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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뚫기 Oct 08. 2023

딱 일 인분의 죽음

『이반 일리치의 죽음』 톨스토이 지음

어서 오세요. 책을 읽고 소개하는 ‘우물 밖 청개구리’ 우구리입니다.


여러분은 죽음에 대해 자주 생각하시나요? 저는 요즘 이런 질문을 던져보고는 합니다.


‘한 사람의 죽음은 딱 일 인분 일까? 아니면 한 사람의 죽음은 모두의 죽음일까?’


만약 저의 절친이 죽는다면 저는 더 이상 절친과 대화하고 놀 수 없습니다. 달리 말하면 절친이 사라지면 절친과 대화하고 노는 저 또한 함께 사라집니다. 절친의 죽음은 제 일부의 죽음입니다. 절친과 저의 관계가 깊으면 깊을수록 절친의 죽음은 제 많은 부분의 죽음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서로 연결된 존재라면 한 사람의 죽음은 모두의 죽음에 가깝지 않을까요?


그런데 딱 일 인분의 죽음이 담긴 이야기, 상실감을 느끼지 않는 죽음, 죽기도 전부터 망자의 빈자리를 차지할 욕망과 사망 보조금에 관심을 두는 죽음, 그런 이야기를 만났습니다. 톨스토이의 중단편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소개합니다.



1. 이반 일리치의 죽음


상류 사회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가득했던 이반 일리치는 늘 내면의 목소리보다 사회적 체면을 중시했습니다. 성실하고 능력 있으면서도 예의를 지켰던 그는 끝내 자신이 원하던 직급에 오르게 되지만, 새 집을 꾸미던 중 사고로 옆구리를 다쳤습니다.


옆구리 통증은 금방 사라지는가 싶더니 다시금 고개를 들어 조금씩 조금씩 이반 일리치의 생명을 갉아먹었습니다. 그는 점차 병들어 더는 일할 수 없는 몸이 되었고, 침대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이반 일리치를 위로하기보다 성가신 존재로 여겼습니다. 직장 동료들은 그의 빈자리를 탐했고, 아내는 남편의 사망 보조금을 기다렸습니다. 그들 모두 죽음을 외면했고, 죽음 냄새를 풍기는 이반 일리치를 불편하고 불쾌하게 여겼습니다.


병은 끊임없이 깊어졌고 이반 일리치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제야 그는 죽음으로부터 도망치기를 포기했습니다. 죽음의 눈으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된 이반 일리치는 자신의 삶과 죽음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생의 마지막 날, 이반 일리치는 용기를 내어 자기 삶 속 잘못을 바로잡았습니다. 그리고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걸 깨닫고는 기쁨에 차 숨을 거두었습니다.



2. 딱 일 인분의 죽음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는 ‘사람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 그에게 따뜻한 눈길과 위로를 건네는 인물이 없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은 그의 아픔을 귀찮게 여깁니다. 무엇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이토록 외롭고 서럽게 이끌었을까요?


제가 찾은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사회 탓입니다. 톨스토이는 러시아 제국을 배경으로 1886년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출간했습니다. 그 당시 러시아 제국은 황제를 중심으로 강력한 전제 정치가 이루어졌습니다. 계급이 존재했고, 모든 개인들은 국가를 위한 도구였습니다.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더 높은 직급과 연봉을 받기 위해 경쟁했고, 귀족들의 눈에 띄기 위해 애썼습니다. 사회에서 허락한 지위와 연봉으로 개인의 성공 여부가 결정되었습니다. 따라서 성공하려면 자신의 다양성과 개성을 무시하고, 사회가 원하는 정답에 충실해야 했습니다.


