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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희 Sep 10. 2020

68. 열 개의 렌즈로 ‘세대’를 보다

인문잡지 한편 1호 세대 / 민음사 / 박동수 외 9명



1-10/200823

열 개의 렌즈로 ‘세대’를 보다

인문잡지 한편 1호 세대 / 민음사 / 박동수 외 9명


책만들기실험실 시즌 3 ‘나를 들여다보는 독서모임’ 두 번째 도서로 이 책을 선택했다. 내가 아닌 멤버 구성원이 추천해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런데도 내용보다는 ‘인문잡지 한편 1호 세대’라는 제목에 더 끌렸다.


이전에는 사고 싶은 책이 있으면 인터넷으로 서너 권씩 몰아서 사곤 했는데 독서모임을 하다 보니 주기적으로 한 권의 책을 사게 된다. 도서 선정을 한꺼번에 미리 한다면 그럴 수 있겠지만 도서 선정을 그때그때 하다 보니 그리 되었다.


최근에 뉴스타파를 통해 택배 노동자의 삶을 들여다보았다. 그 뒤로 인터넷으로 상품을 구입하는 일이 택배를 받게 되는 일이 이전처럼 유쾌하지 않았다. 나의 편리함을 위해 누군가가 간신히 정말 간신히 버티고 있는데 내가 이전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택배를 받는 일이 죄스럽게 여겨진다.


물론 택배 노동자들이 지금처럼 근무 여건이 어렵게 된 것은 나의 잘못이 아닌 시스템의 문제다. 하지만 그 시스템을 바꿀 수 있는 잠재적인 힘이 있음에도 그동안 무관심으로 일관해 왔고 지금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판단과 실천을 유보한 채 상황을 지켜보는 나 자신이 탐탁치 않다. 그러한 탓에 주기적으로 구매하는 책을 인터넷이 아닌 동네책방에서 구입하는 일은 내 마음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가볍게 한다.


내가 동네 책방에서 책을 사는 것이 책방에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더구나 책방에 가서 마음에 드는 책을 구입하는 것이 아닌 내가 원하는 책을 주문해서 구입하는 일은 더 그렇다. 책방에 책이 있으면 다행이지만 책이 없지만 수고스럽게 주문을 하거나 주문을 할 때 나의 주문을 떠올려야 한다.


물론 물건을 파는 입장에서 이 일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수고스럽기보다 반가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책 한 권을 책방에서 구입함으로써 책방이 얻게 되는 이익은 너무나 소소하다. 그래서 주문을 받아 책을 주문하는 일에 대한 노동력이 수고스럽게 여겨진다. 어쩌면 작은 노력이라 할 수 있는 만큼 그로 인해 발생하는 이익 또한 작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도 책방 주인도 그 수고스러운 일을 즐거이 임한다는 사실은 반갑기만 하다. 이 책은 그러한 과정을 거쳐 내게 도착했다.





알록달록 무지개같이 ‘세대’라는 주제에 대해 열 사람이 각자의 시선으로 쓴 글을 모은 책이다. 제목 그대로 한 편으로 이루어진 열 편의 글들이 모여 한 편을 이룬다. 사회학, 역사학, 인류학, 정치학, 인구학, 미학, 철학 등 ‘세대’라는 이 주제에 하나에 이토록 다양한 스펙트럼이 담길 수도 있구나 하는 것을 실감했다.


책의 삼분의 일 가량에 밑줄을 마구마구 쳤을 정도로 내 머리를 맑게 했던 내용이 많았고 내 마음에 쿵-하고 닿아서 나중에 알맞은 때에 인용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문장도 여럿이었다. 밑줄을 치며 한 번 읽고 밑줄 친 내용을 메모하며 다시 읽었다. 그래야 머릿속이 정리가 되어 진짜 읽은 것 같은 느낌이라 대부분의 책을 이렇게 읽는데 이 책은 특히 그랬다.


