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머 씨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어서 오세요. 책을 읽고 소개하는 ‘우물 밖 청개구리’ 우구리입니다.
오늘은 특이한 책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이 책은 보드랍고 따스한 삽화가 곁들여진 백 쪽 남짓한 작고 가벼운 책인데요. 다만 책을 다 읽고 나면 누구나 당황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뭐야? 이게 끝이야? 도대체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뭐지? 떨어뜨려 깨져버린 접시처럼 책 속 내용이 머릿속 여기저기에 흩어져있는 듯한 찝찝함이 남습니다.
작고 가벼운 책이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한 번 더 읽어보기로 합니다. 이번에는 질문을 품고 답을 찾아보기로 결심한 채 힘주어 읽어봅니다. 다시 읽고 나면 책이 왠지 조금 무거워진 듯하고, 보드랍고 따스했던 삽화가 한층 어두워진 듯합니다.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어슴푸레 느껴지는 듯도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알듯 말듯, 신비로운 냄새는 여전합니다.
오늘 소개할 책은 ⟪좀머 씨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평소와는 다른 형식으로 책을 소개해볼까 합니다. 굳이 따지자면 추리 형식에 가까울 듯한데요. 책 속 미스터리에 접근해 가는 저의 여정, 함께 가시죠!
2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의 한 마을. 마을 사람들은 전부 배낭을 메고 다녔습니다. 교통이라고는 하루에 딱 한 번 오는 버스뿐이었고 사람들은 부족한 땔감이나 먹을 것을 구하려고 몇 시간이든 걸었습니다. 끝내 구한 물건들을 손수레에 싣거나 배낭에 짊어졌습니다.
그러나 불과 몇 년이 지나자 생필품은 모두 마을 안에서 살 수 있었고, 버스도 하루에 다섯 번씩 운행했습니다. 다시 몇 년이 지나자 자가용과 오토바이를 타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마을에 정착한 좀머 씨만이 계속해서 배낭을 메고 지팡이를 짚은 채 매일매일 걸어 다녔습니다. 새벽 4시가 되기도 전부터 밤늦게까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여름이 오나 겨울이 오나. 먹을 버터 빵 한쪽과 모자가 달린 우비 한 벌만 배낭에 담은 채 매일매일 걸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무런 볼일도 없어 보였습니다. 우체국이나 군청에 가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를 방문하는 것도 아니고, 벤치에 단 몇 분도 앉아서 쉬지 않은 채 계속 걷기만 했습니다.
도대체 좀머 씨는 왜 걷는 걸까요? 지금까지 단서는 ‘2차 세계대전 직후 좀머 씨가 독일의 한 마을에 정착했다.’ 뿐입니다. 전쟁 트라우마와 관련이 있을까요?
아참 좀머 씨에게는 아내가 있었는데요. 아내는 온종일 집에 틀어박혀 인형을 만들어 돈을 벌었습니다. 좀머 씨는 걷기만 할 뿐이니 아내가 번 돈으로 매일 버터 빵 한쪽을 구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사람들이 좀머 씨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어디서 오느냐고, 또는 어디를 가느냐고. 그럼 좀머 씨는 마지못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는데 다음과 같은 말이었습니다.
⟨…… 아주바빠서이제학교 뒷산을올라갔다가…… 호수를빨리빨리지나서…… 오늘아직시내에도꼭가보아야하고…… 너무바빠지금당장너무바빠시간이없어……⟩
p.27
좀머 씨는 걸을 때 노를 젓듯이 오른손으로 지팡이질을 했습니다. 자기 어깨보다 높은 긴 지팡이로 땅을 찍으며 온 힘을 다해 몸을 앞으로 쭉쭉 밀어냈습니다. 그렇게 얻어진 추진력으로 엄청난 속도로 쉬지 않고 걸었습니다. 그러니까 그의 말처럼 ‘좀머 씨는 정말 바쁘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좀머 씨는 무엇을 하느라 그리도 바빴을까요? 좀머 씨의 말 중 제 눈에 꽂히는 표현은 ‘갔다가’ ‘지나서’ ‘꼭가보아야하고’ 인데요. 이 표현에서 그에게는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는 것과, 그 일을 해내기 위해 걷는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 일을 해내기에 시간이 넉넉하지 않다는 것도요. 즉 그에게는 임무 같은 게 있었던 셈이고, ‘걷기’ 자체는 목적이 아니라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좀머 씨에게는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
'꼭 해야만 하는 일'을 해내려면 매일매일 거의 하루종일 걸어야 한다.