이런 사회는 ‘사람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 사람을 만나면 가장 먼저 누가 더 우월하고 열등한지 파악해야 합니다. 열등한 사람은 우월한 사람에 대한 예의를 갖추어야 하고, 우월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 지위에 걸맞은 말과 행동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애써야 합니다. ‘사람 냄새’가 사라진 거대한 연극판과 같은 세상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이반 일리치, 개인 탓입니다. 이반 일리치는 어렸을 때부터 상류 사회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컸습니다. 한 마디로 있어 보이고 싶은 욕망이 그득그득했습니다. 이반 일리치는 있어 보이고 싶은 욕망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무시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이반 일리치는 법률학교에 입학한 뒤로 그전까지 혐오했던 행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상류 사회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그런 행동을 한다는 걸 알고 나서부터였습니다. 이반 일리치는 자기 내면의 목소리, 양심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상류 사회 사람들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또 다른 예로, 이반 일리치는 있어 보이고 싶은 욕망을 위해 프라스코비야 표도로브나와 결혼했습니다. 그녀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녀와 가치관이 맞아서가 아니라, 그녀가 괜찮은 귀족 가문 출신이고, 아름다웠고, 재산도 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상류 사회 사람들이 옳게 여기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사회의 요구와 이반 일리치의 욕망이 버무려져 외롭고 서러운 죽음을 낳았습니다. 이반 일리치에게는 취향과 개성을 나눈 동료나 부인, 자녀가 없었습니다. 이반 일리치는 모든 게 짜인 연극판 위에서 법관과 사교계 인물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습니다. 하지만 죽음은 이반 일리치의 역할을 모두 거두어 갔고, 역할이 사라진 이반 일리치는 빈 껍데기일 뿐이었습니다.



3. 온전한 죽음과 삶


이반 일리치는 죽음을 외면하고 부정했습니다. 그리고 예전처럼 건강하고 즐겁게 살게 해달라고 신에게 간청했습니다. 그때 영혼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예전에 네가 어떻게 살았지? 건강하고 즐겁게 살았던가?”


이반 일리치는 예전의 삶이 행복하지 않았다는 걸, 자신이 빈 껍데기와 같은 삶을 살았다는 걸 알아차렸습니다. 잘못 살았다는 것을, 정작 중요했던 내면의 목소리와 순수한 충동들을 무시해 왔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습니다.


이반 일리치는 밉고 증오스러웠던 아내가 다 자기 탓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껍데기를 채우기 위해 선택한 결혼, 그래서 소외당한 아내, 그 사이에 태어난 자식들. 이반 일리치는 죽기 전에라도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고 싶어 힘겹게 말을 꺼냈습니다.


“데리고 나가줘…… 아이가 불쌍해…… 당신도 불쌍하고……” 그리고 ‘용서해 줘’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엉뚱하게도 ‘용감해줘’라고 말해버렸다.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문예출판사, 2016, p.98


이반 일리치가 죽음과 삶을 받아들인 순간 그는 사회의 요구와 자신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졌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사라졌고, 죽음이 있던 자리에 빛이 보였습니다.


”다 끝났습니다!” 누군가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반 일리치는 이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끝난 건 죽음이야. 이제 죽음은 존재하지 않아.’

이반 일리치는 숨을 훅 들이마시다가 그대로 멈추더니 몸을 축 늘어뜨리며 숨을 거두었다.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문예출판사, 2016, p.98-99



4. 삶과 죽음은 둘이 아닌 하나


이반 일리치는 ‘끝난 건 죽음이야. 이제 죽음은 존재하지 않아.’라고 생각하며 숨을 거두었습니다. 사실 죽음 자리에 더 어울리는 단어는 삶입니다.


‘이제 삶은 존재하지 않아.’


그런데 이반 일리치는 삶의 자리에 뜬금없이 ‘죽음’을 넣었습니다.


‘끝난 건 죽음이야. 이제 죽음은 존재하지 않아.’


마치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닌 하나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그렇다면 이반 일리치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었던 말은 이런 말들이 아닐까요?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건 죽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이다.’

‘죽음을 피하려고 애를 쓰는 건 삶을 피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건 삶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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