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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뚫기 Dec 29. 2023

시간은 없다. 시간에 대한 고찰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카를로 로벨리 지음

어서 오세요. 책을 읽고 소개하는 ‘우물 밖 청개구리’ 우구리입니다.


독자님은 ‘시간’에 대해 고민해 본 적 있으신가요? ‘시간’이란 무엇일까? ‘시간’은 어떻게 흐를까? ‘시간’은 왜 흐를까?


제게 ‘시간’은 너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읽고 난 뒤였습니다.


당신도 그 비밀, 그러니까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 비밀을 강물로부터 배웠습니까?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민음사


싯다르타는 모든 괴로움이 ‘시간이 있다’는 착각 때문이라는 걸 깨닫습니다. 다시 말하면, ‘시간이 있다’는 건 인간이 만들어낸 거짓, 허상이라는 말입니다. 아니 세상에! 믿기시나요? ‘시간’이 없는 거라니!


그런데 공교롭게도 몇 주 뒤,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영원회귀’ 사상을 토대로 밀란 쿤데라가 쓴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연달아 만났습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인간의 시간은 원형으로 돌지 않고 직선으로 나아간다. 행복은 반복의 욕구이기에, 인간이 행복할 수 없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자연의 시간은 원형입니다. 식물과 동물의 세계는 하루 또는 일 년을 주기로 무한히 반복됩니다. 반면 인간이 만들어낸 시간은 직선입니다. 직선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를 구분하고 늘 더 나은 미래를 꿈꿉니다. 그러니까 과거, 현재, 미래라는 구분이 우리가 만들어낸 것, 상상이라는 겁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 헤르만 헤세, 니체, 밀란 쿤데라와 같은 거장들이 마음을 모아 저를 희롱하려고 작정하지는 않았을 텐데. 저만 깨닫지 못한 ‘시간’의 본질? 본모습? 이 있는 걸까요?


오늘 소개할 책은 ‘제2의 스티븐 호킹’이라 평가받는 이론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입니다. ‘시간’ 고민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과학자를 모셔왔는데요. ‘시간’의 본모습이 드러나길 기대하며 책 소개를 시작하겠습니다.


카를로 로벨리,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이중원 옮김, 쌤앤파커스, 2019


1. 시간에 대한 우리의 생각


수도꼭지에서 물이 흘러나옵니다. 일정한 양의 물이 흘러나와 컵 안으로 떨어집니다. 컵에 물이 찹니다. 일정한 속도로 차오르는 물을 보고 있으니 괜히 마음이 편해지고 머리는 비워집니다.


우리는 시간도 비슷하게 흐를 거라고 생각합니다. 일정하게 흐르는 시간 위에 모든 식물과 동물, 그리고 인간이 얽히고설키며 살아갑니다. 이미 흘러가 버린 시간은 과거이고, 지금 흐르는 시간은 현재이며, 앞으로 흐를 시간은 미래입니다. 과거는 결정되었기에 결코 돌이킬 수 없으며, 미래는 아직 결정되지 않아 열려 있습니다.

한국인, 일본인, 미국인, 영국인, 호주인도 같은 시간 흐름 위에 살아갑니다. 우리는 늘 ‘지금’ 살아가며 만나기도 헤어지기도 하지만 결국 함께 늙어갑니다.


그런데 카를로 로벨리는 시간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온통 잘못되었다고 지적합니다.



2. 시간은 유일하지 않다


카를로 로벨리는 ‘시간이 온 우주에서 균일하고 동등하게 흐른다’가 틀렸다고 말합니다. 시간이 중력과 속도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높은 산 아래와 위에서 시간은 다르게 흐릅니다. 지구의 중력과 가까운 산 아래에서 시간이 더 느리게 흐릅니다. 따라서 산 위에 사는 사람이 (차이가 미미할지라도) 더 빨리 늙습니다.


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우주선과 그렇지 않은 지구에서 시간은 다르게 흐릅니다. 빠르게 움직이는 우주선 안에서 시간은 더 느리게 흐릅니다. 따라서 지구에 사는 사람이 더 빨리 늙습니다.


