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
어서 오세요. 우물 밖 청개구리의 삶을 꿈꾸는 우구리입니다. 최근 제가 이런저런 일로 바쁘다 보니 오래도록 우물을 비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이고, 저번에 찾아오셨다가 그냥 돌아가셨다고요? 꾸벅. 죄송합니다. 방학 시즌을 맞아 휴가를 다녀왔냐고요? 하하하, 아닙니다. 뭐 제가 교사 개구리다 보니 방학을 맞이한 건 맞습니다만 방학 맞이 캠프를 운영하느라 방학 전보다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평소 하지 않았던 일을 하려다 보니 손이 많이 가더라고요. 또 방학을 맞이하여 아내의 육아 부담도 덜어주다 보니 남은 시간은 틈틈이 책만 읽었습니다.
손님은 어떤 한 주를 보내셨나요? 바쁘셨나요? 아니면 특별한 일 없이 평범한 한 주를 보내셨나요? 속상한 일이 가득하셨나요? 아니면 즐겁고 기쁜 일이 가득하셨나요? 아참, 무엇보다, 자유로우셨나요?
종종 기둥에 고정된 목줄 신세인 개를 볼 때면 가슴이 턱턱 막힙니다. 기둥을 중심으로 1~2m 반경이 세상의 전부인 삶. 근처를 지나갈라치면 꼬리를 바짝 세우고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사정없이 짖어야 하는 삶. 제 가슴은 불안하게 콩닥콩닥 뛰면서 동시에 연민의 눈물로 가득 찹니다.
시골에 놀러 갔던 때였습니다. 그 시골에는 펜션 사업을 하는 분이 있었는데, 굉장히 넓은 땅을 가지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분도 개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안전 때문이었는지 그 개도 목줄 신세였습니다. 하지만 목줄은 기둥에 고정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대신 백여 미터나 되는 긴 줄에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개는 긴 줄에 연결된 1~2m의 목줄 덕분에 직선으로 백여 미터를 질주할 수 있었습니다.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개를 보며 저는 자유를 느꼈습니다.
한 주간 니코스 카잔차키스 선생님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었습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내 목에도 보이지 않는 목줄이 달려있는 게 아닌가?
『그리스인 조르바』 책에는 주인공의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주인공이 작가 선생님 자신인 듯하여 저는 주인공의 이름을 카잔차키스라고 하겠습니다. 카잔차키스는 진정한 자유, 진정한 해방을 갈구합니다. 달리 말하면 카잔차키스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구속되어 있습니다. 그의 목에는 보이지 않는 목줄이 걸려 있는 셈입니다.
카잔차키스는 젊고, 돈도 있고, 건강한, 부족한 게 없는 30대 남자입니다. 누군가의 노예도 아니고, 누군가의 피고용인도 아닙니다. 오히려 조르바를 고용하는 고용주입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자유롭지 못할까요? 무엇에 구속되어 있을까요?
카잔차키스를 구속하는 건 자신의 육신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육신은 단지 병이며 죄악이며 늙음이며 죽음이다.’라는 자신의 생각입니다. 그는 육신의 욕망에 사로잡혀 온갖 더러운 일을 저지르는 인간의 삶에서 벗어나고자 붓다와 하느님의 가르침에 귀 기울입니다. 카잔차키스는 자신이 가진 육신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억압하며, 고독하고 성스러운 영혼의 목소리에 도달하려 애씁니다. 그래서 카잔차키스는 늘 책에서 구원을 찾습니다.
어느 날 카잔차키스는 친구에게 책벌레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 말에 꽂힌 카잔차키스는 자신의 삶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거를 어렴풋이 깨닫고 붓다에서 벗어나기로 다짐합니다. 책을 읽고 고민만 하는 삶에서 벗어나 인간과 직접 부딪치며 실행하는 삶에 자신을 던지기로 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고향 크레타에 갈탄광을 하나 얻어 자신의 전재산을 투자하고, 그 길에 조르바라는 그리스인을 만나 고용합니다.
카잔차키스가 머리로 사는 사람이라면 조르바는 육신으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조르바는 나이 예순이 넘은 노인이지만 겉으로 보기에 망나니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조르바는 자신에게는 악마가 살고 있으며 자신은 악마가 말하는 대로 산다고 말합니다. 배가 고프면 먹고, 술이 끌리면 술을 마시고, 자고 싶으면 자고, 여자를 안고 싶으면 여자를 안습니다.
