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어서 오세요. 책을 읽고 소개하는 ‘우물 밖 청개구리’ 우구리입니다.
오늘 소개할 책은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입니다. 제가 책을 읽고 찾아낸 핵심 단어는 ‘영원회귀’와 ‘키치’인데요. 두 핵심 단어를 알면 두 가지 좋은 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이해하기 수월해질 겁니다. 밀란 쿤데라는 소설 속 등장인물(티모시, 테레자, 사비나, 프란츠)을 통해 ‘키치’가 인간의 삶 속에 어떻게 드러나는지 보여줍니다. 따라서 등장인물마다 지닌 ‘키치’가 무엇이고, 그 ‘키치’가 각 인물을 어떤 삶으로 이끌어 가는지 찾아가면 책을 이해하기 한결 수월하실 듯합니다.
또 하나는, ‘인간’ 그리고 ‘나’를 이해하는 새로운 도구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인류는 ‘직진하는 시간’ 위에 ‘키치’라는 성을 지었습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키치’라는 성 안에 살고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모든 인간은 ‘키치’와 ‘직진하는 시간’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는 독자님이 느끼는 온갖 행복과 즐거움이 ‘키치’와 ‘직진하는 시간’에서 온다는 뜻이고, 동시에 독자님이 느끼는 온갖 불행과 괴로움 또한 ‘키치’와 ‘직진하는 시간’에서 온다는 뜻입니다.
‘영원회귀’란 우리가 이미 겪었던 일이 어느 날 그대로 반복될 것이고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된다는 니체의 사상입니다. ‘영원회귀’는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일상을 떠올리게 합니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루틴이 영원히 반복되는 세계라면 얼마나 지루할까요? 무의미, 매너리즘, 반복되는 굴레 등의 표현이 떠오르는 이 세계는 ‘영원회귀’의 세계입니다.
밀란 쿤데라는 ‘영원회귀’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직진하는 시간’을 사용하는데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속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인간의 시간은 원형으로 돌지 않고 직선으로 나아간다. 행복은 반복의 욕구이기에, 인간이 행복할 수 없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p.483
인간의 시간은 원형으로 돌지 않고 직선으로 나아갑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고 창조함으로써 성장하는 미래를 꿈꿉니다. 오직 인간만이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기도 합니다.
‘직진하는 시간’ 위에 인간은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고 창조합니다. 이때 인간은 무엇을 창조할까요? 바로 ‘키치’입니다.
‘키치’란 쉽게 말해 ‘그래야만 한다’입니다. 인간은 ‘그래야만 한다'를 창조합니다. 예를 들어 특정 종교에 속하려면 특정 종교 속 ‘그래야만 한다’를 따라야 합니다. 특정 국가에서 살려면 특정 국가 속 ‘그래야만 한다’를 따라야 합니다. 모든 종교와 국가는 고유한 '그래야만 한다'를 창조한 결과입니다.
‘키치’의 관점으로 본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일까요?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입니다. 민주주의 국가란 다양한 키치가 공존하여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나라입니다. 대한민국은 크게 보수라는 키치와 진보라는 키치가 공존하는 나라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 하나의 키치가 모든 권력을 쥐고 있는 국가를 전체주의 국가라고 합니다.
우리는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키치’ 안에 태어납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그래야만 한다’ 속에 태어난다는 말인데요. 법, 규범, 도덕, 상식 등과 같은 것들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자기 만의 ‘키치’를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나는 노래로 사람들을 위로하는 가수가 될 거야.’ ‘나는 부자가 돼서 일하지 않는 삶을 살 거야.’ ‘나는 동시에 여러 명의 이성과 교제할 거야.’ 같은 것들, 가치관 말입니다.
개인을 기준으로 두 가지의 키치가 있는 셈입니다. 하나는 누군가 만들어 놓은 외부의 키치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내면에서 나오는 내부의 키치입니다. 외부의 키치는 무언가 강압적인 냄새가 나고, 내부의 키치는 무언가 자유로운 냄새가 납니다. 하지만 우리는 외부의 키치와 내부의 키치, 둘에게 지배당하는 셈입니다. 우리는 결코 키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는 굉장히 특별한 인물이 한 명 등장합니다. 티모시와 테레자 부부가 키우는 반려견 ‘카레닌’입니다.
