소리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집단주의와 권위주의가 깊어질수록 소수자를 혐오하고 차별하게 됩니다.


한국 사회는 그동안 집단주의와 권위주의에 뿌리를 두고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였고, 비정상을 버리고 정상만 장려함으로써 극도의 효율을 추구했습니다. 그 덕에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루기도 했습니다.



2. 집단주의·권위주의 속 개인의 서사


서사란 무엇일까요? 김연수 작가님은 자신의 책 ⟪소설가의 일⟫에서 서사를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캐릭터 + 욕망) / 방해물 = 이야기

(보고 듣고 느끼는 사람 + 그에게 없는 것) / 세상의 갖은 방해 = 생고생(하는 이야기)

김연수, ⟪소설가의 일⟫, 문학동네, 2014


모든 캐릭터, 즉 개인은 고유한 욕망이 있습니다. 그 욕망을 실현시키고자 애쓰지만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개인은 세상의 온갖 방해를 무릅쓰고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온갖 생고생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이게 서사, 즉 이야기입니다.


집단주의와 권위주의 속 개인은 어떤 이야기를 쓰게 될까요? 개인과 그의 욕망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방해물인 집단의 목소리가 너무 강해서 개인이 보이지 않습니다. 개인은 “집단이 우월하고 정답이다”는 목소리에 압도되어 자신과 자신의 욕망을 죽이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대표적으로 1970~80년대 ‘큰 딸 서사’가 있습니다. 이 당시 각 집안의 큰 딸들은 십 대 때부터 가정부, 버스 차장, 봉제공장에서 일했습니다. 큰누나가 빨리 돈을 벌어 동생들 학비를 대야 했기 때문입니다. 큰딸은 일가를 일으켜야 했고, 큰딸의 부양 아래 큰아들은 가계를 일으켜야 했습니다.


그때 그 시절 개인의 서사는 크게 두 단어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인내입니다.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를 버틴다는 인내. 다른 하나는 희생입니다. 가족과 회사란 집단을 위해 나를 포기하는 희생.


요즘 이삼십 대 청년들의 대표적인 감정은 ‘억울함’입니다. 이삼십 대 청년들은 부모와 교사들의 안내에 따라 자기 결정권을 포기하고 시키는 대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세상이 변해버렸습니다. 인내와 희생을 감수하였는데 취직도 연애도 결혼도 어렵습니다. 약속된 보상이 사라진 겁니다.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변해버린 것일까요?



3. 고령화·지능화가 몰락시킨 집단주의·권위주의


송길영 작가님이 포착한 시대 변화의 핵심은 고령화와 지능화입니다.


과거에는 집단이 개인의 생존을 책임져주었습니다. 부모가 젊을 때는 부모가 자식을 돌보았고, 부모가 늙으면 자식이 부모를 돌보았습니다. 회사는 직원의 정년퇴직을 보장했고, 직원은 퇴직 후 퇴직금으로 노후를 보내면 수명이 다했습니다.


그런데 고령화 사회로 변하였습니다. 퇴직 후에 퇴직금을 다 쓰도록 수명이 다하지 않는 겁니다. 이는 자녀 세대에게도 부담이 되었습니다. 가뜩이나 출산율이 줄어 부모 부양 부담을 나눌 자녀도 적습니다. 안타깝게도 집단이 개인의 생존을 책임져주는 시대가 끝이 난 겁니다.


또 하나, 과거에는 기업이 정보를 독점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대의 변화 속도가 빠르지 않았습니다. 기업은 가능성 있는 인재를 몽땅 채용한 뒤 삼 년 정도 시간을 들여 기업의 입맛에 맞게 길러냈습니다. 개인은 기업에 취직하지 않고서는 또는 대학에 가지 않고서는 고급 정보에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능화 사회로 변하였습니다. 인터넷에만 접속하면 MOOC를 통해 전 세계 유명 교수들의 강의를 수강할 수 있고, 유튜브를 통해 각종 정보에 접근할 수 있으며, AI 서비스를 통해 각종 컨설팅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정보의 비대칭이 무너지고 사회 변화 속도가 가속화되자 기업이 독점하던 인재 육성이 오히려 사회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는 독이 되었습니다. 기업의 권위가 무너진 것입니다.


고령화와 지능화는 영원할 거 같던 집단주의와 권위주의를 몰락시키고 있습니다.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획일성이 아닌 다양성을 갖추어야 하는 시대가 왔습니다. 이제 기업은 인재를 채용하여 육성하는 전략을 버리고 이미 능력을 갖춘 개인들을 영입하여 협업할 수 있는 플랫폼을 제공하라는 요구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집단주의와 권위주의가 무너져 사리진 빈자리를 무엇이 채울까요? 송길영 작가님은 ‘핵개인의 시대’가 올 거라고 예보합니다. ‘핵개인의 시대’는 어떤 모습일까요? ‘핵개인의 시대’에서 개인은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그리고 ‘핵개인의 시대’에서 개인이 쓰게 될 서사는 어떠할까요?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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