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올로기와 자유인 (2/3)

『두 사람이 걷는 법에 대하여』

by 책뚫기

인권은 ‘인간이라면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권리’라고들 말합니다. 따라서 ‘사람은 태어난 그 자체로 존엄하다’고 말합니다. 지능이 높든 낮든, 키가 크든 작든, 재산이 많든 적든, 권력이 많든 적든, 사람은 누구나 존엄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러한가요? 지능이 낮으면 바보라고 놀림받고, 키가 작으면 난쟁이라고 놀림받습니다. 돈이 없으면 자녀들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적고, 돈이 없는 집에 태어나면 부모님과 놀 수 있는 시간이 적습니다. 권력이 없으면 늘 권력 앞에 고개 숙여야 하고, 권력이 없는 집에 태어난 아이들은 자존심 죽이는 법을 배웁니다.


우리는 늘 인간의 존엄과 인간 공동체의 위엄이 지켜지길 바라지만, 한편으로는 존엄과 위엄을 약자들의 투정이라며 깔보기도 합니다. 존엄과 위엄을 깔보는 생각이 극단으로 가면 우생학처럼 인간을 우월한 사람과 열등한 사람으로 나누고, 많은 대중들이 그 생각에 동조하여 열등한 사람을 차별하고 거세하기에 이릅니다.


이는 마치 학교 폭력의 한 장면과도 비슷합니다. 가해자가 반에서 대놓고 피해자를 때리는데, 말리는 아이가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아이들이 그 폭력 장면을 묵인하고, 심지어 몇몇 아이들은 ‘피해자가 맞을 만하니까 맞는 거지!’하며 적극적으로 동조합니다.


존엄과 위엄을 무너뜨리는 악. 악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l 악의 근원, 사유하지 않음


한나 아렌트는 나치 정권하에서 비밀경찰로 악명 높았던 아이히만의 재판을 취재했습니다. 아이히만은 나치 제국의 거대한 범죄 속에서 수많은 유대인들을 추방하고 수송하고 학살한 죄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법정에서 아이히만은 ‘자신은 행정관료의 한 사람으로서 그저 그 일을 수행한 것에 불과했다.’고 변명할 뿐이었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재판에서 아이히만이 사용한 어휘들을 분석했습니다. 관료들이 업무를 처리할 때 사용하는 단어, 구호, 관용어구만 반복되는 걸 확인했습니다. 대학살이라는 엄청난 실행 앞에 고민하여 짜낸 새로운 어휘나 표현들은 전혀 없고, 시키는 대로 했다는 아이히만 말의 진정성(?)을 확인했습니다. 즉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사유’ 없이 일을 했을 뿐이라고 결론 지었습니다.


한나 아렌트의 지적에 따르면 ‘악’은 엄청난 실체가 아니라 평범한 이들의 일상에서 자라납니다. 그리고 변상욱 님은 평범한 이들의 일상에서 ‘악이 자라나는 세 가지 조건’을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첫째는 제대로 생각하지 못하는 생각의 무능성, 둘째는 아니면 아니라고 설명하지 못하는 말의 무능성, 그리고 상대의 입장이 되어 보지 못하는 관점의 고착이다. 이 세 가지가 묶이면 ‘사유’하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변상욱, 두 사람이 걷는 법에 대하여, (멀리깊이, 2021), 159


제대로 생각하지 못하면, 아닌 걸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면, 상대의 입장이 되어 보지 못하면 악이 자랄 수 있습니다. 사유하지 못하면 악이 자랄 수 있습니다.


변상욱 님은 이어서 질문합니다. ‘누구는 사유하는데 누구는 사유하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똑같이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라 비슷한 학교 교육을 거쳤는데, 왜 누구는 사유하고 누구는 사유하지 못하는 걸까요?


변상욱 님은 그 차이를 ‘이데올로기를 알아차렸는가?’에서 찾습니다. 이데올로기가 사유할 능력을 거두어 가고 사유하고 싶지도 않게 만들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데올로기는 선과 악,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권장해야 할 것과 처단해야 할 것을 명확하게 제시합니다. 따라서 이데올로기 안에서는 사유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데올로기는 세상을 이미 정해두었습니다. 그 속에서 사람은 인정받기 위해 해야 할 일을 실천하기만 하면 되고,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을 무시하거나 공격하기만 하면 됩니다. 따라서 이데올로기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이데올로기가 시키는 대로 살면 사유할 필요가 없습니다.


출처: Unsplash의 Markus Spiske


l 자유인의 정신


이데올로기의 훌륭한 톱니바퀴에서 벗어나 사유하는 자유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지난 글에서 언급했듯이 가장 먼저 저에게 영향을 준 지배 권력과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은 지배 권력과 이데올로기에 감춰진 소중한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전장에서 무엇이 최선인 지 모르겠으면, 적이 가장 싫어하는 일을 하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데올로기를 알아차리는 최선의 방법을 모르겠으면, 이데올로기가 감추려고 하는 것을 보아라.’라고 바꿔 말해볼 수 있을 듯합니다. 이데올로기에 빠져 있으면 보지 못하는 인간적인 무언가, 저와 함께 그 무언가를 생각해 보시면 어떨까요?



ll 혼자 피는 꽃은 없다


우종영 님의 『나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를 읽고 나서 ‘한 분야에 통달한 대가’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대가들의 공통점은 ‘관계와 시간을 보는 눈’입니다. 나무 한 그루를 이해하기 위해 흙, 곤충, 새, 햇빛, 바람, 나아가 주변의 다른 나무들까지 관찰하고 판단합니다. 나아가 그 모든 것들의 과거를 들여다보고 미래를 내다봅니다.


그래서인지 대가들은 하나같이 겸손함 냄새를 풍깁니다. 자기 한 몸과 한 마음이 지금까지 살아온 데에는 수많은 것들의 도움이 있었다는 걸 알기 때문인 듯합니다. 반면 저는 제 한 몸과 한 마음이 지금까지 살아낸 데에는 오롯이 저의 노력이 어마어마했다는 걸 인정받고 싶습니다. 그래서 제게는 오만함 냄새가 풍깁니다. 수많은 것들의 도움이 있었다는 걸 머리로는 알겠는데, 마음 깊이 올라오는 감사함이 없습니다.


내 등에 얹어진 십자가의 무게만 힘겹게 느끼며 걸었지, 함께 짊어지고 가는 이들을 돌아보지도 못했다. 꽃은 그렇게 저만 피는 것이 아닌 것을. 가장 어둡고 차가운 곳으로 파고들어야 하는 가장 여린 몸의 뿌리, 흔들리며 버티는 줄기, 생채기 나도록 일하는 잎들이 저마다 꽃이었음을 생각하며 나를 돌아본다.

변상욱, 두 사람이 걷는 법에 대하여, (멀리깊이, 2021), 6


출처: Unsplash의 MIO ITO


3편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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