이렇듯 우주에 동일하게 흐르는 시간은 없습니다. 중력과 속도에 따라 시간은 달라지며 따라서 우주에는 수없이 많은 시간이 있습니다. 심지어 미세할지라도 나와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의 시간도 다릅니다. 그렇기에 우주에 적용되는 ‘지금’ ‘현재’라는 개념은 없습니다.



3. 시간의 방향은 일정하지 않다


우리에게 익숙한 시간의 화살표는 과거, 현재, 미래 순입니다. 지나간 과거는 바꿀 수 없습니다. 반면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기에 여러 가능성이 열려 있습니다.


우리의 시간관념이 우주에서도 진리라면 물리학의 모든 방정식 또한 그래야 할 것입니다. 즉 물리학의 모든 방정식에는 시간 변수가 들어 있을 것이고, 이미 일어난 일은 결코 되돌릴 수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뉴턴의 역학 법칙들이나 맥스웰의 전자기 방정식, 아인슈타인의 상대론적 중력의 법칙, 하이젠베르크와 슈뢰딩거, 디랙의 양자역학 법칙, 20세기 물리학의 소립자 법칙 등 그 어떤 방정식도 과거를 미래와 구분하지 않았다. 사건들의 한 시퀀스가 이 방정식들에서 허용된다면, 시간적으로 역행한 시퀀스도 허용된다.

p.33


물리학의 수많은 방정식에는 ‘원인’과 ‘결과’, ‘과거’와 ‘미래’ 구분이 없습니다. 사건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그 규칙성을 기술할 뿐입니다. 또한 과거와 미래를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점에서 가역적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올바른 비유가 아닐 수 있습니다만) 물리학의 수많은 방정식은 ‘조립 설명서’입니다. 부품을 순서대로 조립하여 자동차를 만들었다면, 역순으로 해체하면 다시 부품이 되는 겁니다. 과거(부품)가 미래(자동차)가 되고, 미래(자동차)가 다시 과거(부품)가 됩니다.


우리는 이런 방정식이 가득한 우주에서 살고 있는데, 시간이 사건이라면 과거가 미래로 흘렀다가 다시 과거로 흐르기도 합니다. 따라서 과거와 미래가 서로 대칭적입니다. 시간의 화살표가 한 방향이 아니고 대칭적인 세계, 따라서 과거와 미래라는 표현 자체가 어색한 세계입니다.



4.  우리의 시간관념과 닮은 방정식


대부분의 물리학 이론 방정식에는 시간의 화살표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시간관념처럼 시간의 화살표가 있는 방정식이 있습니다. 열역학 제2법칙 ‘엔트로피 법칙’입니다. 다음은 열역학 제2법칙에 대한 책 속 설명입니다.


에너지(기계, 화학, 전기 혹은 잠재 에너지)는 열에너지로, 즉 열로 전환되어 차가운 사물로 이동하는데, 여기서부터는 특별한 조치 없이는 에너지를 이전 단계로 되돌릴 수 없고, 식물을 자라게 하거나 모터를 돌리기 위해 재사용할 수도 없다. 이 과정에서 에너지는 동일하게 유지되지만 엔트로피는 상승하는데, ‘이것’ 역시 이전으로 되돌릴 수 없다. 이것이 열역학 제2법칙이다.

p.167


한 번 열에너지로 전환된 에너지는 이전 단계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엔트로피가 상승하면 이것 역시 이전으로 되돌릴 수 없습니다. 과거가 미래로 흐르지만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없기에 비가역적입니다. 따라서 엔트로피 법칙은 우리의 시간관념과 닮아 있습니다.


엔트로피 법칙을 조금 더 설명해 보겠습니다. 예전에 김상욱 물리학자님의 책 ⟪떨림과 울림⟫을 읽고 엔트로피 법칙을 ‘특정 경우의 수보다 많은 경우의 수의 일이 쉽게 일어난다’로 정리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물에 잉크 한 방울을 떨어뜨리면 왜 퍼질까요? 잉크 분자들이 뭉쳐 있는 특정 경우의 수보다 물 분자 속에 잉크 분자가 골고루 퍼져 있는 경우의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경우의 수가 많은 쪽으로 흘러가기 마련입니다.