책을 두 번 읽으면 한 반절은 처음 읽었을 때의 생각을 더 진하게 해주는 느낌이고 한 반절은 처음 읽었을 때의 생각과 두 번째 읽었을 때의 생각이 달라지고 인상 깊은 내용도 달라진다. 이번엔 후자였다. 처음에 읽었을 때보다 두 번째 읽을 때 더 많은 것들이 들어왔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책은 열 사람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은 김영미 ‘밀레니얼 세대에게 가족이란’이었고 가장 재밌게 읽었던 장은 조영태의 ‘밀레니얼은 다 똑같아?’였다. 그밖에 정혜선의 ‘미래세대의 눈물과 함께’, 박동수의 ‘페미니즘 세대 선언’, 고유경의 ‘세대, 기억의 공동체’, 김선기의 ‘청년팔이의 시대’도 유익했다. 그렇다. 대체로 좋았다.



 본문| 10 양자택일보다 중요한 것은 정확한 이해다.


서문에서는 이러한 질문이 등장한다. ‘사람들이 세대를 말할 때 정말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가? 사람들 혹은 우리가 ‘청년’을 말할 때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가?’ 내가 독서모임의 세 가지 주제 중 하나로 ‘청년’을 택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대체 왜 우리는 ‘청년’에 그렇게 열을 올릴까? 단지 ‘우리가 청년이라서’라는 당사자성 하나 때문일까? 그렇다면 그것은 집단 이기주의의 다른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누구나 하나 같이 청년이 중하다’고 이야기하는데 ‘청년이 중한 이유는 무엇이며 지금 청년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우리 스스로 공부하고 생각을 해보자.’하는 마음이었다. 그렇기에 이번 독서모임으로 이 책을 선정한 이유는 서문에서 마주한 이 질문 하나만으로 충분했다.


독서모임과 별개로 나 개인적으로는 이 질문을 시시때때로 ‘다른 분야에 적용하고 활용했으면 좋겠다’ 아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질문은 다름 아니라 ‘진짜 내가 혹은 네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가?’와 같은 말이다. 무언가를 읽고 쓸 때는 물론 이야기를 하거나 들을 때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는 과정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탓이다.





이 책의 첫 한 편에서는 첫 타자답게 ‘세대’를 이해하는 세 가지 접근법을 전달한다. 먼저 실증적 관점에선 소득과 자산의 불평등에 영향을 미치는 객관적인 변수로, 성찰적 접근에선 특정 정치 세력의 ‘세대 프레임’에 의해 전략적으로 활용되고 동원되고 ‘불투명한’ 사회적 구성물로, 비판적 관점에선 단순히 객관적인 현실로도 담론적인 표상으로도 여겨지지 않고 사회의 내적 적대를 꺼내 놓는 정치적 과정이야말로 세대 문제의 핵심이라고 하며 이 세 가지 접근법이 양립할 수 없다고 말한다.


앞전에 읽은 ‘청년팔이 사회’를 읽으며 나는 이게 진실인데 그동안 이 진실을 모르고 있었구나 싶었다. 그런 생각을 했던 나였는데 그것을 하나의 관점으로 이야기하는 이 내용을 마주하니 또 한 번 띵-하며 그동안 내가 너무 이분법적인 논리에 익숙해져 있었음을 깨달았다. 세상이라는 하나의 현실이 있고 그 안에는 옳고 그름의 문제도 있지만 보는 방향에 따라 그 빛깔이 달라지는 프리즘같이 서로 다른 시각이 존재한다.


내가 생각했을 때 이 책의 핵심은 세대가 아닌 ‘시각(관점)’이 아닐까 싶다. ‘세대’라는 이 주제를 이렇게도 저렇게도 바라볼 수 있고 이 열 가지의 시선 중에는 공존할 수 있는 시각이 있는가 하면 공존할 수 없는 시각이 존재하고 서로 평행선처럼 절대 만나지지 않는 이야기도 존재한다. 이 책에서는 어느 한 관점에서만은 존재하지 않고 다양한 관점 속에 존재하는 ‘세대’의 본질을 독자 스스로 인지하게끔 하고 있다.