그에게는 왜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을까요? 그것도 시간이 부족할 정도로요. 심지어 일 년 내내 매일매일 새벽 4시도 전부터 밤늦게까지요. 누가 좀머 씨에게 시킨 일일까요? 아니면 좀머 씨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일까요?
하루는 주인공 소년이 아버지와 경마장에 다녀오는 길이었습니다. 자동차를 타고 돌아오는데 돌풍이 휘몰아치고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빗방울은 우박으로 변하였습니다. 우박은 점차 커지더니 공 크기만 해져 아버지는 차를 길가에 대고 우박이 멈추길 기다렸습니다. 얼마 후 날씨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용해졌고, 아버지는 다시 운전대를 잡았습니다.
그때 저 멀리 좀머 씨가 잰걸음으로 걸어가는 게 보였습니다. 아버지는 좀머 씨 옆을 지나가며 창문을 내리고 태워주겠다고 소리쳤습니다. 하지만 좀머 씨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을 뿐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반복된 호의에도 좀머 씨가 전혀 반응을 하지 않자 아버지는 차를 좀머 씨에게 더욱 가까이 붙이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어서 타시라니까요, 글쎄! 몸이 흠뻑 젖으셨잖아요! 그러다가 죽겠어요!”
그러자 마침내 좀머 씨가 반응했습니다.
그 말에 아저씨가 우뚝 섰다. 내가 보기에 그는 바로 ⟨죽겠어요⟩라는 말에서 빳빳하게 굳어지며 멈춰 서는 것 같았다. 그것도 너무 갑작스럽게 멈춰서 아버지는 그의 옆을 지나치지 않으려고 급브레이크를 밟아야만 했다. 아저씨는 오른손에 쥐고 있던 호두나무 지팡이를 왼손으로 바꿔 쥐고는 우리 쪽을 쳐다보고 아주 고집스러우면서도 절망적인 몸짓으로 지팡이를 여러 번 땅에 내려치면서 크고 분명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 제발 나를 좀 그냥 놔두시오!」
p.36
좀머 씨는 아버지의 어떤 말에도 반응하지 않다가 “그러다가 죽겠어요!”라는 말에 “그러니 제발 나를 좀 그냥 놔두시오!”라고 반응했습니다. 저는 여기서 몇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첫째, ‘좀머 씨는 죽고 싶지 않다.’ 둘째, ‘아버지가 자꾸 말을 걸면 좀머 씨가 죽음에 가까워진다.’입니다. 즉 아버지의 말은 좀머 씨를 방해한다는 뜻인데요. 발견한 사실을 종합하면 좀머 씨의 말은 다음과 같이 바꿔볼 수 있습니다.
“나도 죽기 싫어요! 그래서 ㅇㅇㅇ(꼭 해야만 하는 일) 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방해 말고 제발 나를 좀 그냥 놔두시오!”
좀머 씨는 죽지 않으려고 ‘꼭 해야만 하는 일’을 한다.
’꼭 해야만 하는 일’을 해내려면 매일매일 거의 하루종일 걸어야 한다.
좀머 씨는 죽지 않으려고 걷는다.
인간의 행동은 목적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쾌(기쁨)를 얻고자 하는 행동이고, 다른 하나는 불쾌(괴로움)를 피하고자 하는 행동입니다. 그렇다면 좀머 씨에게 ‘꼭 해야만 하는 일’은 어느 쪽에 가까울까요? ‘좀머 씨는 죽지 않으려고 걷는다.’는 추리가 맞다면 좀머 씨는 불쾌(괴로움)를 피하려고 걷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불쾌, 바로 죽음입니다.
그럼 좀머 씨에게 ‘꼭 해야만 하는 일’은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일까요? 아니면 스스로 원하는 일일까요? 우선 스스로 원하는 일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스스로 원한다는 건 쾌(기쁨)를 얻고자 하는 행동일 테니까요.
그렇다면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일까요? 좀머 씨는 누군가에게 임무를 받았고, 실패할 시 죽는다는 협박을 받았을까요? 사실 이 또한 가능성이 낮습니다. 전쟁이 끝났기에 그는 더 이상 군인도 아닐 테고 같은 집에 사는 아내는 온종일 집안에서 인형만 만들고 있으니까요. 만약 아내가 두려웠다면 마을을 떠나면 됐을 테니까요.