동전 1000개를 수없이 반복하여 던지면 왜 앞 면과 뒷 면이 각각 500개씩 나오는 확률이 제일 높을까요? 앞 면과 뒷 면이 각각 500개씩 나오는 경우의 수가 가장 많기 때문입니다. 경우의 수가 많은 쪽으로 흘러가기 마련입니다.


왜 시간은 한 방향으로만 흐를까요? 예를 들어 큐브의 색이 맞춰진 상태가 ‘과거’ 그렇지 않은 상태가 ‘미래’라고 해봅시다. 색이 맞춰진 큐브를 마구잡이로 섞기 시작합니다. 큐브의 색이 맞춰진 경우의 수는 딱 하나, 큐브의 색이 맞춰지지 않은 경우의 수가 엄청 많습니다. 색이 맞춰졌던 큐브는 점점 더 섞일 뿐 다시 맞춰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시간은 과거(색이 맞춰진 큐브)에서 미래(색이 섞인 큐브)로 흐르며 결코 과거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운이 좋게도 큐브의 색이 딱 맞춰질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즉 운이 좋으면 시간이 과거로 흐를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이때 김상욱 물리학자님은 70억 인구가 각자 큐브를 하나씩 들고 섞기 시작했다고 상상해 보라 말합니다. 모든 큐브의 색이 맞춰진 경우의 수는 딱 하나이지만 큐브의 색이 맞춰지지 않은 경우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납니다. 경우의 수가 많은 쪽으로 흘러갑니다. 따라서 시간이 과거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카를로 로벨리가 질문합니다.


그의 의문은 시간의 두 방향 중, 왜 우리가 과거라고 부르는 한쪽에서만 사물이 정리된 상태에 있었는가였다. 우주라는 거대한 카드 뭉치는 어째서 과거에는 정리되어 있었을까? 과거에는 왜 엔트로피가 낮았을까?

p.40


김상욱 물리학자님의 예시에 같은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왜 과거에만 큐브의 색이 딱 맞춰져 있었을까요? 우주라는 수많은 큐브가 어째서 과거에는 색이 딱 맞춰져 있었을까요?


카를로 로벨리의 답은 이러합니다.


잘 생각해 보면, ‘어떤 구성이든 특별’하기는 하다. 어떤 구성이든 상세한 부분까지 모두 관찰해 보면, 독자적인 방식으로 특성을 부여할 수 있기 때문에 모두 특별하다고 볼 수 있다. 세상 모든 엄마들에게 자신의 아이는 유일하고 특별한 존재인 것처럼.

어떤 구성이 다른 구성에 비해 좀 더 특별하다는 개념은 카드들의 어떤 측면만 봤을 때 의미가 있다.

(중략)

’특수성’의 개념은 세상을 대략적으로, 희미하게 바라볼 때만 만들어진다.

p.41


카를로 로벨리는 생각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과거에 큐브의 색이 딱 맞춰져 있다고 보는 건, 즉 우주의 과거가 특별하다고 보는 건 우리의 관점 때문이라는 겁니다. ‘특별하다’는 말 자체는 인간이 특정 측면에 집중할 때만 사용하는 말이라는 겁니다. 큐브의 색이라는 측면에 집중할 때만 과거의 큐브가 특별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요.


그렇다고 열역학 제2법칙이 허상이라는 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열역학 제2법칙이라는 측면에 집중할 때만 시간의 화살표가 생겨납니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흐름이 생겨납니다. 즉 우주를 ‘온전히’가 아니라 ‘희미하게’ 바라볼 때만 시간의 화살표가 생겨납니다. 우주를 온전히 바라본다면 시간의 화살표는 아주 아주 극히 단편적인 부분일 테니까요.



5. 매 순간 완성자


지금까지 내용을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1. 시간은 유일하지 않다. 우리의 시간은 다 다르다. 따라서 우주에 통용되는 ‘현재’ ‘지금’ 또한 없다.