그러나 조르바의 육신과 영혼은 서로 싸우지 않았습니다. 그의 육신과 영혼은 조화로운 하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여자와 빵과 물과 고기와 잠 등 모든 것은 그의 몸과 행복하게 결합하여 조르바를 이루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조르바의 말에는 늘 영혼이 담겨 있었습니다. 반면 카잔차키스의 말은 공허했습니다. 그런 카잔차키스에게 조르바는 종종 이런 말을 던집니다.
아, 우리 불쌍한 두목, 사람들은 아주 푹 가라앉아 있어요. 제기랄! 몸은 벙어리가 만들어 버리고 주둥이만 나불거리고 있어요. 하지만 주둥이라는 게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요? 주둥이가 당신한테 뭘 알려 줄 수 있어요?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2009), 109
그래요, 당신은 그 잘난 머리로 이해라는 걸 합니다.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겁니다. <이건 옳고 저건 그르다, 이건 진실이고 저건 아니다, 그 사람은 옳고 딴 놈은 틀렸다…….> 그래서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당신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나는 당신 팔과 가슴을 봅니다. 그래, 팔과 가슴이 뭘 합니까? 침묵한다 이겁니다. 한마디도 하지 않아요. 흡사 피 한 방울 흐르지 않는 것 같다 이겁니다. 그래, 무엇으로 이해한다는 건가요? 머리로? 웃기지 맙시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2009), 320
카잔차키스는 조르바를 보며 꿈을 꿉니다. 자유로운 삶, 해방된 삶. 육신과 영혼이 싸우지 않는 삶. 육신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억압하지 않는 삶. 육신과 영혼이 조화를 이루는 삶을 꿈꾸며 다음과 같이 다짐합니다.
내가 선택하는 길은 사뭇 달라질 것이다. 내 모든 감각을 완벽히 단련함으로써, 또한 온몸도 그렇게 함으로써 몸이 즐기고 몸이 이해하게 하리라. 달리기를 배우고, 씨름을 배우고, 수영을, 승마를, 조정을, 운전과 사격을 배우리라. 내 영혼을 육신으로 채우리라. 내 육신을 영혼으로 채우리라. 그리하여 마침내 저 영원한 두 적대자가 내 안에서 화해하게 만들리라.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2009), 111
그러던 어느 날, 카잔차키스는 운명의 상대와 마주합니다. 숱 많은 머리채를 어깨까지 늘어뜨리고 검은 치마를 무릎까지 걷어올린 채 빗속을 달려가는 그녀, 탄탄하고 둥그스름한 몸매가 비에 젖어 달라붙은 옷 위로 드러나 고혹적인, 과부 소멜리나였습니다.
카잔차키스는 그녀를 맹수로 인식합니다. 나긋나긋하지만 사내를 잡아먹는 동물. 카잔차키스의 육신은 그녀를 갈망하지만, 카잔차키스의 머리는 그녀에게서 멀어지라 말합니다. 육신의 욕망은 죄악이란 목소리가 카잔차키스를 다시 뒤덮습니다.
이를 알아챈 조르바는 카잔차키스에게 어서 과부에게 가라고 재촉합니다. 간단한 형식치레, 즉 개수작을 부리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알려줍니다. 그렇게 어렵지도, 그렇게 많은 돈이 들지도 않는 방법이었습니다. 카잔차키스는 속으로 인정합니다. 조르바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과부를 안을 수 있다는 걸 압니다. 하지만 카잔차키스는 다시 부처와 하나님을 생각하며 육신의 목소리를 끝내 무시합니다.
덧없이 시간이 흘러 부활절을 맞습니다. 마을에는 희생된 양고기와 술로 사랑의 노래가 가득했고, 카잔차키스는 육신으로 영혼을 채우리라는 다짐과는 다르게 여전히 고독하고 성스러운 영혼의 목줄, 붓다와 하나님의 목줄을 차고 있었습니다. 조르바와 카잔차키스도 양고기와 술로 배를 채웠고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점차 술기운이 오른 조르바는 여전히 목줄을 차고 있는 카잔차키스에게 소리쳤습니다.
