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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통 Jul 18. 2023

'인생 책' 대신 '첫 책'을 말하는 이유

굳이 인생 책을 한 권 뽑을 필요도 없으니까.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뭐든 당차게 말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편이다. 내가 수줍어서 그런 것은 아니고, 뭐랄까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잘 아는 게 맞나? 라는 질문이 끊임없이 머리를 맴돌기 때문이다. 전문성을 바란다기보다는 뭐든 제대로 ‘알고’ 보고 싶어 하는 성향이 약간 꼬여서 그런 것 같다. 그래서 내가 받는 질문 중 가장 회피하는 질문은 이거다.


‘인생 책’이 있나요?


있겠지. 근데 그걸 하나만 골라서 설명할 자신이 전혀 없다. 그때 읽은 것보다 좋은 책이, 좋아질 책이 얼마나 많은데 그걸 함부로 고르나. 그래서 내가 회피하고 이야기하는 것은 ‘첫 책’이다. 언젠가 별로일 수도 있는 책이 될 수 있지만, 적어도 근 15년간은 좋으니까. 아직도 종종 찾아보는 책이다.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     


이 책을 왜 그리 좋아하고 있나 생각해보았다. 처음 읽었을 때는 판타지 자체가 정말 재밌어서였지만, 고등학교를 넘어 대학교 때까지 종종 읽을 때마다 생각이 꽤 크게 달라지는 계기가 되었다. 판타지에 철학 개념을 녹여내는 게 이영도 작가의 작품의 호불호가 갈리는 이유라지만, 나는 극호에 가깝다.     


어렸을 때는 왜소하고, 어물쩍거리고 말도 못 하던 (심지어 왕따까지 당했던) 내가 왜 이리 말 많은 사람이 되었을까, 적어도 저 책을 읽고 난 직후는 아니다. 다만 ‘라자’ 말하는 자가 강조되는 저 책이 계속해서 생각이 났다. 일단 대화를 해보라고. 이야기하고, 성장하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니까.     


물론 인생은 소설 속 ‘마법의 가을’처럼 한 계절이 지난다고 보통은 스펙타클하게 바뀌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드래곤 라자>를 내 ‘첫 책’으로 소개하는 만큼, 이게 내가 책을 좋아하게 된 첫 단추라는 것이 참 좋았다. 사람과 대화하고, 책을 읽고, 계속해서 공부하고 배워나가라는 것. 그런 자세를 이 책이 만들어줬던 것 같아서.     

물론 그렇다고 석박사를 당장 할 건 아니지만. 어쨌든, <드래곤 라자> 외에도 좋은 책은 많았다. 그런 책들의 공통점은, 살다가 특정 순간마다 매번 생각난다는 것이다. 문구든, 이야기든 간에, 계속해서 생각나고, 나를 어느 방향으로든 1도씩은 바꿔줬던 책들. 그런 책들이 더 많아졌으면 한다. 굳이 인생 책으로 한 권 뽑는 건 할 필요도 없게.     


덧 1. <드래곤 라자> 속 라자는 그냥 완벽 그 자체라 남들하고 대화할 생각조차 없는 드래곤들과 대화할 수 유일한 사람이다.


덧 2. 이영도를 좋아한다고 이번에 20주년으로 재발행된 <눈물을 마시는 새> 세트를 거하게 질러버렸다. 다른 책도 쌓여서 당장은 못 읽겠지만, 언젠가 읽겠지.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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