카레닌은 매일 아침 주인들보다 먼저 일어납니다. 주인들이 깨기 전까지는 조용히 기다리다가 알람이 울리는 순간 침대 위로 뛰어올라 주인들을 마구마구 핥습니다. 마치 처음인 것처럼, 혹은 마지막인 것처럼, 더없이 순수한 기쁨으로 주인들을 깨웁니다. 카레닌은 테레자와 함께 아침 산책을 나서고 돌아올 때는 입에 크루아상을 하나 물고 옵니다. 집에 돌아와 티모시와 빵 쟁탈전을 치르고 나면 카레닌의 아침 루틴이 끝납니다.
카레닌은 24시간을 기준으로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보내지만 무의미, 지루함, 권태감, 불행, 괴로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오히려 매일매일 순수한 행복을 느낍니다. 카레닌의 시간은 원형이며, 카레닌은 ‘영원회귀’하는 삶을 삽니다.
원형의 시간 속에서는 키치랄 게 없습니다. 키치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창조한 ‘그래야만 한다’입니다. 그런데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내일이라면? 그런 시간 속에 옳고 그름, 우월과 열등, 좋고 나쁨이 다 무슨 소용일까요?
카레닌의 시간이 원형이듯 동물, 식물, 어쩌면 인간을 제외한 모든 존재의 시간은 원형입니다. 다만 카레닌의 시간에도 변화가 찾아오는데 오직 ‘육체’ 때문입니다. 어리고 연약한 육체가 성장하며 카레닌의 일상이 달라지다가 성견이 되면 반복되는 일상을 누립니다. 하지만 육체가 노쇄하며 카레닌의 일상이 흔들리기 시작하고 결국 끝을 맞이합니다. 동물의 시간은 오로지 ‘육체’가 좌지우지합니다.
반면 인간의 시간은 직선입니다. 그 작은 차이가 인간을 위대하게 그리고 가엽게 만듭니다. 인간은 직진하는 시간 위에서 키치를 창조하여 더 나은 미래를 꿈꾸고, 그 덕분에 엄청난 문명을 이루어냅니다. 반면 인간은 꿈꾸는 미래를 위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름, 열등, 나쁨이란 딱지를 붙여 괴롭히고 때리고 죽여왔습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시간은 ‘육체’보다 ‘정신’이 좌지우지합니다.
그런데 혹시, 인간의 시간도 길게 보면 ‘영원회귀’ 아닐까요? 인간 한 명 한 명의 시간은 직선이지만 인간이라는 종 전체를 놓고 보면 어떨까요? 과거의 인간들, 현재의 인간들, 미래의 인간들, 기술 발전에 따라 겉으로 드러난 모습은 다를지 모르지만 결국 영원회귀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는 ‘영원회귀’ 속에 사는 카레닌과 ‘키치’ 속에 사는 인간들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주요 핵심 인물인 티모시, 테레자, 사비나, 프란츠는 각각 다른 극단적인 키치 속에 살아갑니다. ‘신성모독의 짜릿함’이라는 키치를 추구하는 티모시, ‘고유한 육체’라는 키치를 추구하는 테레자, 모든 키치를 거부하고 싶었으나 그렇지 못한 사비나, 역동성이란 키치를 추구하는 프란츠까지.
밀란 쿤데라는 각 인물들의 삶을 극단으로 몰아갑니다. 그 과정에서 어떤 인물은 자신의 키치를 부정당하고, 어떤 인물은 잠깐이나마 키치를 잃어버리고, 어떤 인물은 키치를 끝까지 부여잡고, 어떤 인물은 키치랄 게 없다는 걸 깨닫습니다. 그 과정에서 몇몇은 키치가 사라지는 듯한 순간을 경험하며 그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느낍니다.
밀란 쿤데라는 존재란 본래 가벼운 거라 말하고 싶은 건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존재의 가벼움을 참지 못합니다. 이미 우리는 키치에 지배당하고 있으며, 키치 없는 삶을 상상하지 못합니다. “뭐? 내 아름다움이 없는 거라고? 나의 선함이 없는 거라고? 나의 옳음이 없는 거라고? 나의 탁월함이 없는 거라고? 내 삶의 모든 걸 쏟아부었는데? 내 삶이 그토록 가벼운 거라고? 내게 그런 세상은 참을 수 없어. 내게 그런 세상은 필요 없어!”
우리의 시간은 지금도 직진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