물 찬 제비 같은 여자가 지나가는 걸 보면 당신 가슴도 뛸 겁니다. 그런데 갑자기 땅이 갈라지고 이 여자가 사라져 버립니다. 어디로 갔을까요? 누가 이 여자를 데려갔을까요? 행실이 참한 여자라면 사람들이 <하느님이 데려가셨다>라고 할 거고, 행실이 걸레 같은 여자라면 사람들이 <악마가 데려갔다>고 할 겁니다. 하지만 두목, 몇 번이나 말했지만 다시 말하건대, 하느님이나 악마는 하나고, 똑같은 거예요!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2009), 339
조르바는 이 말을 던지고 육신의 목소리, 춤을 추기 위해 마을로 걸어가 버립니다. 한동안 멀어져 가는 조르바의 발소리를 듣던 카잔차키스는 갑자기 벌떡 일어섭니다. 그의 몸이 그의 머리와 상관없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조르바의 목소리를 되뇌며 계속 걸었습니다.
바다, 여자, 술, 그리고 맹렬한 노동! 일과 술과 사랑에 자신을 던져 넣고, 하느님도 악마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그것이 젊음이란 것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2009), 340
그날, 카잔차키스는 자신의 몸에 과부 소멜리나의 채취를 한껏 머금습니다. 처음으로 육신의 목소리가 세상 앞에 드러나는 날이었습니다. 그는 그날 처음으로 영혼이 곧 육체, 육체 또한 영혼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과부가 학살 당합니다. 마을 사람들이 과부의 목을 잘랐습니다. 말 그대로 칼로 과부의 목을 잘랐습니다. 어처구니없고 이유 같지도 않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마을 청년 중 하나가 과부에게 청혼했다가 퇴짜 맞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청년은 퇴짜 맞은 자신의 신세를 비관하여 자살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과부 소멜리나가, 그 마녀가 청년의 목숨을 앗아갔다고 분노했습니다.
카잔차키스와 조르바는 과부를 구하려 했지만 끝내 과부의 목이 잘리는 걸 바로 눈앞에서 보았습니다. 끔찍하고 비인간적인 사건 앞에서 카잔차키스의 육신은 침묵하고 다시 머리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머리는 끔찍하게 죽은 과부를 멋대로 해석하고 조립하여 재빨리 위험하지 않은 것으로 포장했습니다. 결국 그는 과부를 하나의 상징으로 만들어 자신의 기억 속에 조용하고 평화로운 것으로 자리하게 합니다.
반면 조르바는 분노했습니다. 갈탄광에서 자신이 다루는 인부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욕지거리를 해댔습니다. 말을 안 듣는 인부 셋을 해고했고, 손수 곡괭이질에 몰두했습니다. 이미 자기 위안 단계에 이른 카찬차키스가 과부 이야기를 하려 했지만 조르바는 손바닥으로 카잔차키스의 입을 막아버리며 말했습니다.
“닥쳐요!”
그 뒤에 카잔차키스와 조르바의 갈탄광 사업도 폭삭 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오히려 카잔차키스는 그 과정에서 자유로움을 느낍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처지가 되어서야 비로소 그는 모든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를 만끽합니다. 그는 다시 육신의 목소리가 이끄는 대로 걷고, 느끼고, 생각합니다. 그는 자신의 내부에서 깨어나는 영혼을 느낍니다. 마치 우주의 진리를 직접 느낄 수 있는 지상 최초의 인간이 가졌던 그런 영혼을.
잠깐의 낮잠. 깨어난 영혼 때문인지 카잔차키스는 불길한 꿈을 꿉니다. 깜짝 놀라 잠에서 깬 그는 친구의 불길한 소식, 친구의 죽음을 느낍니다. 하지만 카잔차키스는 친구의 죽음, 거대한 확신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거대한 공포 앞에 다시 그의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머리는 과부의 학살을 하나의 상징으로 만들어버렸듯 이번에도 친구의 죽음이란 낯선 공포를 친숙한 생쥐의 모습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카잔차키스는 더 공부하기 위해 조르바와 이별을 선택합니다. 아직도 책이란 게 별로 좋은 게 아니라는 걸 모르겠냐는 조르바에 말에 카잔차키스는 답합니다.
알고 있어요, 조르바, 당신 덕택에. 하지만 나도 당신 방법을 써볼 거예요. 당신은 버찌를 잔뜩 먹어 버찌를 정복했으니 나는 책으로 책을 정복할 참이에요. 종이를 잔뜩 먹으면 언젠가는 구역질이 날 테 지요. 구역질이 나면 확 토해 버리고 영원히 손 끊는 거지요.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2009), 425
카잔차키스는 잠깐의 육신과 영혼의 조화를 경험하고 나서 다시 책벌레의 삶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합니다. 끝내 그는 다시 육신과 영혼이 대립하는 삶으로, 팔과 가슴이 침묵하는 세계로 돌아가려 합니다. 조르바는 자신의 소중한 친구, 카잔차키스의 선택을 저주합니다.