2. 우주를 희미하게 볼 때만 시간의 화살표가 생긴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화살표는 우주의 극히 일부분이다. 오히려 우주에는 과거와 미래가 대칭적인 모습이 더 많다.


헤르만 헤세, 니체, 밀란 쿤데라에 이어 카를로 로벨리까지. 제가 가지고 있던 시간 개념을 망치로 두들겨 잘게 잘게 부수는 듯합니다. 그리고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으로 자꾸만 회귀하게 됩니다.


‘영원회귀’란 우리가 이미 겪었던 일이 어느 날 그대로 반복될 것이고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된다는 니체의 사상입니다. 어쩌면 우주에는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과 닮은 모습이 훨씬 많은 게 아닐까요? 혹시 우리는 자아가 만든 ‘시간은 흐른다’는 착각 속에서 상상의 행복과 불행에 빠져 있는 건 아닐까요?



시간에 대한 고민 끝에 제 사전에 ‘인간스럽다’는 말이 추가되었습니다. 대비되는 말은 ‘자연스럽다’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자연스럽다’는 건 영원회귀, 즉 원형의 시간을 지닌 세계에 속하는 말입니다. 이 세계에 가장 어울리는 말은 ‘때가 되면’입니다. 때가 되면 일어나고, 때가 되면 밥을 먹고, 때가 되면 일하고, 때가 되면 쉬고, 때가 되면 자는. 자연의 호흡에 맞추어 일어나는 일들에 ‘자연스럽다’는 말을 할 수 있을 듯합니다.


자연스러운 세상에서는 어제가 오늘이 되고, 오늘이 내일이 되기도 합니다. 또는 작년이 내년이 되기도, 내년이 작년이 되기도 하겠지요. 원형으로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반복되는 모든 것들에 ‘자연스럽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면 ‘인간스럽다’는 건 직선의 시간을 지닌 세계에 속하는 말입니다. 이 세계에 가장 필요한 말은 ‘더 나아질 거야’입니다.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질 거야. ‘더 나아질 거야’라는 생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에 ‘인간스럽다’는 말을 할 수 있을 듯합니다.


인간스러운 세상에서 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오늘입니다. 과거는 결코 되돌릴 수 없으며 미래는 무수한 가능성으로 열려 있습니다. 미래의 핵심은 ‘더 나아질 거야’라는 ‘희망’입니다. ‘희망’의 부재는 사실상 죽음을 뜻합니다. ‘늙어서는 추억을 먹고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더 이상 희망을 품을 수 없을 만큼 늙으면 우리는 희망에 가득 찼던 시절을 그리워하며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우리는 인간입니다. 강아지는 강아지스럽게, 고양이는 고양이스럽게 살아야 행복하듯 인간은 인간스럽게 살아야 행복하겠지요. 그럼 인간스럽게 산다는 건 무엇일까요? 인간스럽게 산다는 건 희망을 품고 사는 게 아닐까요? 어제보다는 오늘이,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나아질 거란 희망.


하지만 인간스럽게 산다는 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인간스러운 사회는 끊임없이 우리의 부족한 점을 지적합니다. 부족한 점을 채우라고, 더 나은 사람이 되라고 주문합니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삶보다 돈이 돈을 버는 삶을 만들라고 강조합니다. “너는 부족해! 더 채워야 해! 그렇지 않으면 너는 불행할 거야!”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게 있습니다. 인간 또한 자연의 일부라는 점입니다. 자연 위에 인간이 있는 게 아니라 자연 아래에 인간이 있습니다. 자연에서 동떨어진 인간스러움은 우리를 병들게 합니다. 우리에게는 인간스러운 삶 이외에 자연스러운 삶 또한 필요합니다.


잠깐 인간스러운 삶을 내려놓고 자연스러운 삶으로 돌아와 보세요. 자연과 우주는 우리에게 ‘더 나아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때에 맞게’ 살라고 말합니다. 자연과 우주는 우리에게 ‘부족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지금 그대로 온전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매 순간 완성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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