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영어교사인 존 키팅은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의술, 법률, 사업, 기술 이 모두가 고귀한 일이고 생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것이지만 시, 아름다움, 낭만, 사랑 이런 것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이란다." _35쪽, 정진우
인류 발전에 있어서 효율성만으로 순위를 따지면 예술은 최하위일 것이다. 학생 시절부터 국어, 수학, 사회, 과학을 주요 과목으로 묶고 나머지는 예체능으로 퉁쳐버렸듯이 말이다. 국어는 집단 안을, 사회는 집단 밖을 단단히 만든다. 수학과 과학은 그 자체로 세상에 발전시키는 힘을 가졌다. 그렇다면 예술 - 음악과 미술, 문학은? 돈만 축내지 뭔가 우리에게 해주는 게 없어 보인다. 효율과 실용을 외치는 시대에, 음악을 하면 딴따라가 되고 문학을 읽으면 한량 취급을 받았다.
대학 시절, 도서관에서 정말 좋아하는 박민규 작가의 소설집을 읽고 있었다. 한 친구가 다가와 두꺼운 전공책을 펼치며 소설을 볼 시간에 토익 단어 하나라도 더 외우라고 나직이 속삭였다. 성실하고 성적도 좋은 친구였다. 아무런 악의 없이 그저 조언을 해준 것이다.
우리는 학점 0.1점을 높이기 위해 재수강을 하고 이력서에 한 줄이라도 더 써넣기 위해 동아리 회장을 자처하거나 마음에도 없는 봉사활동을 하기도 한다. 사회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고 생존하기 위해 발버둥 치던 그때, 말장난 같은 문장이 가득 담긴 박민규의 소설은 분명 사치이고 게으름이었을 것이다.
끝내 알 수 없는 것, 설명을 허락하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정말로 이게 다일까?'라는 질문을 무너뜨릴 것이 필요했다. 그리고 비밀은 언제나 힘이 셌다. 우리는 왜 시를 읽는가? 카렌 블릭센의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는 발목이 가느다란 케냐의 아이들이 시를 읊어달라며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있다.
"또 해주세요. 비처럼 말하는 거요."
나는 시에 대한 모든 말 중에 이 말을 가장 좋아한다. _16쪽, 김하나
가치와 쓸모를 최우선으로 내거는 우리, 이런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과연 누가 문학을 읽고 말할까. 소설은 읽는 동안 재미라도 있지, 시는 재미와는 동떨어져 있다. 혹자는 한 편의 시에 담긴 이야기는 장편소설 한 권으로 풀어놓을 수 있을 정도라고 했다. 그만큼 압축된 글줄이다 보니 재미를 찾기 영 힘들다. 사회는 불확실성과 모호함을 가장 싫어하지 않던가. 아무리 읽어도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시다.
하지만 존 키팅이 말한 것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은 아름다움과 낭만일지도 모르겠다. 필요한 것에 매몰되어 그것이 곧 목적인 양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았을까? 필요한 것을 내치자는 것이 아니다.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그저 삶의 진짜 목적인 아름다움을 - 소설의 순수한 재미, 시의 천진하고 당혹스러운 시선을 비효율의 범주에서 꺼내서 한번 더 들여다보는 것이다. 어쩌면 가성비와 효율의 세계에서 우리 인간은 존재 그 자체로 퇴출 1 순일 런지 모른다.
우리는 매일, 지하철 스크린 도어에서도, 공중화장실의 스티커 메모지 위에서도, 얼마든지 느낄 수 있고, 언제든지 감동할 수 있다. 우리가 마음의 눈을 크게 뜨기만 한다면. 아름다운 시 한 편 가슴 속에 새겨둘 아주 작은 마음의 여백 하나를 만들어 두기만 한다면. _33쪽, 정여울
우리가 어떤 민족입니까. 자동차가 후진할 때마저 '엘리제를 위하여'를 연주하는 민족 아닙니까. 잠시 속도에서 멀어져 뒤쳐진다는 조급함을 버리고 천천히 둘러본다. 가까운 곳에 음악이 있고, 문학이 있고, 미술이 있다. 그리고, 다시 질문을 되뇌어본다. 누가 시를 읽는가.
덧. 릿터 19호에 시에 대한 너무 좋은 글이 많아서 묵혀두었던 시집을 꺼냈다. 김소연의 <수학자의 아침>이다. 아... 어려워서 죽겠네. 역시 세상을 보는 내 눈은 순수함을 잃은 지 오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