여기서 잠깐, 상상해 보겠습니다. 만약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에 재앙이 닥친다면 어떨까요? 그것도 목숨을 위협할 정도로 큰 재앙이요. 자연재해나 전쟁 같은 것이요. 그럼 우리는 살기 위해 무언가를 할 겁니다. 도망을 친다거나 지하에 벙커를 만든다거나 보호 장벽을 세운다거나. 이때 우리의 행동은 스스로 원했던 것도 아니고,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어마어마한 재앙 앞에 살기 위한 발버둥일 뿐이지요.
좀머 씨의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스스로 원한 일도 아니고, 누가 시킨 것도 아니라면, 재앙 앞에서 발버둥 치는 일과 같은 게 아닐까요? 좀머 씨의 목숨을 위협하는 재앙이 있고, 좀머 씨는 재앙으로부터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꼭 해야만 하는 일’을 매일 해냅니다.
좀머 씨의 목숨을 위협하는 재앙이 있다.
좀머 씨는 재앙으로부터 목숨을 지키기 위해 ‘꼭 해야만 하는 일’을 한다.
’꼭 해야만 하는 일’을 하려면 거의 하루종일 걸어야 한다.
좀머 씨는 재앙으로부터 목숨을 지키기 위해 걷는다.
뜬금없지만 어이없게도 좀머 씨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는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요?
좀머 씨를 지배하는 감정은 아마도 ‘공포나 불안’이었을 겁니다.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는 사람에게 딱히 다른 감정이 있었을까 싶기는 합니다. 좀머 씨가 늘 공포나 불안에 떨었다는 것은 책 속 여기저기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한참이 지나자 내 머릿속에는 내가 자동차 창문을 통해 보았던 반쯤 벌린 입과 공포에 질린 커다란 눈동자의 얼굴, 빗물로 범벅이 된 좀머 아저씨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나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기쁜 일이 있을 때 사람이 그런 표정을 짓지는 않아. 뭔가 만족이나 쾌락을 위해서 하는 사람이 그런 표정을 지을 수는 없어. 그런 얼굴은 뭔가 겁에 질린 얼굴이었어.
p.45
아무도 자기를 따라오지 않고 있으며 먼 곳까지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 세 번의 빠른 동작으로 밀짚모자, 지팡이, 배낭을 벗어 놓고는 침대에 눕는 것처럼 길게 다리를 뻗고 나무뿌리 사이의 땅바닥에 드러누웠다. 그러고는 누워서 미처 쉬기도 전에 눕자마자 바로 일어서더니 깊은 한숨을 길게 몰아 내쉬었다. 아니 그것은 한숨이 아니었다. 한숨을 쉬면 뭔가 홀가분해지는 듯한 소리가 나지만 그것은 뭔가 고통스러운 신음에 가까웠고, 홀가분해지고 싶은 갈망과 절망이 엉켜서 가슴에서부터 배어나는 깊고 참담한 소리였다.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중환자가 내는 끙끙 앓는 소리같이 머리카락이 빳빳하게 서도록 만드는 그 애절한 신음 소리는 아저씨를 홀가분하게 해 준다든가 아저씨에게 안식을 준다든가 단 1초라도 아저씨를 쉬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저씨는 금방 다시 몸을 추스르며 일어났다.
p.95-96
세월이 흘렀고 좀머 씨의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좀머 씨는 원래 살던 작은 방보다 더 작은 다락방을 얻었지만 아주 잠깐만 집에 들러 먹을 것을 만들거나 차를 끓여 마시고는 다시 나갔습니다. 심지어 며칠씩 집에 들어가지 않은 날도 많았습니다.
그런 좀머 씨가 호수에 발을 담근 채 한동안 서 있었고, 갑자기 호수 안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차차 깊어지는 호수를 향해 특유의 성급함으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걸어 들어갔습니다. 좀머 씨의 다리가 잠기고, 엉덩이가 잠기고, 가슴이 잠겼고 바로 그때 오른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를 집어던지고 양팔로 노를 저어 가며 계속 걸었습니다. 어느새 좀머 씨의 어깨가 잠기고 목이 잠겼고, 턱이 잠기더니 이내 곧 좀머 씨가 쓰고 있던 밀짚모자만이 물 위에 남았습니다.