아니요. 당신은 자유롭지 않아요. 당신이 묶인 줄은 다른 사람들이 묶인 줄보다 좀 길 거예요. 그것뿐이요. 두목, 당신은 긴 줄 끝에 매달려 있으니까, 이리저리 다니고, 그리고 그걸 자유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당신은 그 줄을 잘라 버리지 못해요. 그런 줄은 자르지 않으면…….
언젠가는 자를 거요!
두목, 어려워요, 아주 어렵습니다. 그러려면 당신한테는 무식이 좀 필요해요. 무식, 아시겠어요? 모든 걸 걸고 도박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머리가 힘이 세니까 항상 그 머리가 당신을 이겨 먹을 거라고요. 인간의 머리란 구멍가게 주인과 같은 거예요. 계속 장부에 적으며 계산을 해요. 얼마를 지불했고 얼마를 벌었으니까 이익은 얼마고 손해는 얼마다! 머리란 아주 좀상스러운 소매상이지요. 가진 걸 몽땅 거는 일은 절대 없고 꼭 예비로 뭘 남겨 둬요. 머리는 줄을 자르지 않아요. 아니, 아니지! 오히려 더 단단히 매달려요, 이 잡것은! 붙잡고 있던 줄을 놓치기라도 하면 머리라는 이 병신은 그만 허둥지둥하다가 완전 끝장나 버려요. 그런데 사람이 이 줄을 끊어버리지 않으면 산다는 게 무슨 맛이겠어요?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2009), 425
긴 줄에 연결된 목줄 덕분에 백여 미터를 전력질주 할 수 있는 개. 저는 그 개를 보고 자유로움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기둥에 묶인 목줄 신세보다 자유로울 뿐 결국 목줄 신세라는 건 변하지 않습니다. 목줄 신세가 꼭 나쁜 건 아닙니다. 무엇보다 먹을 걱정, 추울 걱정 없이 살 수 있습니다. 주는 대로 먹고 자고, 매번 똑같지만 나름 뛰놀 수도 있습니다.
목줄 신세인 개와 저의 삶이 닮았습니다. 시키는 대로 먹고, 자고, 공부하다 보니 시키는 대로 사는 개구리가 되었습니다. 덕분에 교사가 되어 시키는 대로 가르치고, 시키는 대로 일을 합니다. 공무원이란 시키는 대로, 매뉴얼대로 사는 직업이다 보니 종종 제 목소리를 내려하면 타박받기 십상입니다. 대신 덕분에 먹을 걱정, 추울 걱정 없이 살 수 있습니다. 제 목에 달린 목줄의 대가입니다.
저는 개구리이지만 종종 목줄이 답답합니다. 그런데 이 목줄을 벗어던질 용기도, 능력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책벌레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목줄을 찰 수 있었던 건 하루에 네 시간씩 자며 책을 달달 공부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카찬차키스처럼 머리가 힘이 센 사람입니다. 자고 싶다, 먹고 싶다, 놀고 싶다는 제 육신의 목소리를 늘 억누르며 살아왔습니다. 제 육신으로 부딪쳐 노동을 해본 적도, 제 육신으로 부딪쳐 도전해 본 적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저의 말에는 영혼이 없으며, 제 팔과 가슴은 늘 침묵합니다. 저는 스스로 목줄을 쟁취했으며, 이제는 스스로 목줄을 끊어낼 수도 없는 개구리입니다.
조르바는 기쁨이 넘치거나 슬픔이 넘쳐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울 때, 춤을 춥니다. 그가 춤을 춘다기보다 그의 몸에서 춤이 터져 나온다는 게 더 적절한 듯합니다. 그의 말이 부족하다기보다 말로는 담아내지 못하는 게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너무 기뻐서 표현하고 싶은데 말로는 부족하고 몸이 달달 떨려 올라옵니다. 그런데 그 순간 “경거망동! 꾸짖을 갈!”하며 제 머리가 제 몸을 억누릅니다. 사실 제 머리가 꾸짖지 않아도 제 몸이 어떻게 표현할지 몰라 식어버리기도 합니다.
저, 춤을 배우고 싶습니다. 자유롭고 싶습니다. 머리로는 목줄을 끊어낼 재간이 없습니다. 조르바의 말처럼 머리는 오히려 목줄을 더 단단하게 할 듯합니다. 제 육신의 목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그동안 목줄을 차느라 소외되었던 제 육신의 목소리가 세상 앞에 드러나게 하고 싶습니다. 저, 춤을 배우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