좀머 씨가 오른손에서 지팡이를 놓는 순간이 몇 차례 등장합니다. 한 번은 “그러니 제발 좀 나를 그냥 놔두시오!”라고 소리칠 때, 그때는 지팡이를 왼손에 옮겨 잡았습니다. 또 한 번은 숲 한가운데 나무뿌리 사이의 땅바닥에 아주 잠시 드러누워 고통스러운 한숨을 내쉴 때, 그리고 마지막은 좀머 씨가 강물에 가슴까지 잠겼을 때입니다. 반면 좀머 씨가 걸을 때는 여지없이 오른손에 지팡이를 잡고 있었습니다.
좀머 씨가 오른손에 지팡이를 잡고 있을 때는 ‘꼭 해야만 하는 일’, 즉 임무 중일 때를 상징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오른손에 지팡이를 잡고 있지 않을 때는 임무 중이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좀머 씨가 “그러니 제발 좀 나를 그냥 놔두시오!”라고 외쳤을 때는 임무를 방해받았을 때였습니다. 그러다 죽는다는 주인공 아버지의 말이 좀머 씨를 방해했습니다. 두 번째, 좀머 씨가 나무뿌리 사이 땅바닥에 드러누웠을 때는 아주 잠깐이었지만 좀머 씨가 휴식을 취할 때였습니다. 그럼 세 번째, 좀머 씨가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강물에 지팡이를 집어던진 건 어떤 의미일까요?
좀머 씨는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갈 때 분명 알았을 듯합니다. 더 이상 임무로 복귀하지 못한다는 것을. 그러니 수년 동안 사용하였던 자기 지팡이를 집어던졌을 겁니다. 만약 오른손에 든 지팡이가 임무 수행을 상징하는 거라면?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마지막 순간은 좀머 씨에게 임무 수행 중이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아가 영원한 임무 종료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모순이 생깁니다. ‘좀머 씨는 재앙으로부터 목숨을 지키기 위해 걷는다.’고 정리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좀머 씨는 ‘스스로 죽음을 맞이하는 선택’으로 자기 삶을 마무리했을까요? 그토록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 쳐왔던 좀머 씨가!
재앙으로부터 목숨을 지키기 위해 걸었던 좀머 씨가 스스로 죽음을 맞이하는 선택을 하였습니다. 책 내용 상 달라진 점이라고는 세월이 흘렀다는 것과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는 것뿐입니다. 여기서 저는 어떤 것을 추리할 수 있을까요?
첫째, ‘재앙은 여전히 건재하다’는 것입니다. 만약 재앙이 사라졌다면 좀머 씨는 더 이상 목숨을 지키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고 더 이상 걸을 이유도 없습니다. 그러나 좀머 씨는 죽기 전까지 계속 걸었습니다.
둘째, ‘좀머 씨가 죽기 직전에 임무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입니다. 좀머 씨는 강물에 지팡이를 집어던졌습니다. 더는 임무로 복귀할 일이 없다는 걸 알았을 겁니다. 그렇다면 그는 죽음 직전에 임무에서 해방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임무에서 해방된 대가는 죽음이었습니다. 즉 좀머 씨는 ‘죽음을 피한다’는 임무를 포기하고서야 임무에서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떠오릅니다. 임무를 포기하더라도 죽음을 기다리면 되지 굳이 나서서 죽음을 맞이하는 건 도대체 무슨 심보란 말입니까? 혹시 제가 모르는 사이 재앙이 좀머 씨를 덮쳐버린 걸까요? 아니면 좀머 씨의 목적이 ‘죽음을 피하는 것’이 아니었던 걸까요?
여기서 한 가지 새로운 가설이 떠올랐습니다. 좀머 씨가 정말로 피하고 싶었던 것은 ‘죽음’이 아니라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불안이다'는 가설이요. 이 가설대로 제가 발견한 사실을 다시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좀머 씨의 목숨을 위협하는 재앙이 있다.
좀머 씨는 재앙 때문에 죽을까 봐 공포스럽고 불안하다.
좀머 씨는 재앙으로부터 목숨을 지키기 위해 ‘꼭 해야만 하는 일’을 한다.
’꼭 해야만 하는 일’을 하려면 거의 하루종일 걸어야 한다.
좀머 씨는 재앙으로부터 목숨을 지키기 위해 걷는다.
좀머 씨는 걷는 동안은 공포와 불안을 낮출 수 있다.
죽기 전, 강물에 발을 담근 채 가만히 서있던 좀머 씨의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을까요?
죽으면 공포와 불안이 끝난다.
전쟁 직후 마을 사람들은 조금씩 회복하고 발전하는 마을에서 더 많은 문명과 편의를 누렸습니다. 그런 점에서 마을 사람들에게는 축복이 내린 셈입니다.
마을 사람 중 하나인 주인공 소년은 전쟁의 참상에 대해 전혀 몰랐을 겁니다. 소년은 조금씩 나아지는 마을과 조금씩 성장하는 몸과 마음을 누리며 첫사랑의 아픔도 겪고, 가족 속에 은밀한 소외도 느끼고, 인정받지 못한 서러움에 자살도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시간은 소년을 점차 더 강하고 여유로운 청년으로 만들어주었습니다. 소년의 삶은 늘 앞을 향했습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좀머 씨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마을 사람이었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왜냐하면 재앙이 좀머 씨에게만 내렸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주인공 소년만이 좀머 씨의 “그러니 제발 나를 좀 그냥 놔두시오!” 말속 절실함을 느꼈고, 좀머 씨의 눈빛에서 공포와 불안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좀머 씨를 존중했습니다. 심지어 좀머 씨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까지도.
아무리 책을 열심히 읽어도 좀머 씨에게만 내린 재앙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전쟁 트라우마인지, 전쟁과 전혀 상관없는 정신병인지, 아니면 고유성이란 어떤 상징인지.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오래도록 죽음을 피해 다니던 좀머 씨가 마지막에는 그 죽음을 받아들였다는 것. 자신에게 내린 운명과도 같은 재앙을 받아들이고 나서야 비로소 공포와 불안 그리고 임무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수차례 곱씹을수록 좀머 씨의 죽음이 무겁게 느껴집니다. 처음 책을 읽었을 때 터져 나온 가벼운 헛웃음이 쏙 들어갔습니다. 왜냐하면 좀머 씨에게 내려진 재앙이 너무나 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좀머 씨가 선택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것, 좀머 씨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좀머 씨 삶에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에 비해 제게 주어진 운명은 재앙이라 이름 붙일 수 없을 만큼 소소합니다. 대게 자신에게 주어진 삶이 가장 고달프고 힘들게 느껴지듯 저 또한 저의 삶이 고달프고 힘겨웠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너무나 소소합니다. 단 하루도 공포와 불안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좀머 씨의 삶에 비교하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좀머 씨가 참 대단합니다. 좀머 씨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 속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내려 했습니다. 자기 어깨 높이만 한 구부러진 지팡이로 자신의 몸을 앞으로 날려가며 매 순간 최선의 속도로 살아냈습니다. 압도적인 재앙 앞에서도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은 것인지 포기하지 못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꿋꿋하게 살아냈습니다. 더 나아질 거란 희망 한 점 없는 세계에서요.
나아가 좀머 씨의 마지막을 좋게 포장하자면, 좀머 씨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걸 넘어서 자신의 운명을 적극적으로 맞이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포장이 아니라 정확한 평가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좀머 씨가 죽음의 공포와 불안으로부터 도망치기를 포기하고 적극적으로 맞이한 게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압도적인 재앙 앞에 놓인 한 사람이 달리 더 멋진 선택을 내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변상욱 님은 자신의 책 ⟪두 사람이 걷는 법에 대하여⟫에서 행복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을 긍정하는 데서 출발한다고 말합니다. 저는 인정이 아닌 긍정이란 표현에 꽂혔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좋은 것이라고 긍정하는 데서 행복 그리고 삶이 시작된다는 말이 어찌나 제 가슴을 울리던지요.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을 치열하게 부정해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라는 걸 알기에 더더욱 제 마음 깊숙이 새겨졌습니다.
좀머 씨의 삶 또한 그러한 게 아닐까요? 다만 좀머 씨의 삶이 제 마음을 특히나 먹먹하게 하는 건 그에게 내려진 재앙이, 그에게 주어진 삶이 너무나 가혹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좀머 씨가 가혹한 운명을 필사적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전심전력으로 부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부정의 끝에 결국 자신의 운명을 인정하는 걸 넘어 긍정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