첫 장의 저자인 박동수는 앞서 말한 이 접근법들의 공통적인 문제로 세대론을 인신록적 틀, 즉 진짜-가짜 또는 실체-현상의 구분을 전제하는 이분법적 틀로만 보려는 데 있다고 지적한다. 각각의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세대론을 사회를 비춰주는 거울, 담론과 욕망이 투사되는 스크린, 적대가 표상되는 자리로 해석할 때 세대 개념은 공허한 개념이 되고 그저 인식 도구로만 정의될 뿐이라고 말한다. 한 마디로 말해 색안경 대신 투명 렌즈를 끼고 좀 더 넓고 큰 눈으로 이미 존재하고 잇는 ‘세대’의 본질을 바라볼 것을 주문하는 듯했다.


본문| 27 철학자들만이 철학을 하고 사회학자들만이 사회학을 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회 구성원들은 각기 독특한 사회적 경험을 하며, 그에 기반을 둔 자전적인 사회학적 성찰을 만들어 가는 자기 삶의 사회학자들이다.



그 뒤로 이어지는 김선기의 ‘청년팔이의 시대’는 아래와 같은 문장들로 요약될 수 있다.


본문| 41 담론과 실재는 순환하며 서로를 강화한다. 46 세대주의는 많은 경우 세대 내의 이질성을 간과함으로써 세대 내 선택과 배제를 구조화하고, 이에 따라 다층적인 불평등을 재생산한다. 세대가 세대주의적인 ‘청년’론이 누적되어 온 결과 청년이라는 정체성은 피해자, 약자화 되고, 시혜의 대상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주체성을 발화하고자 하는 젊은 층의 목소리가 사회 구성원의 정당한 주장이 아닌 피해자의 자기 증언으로 왜곡 해석되는 부작용을 만들기도 했다. 50 청년이라는 개념을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이해하도록, 우리 청년 담론에 동의하지 않는 그들에게까지 강제될 수 있도록 우리는 오히려 청년을 더 적극적으로 이야기해야 한다. 다만, 우리의 ‘청년팔이’가 어떤 면에서 변별되는지, 왜 더 윤리적이고 더 정당한지를 증명해 나가야 할 따름이다. 51 ‘청년’에 대한 강조가 세대 내의 불평등과 격차를 재생하는 메커니즘이 될 수 있으므로, ‘청년’을 이야기할 때 이러한 문제에 각별히 성찰적인 태도가 요구된다.


「청년팔이 사회」의 저자 김선기는 기존의 기성세대에 의해 생산되어 모두에게 소비되는 기존의 청년 담론이 세대 간의 갈등만 부추기고 있다고 문제제기를 한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청년 담론에 기성세대들에 청년을 이야기하거나 팔지 말라고 소리치는 전략의 한계를 지적하며 아이러니하게도 적극적인 청년팔이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우리들에 대한 이야기가 잘못된 방식으로 생산되고 소비되고 있는 상황을 타개하는 방법은 잘못된 방식과 소비를 멈추는 일이 아니라 보다 나은 방식으로 바람직한 방식으로 우리의 이야기를 생산하고 활용해야 한다는 논리다. 앞서 그의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신선하게 다가왔겠지만 이미 그의 책으로 그의 이야기를 충분히 접한 터라 신선함을 느낄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의 논리를 넘어설 만한 좋은 대안이 떠오르지 않았고 그의 지적은 너무나 합당하게 여겨졌다.



다음으로 내가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조영태의 ‘밀레니얼은 다 똑같아?’에서는 ‘밀레니얼 세대’의 잠재적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때의 밀레니얼 세대는 1980년대 중반 이후에 태어나 2020년에 30대 언저리에 있는 세대를 뜻한다. (이미 간단하지 않지만) 책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해보자면 밀레니얼 세대는 위(386세대) 세대에 비해 숫자가 많지 않고 여러 요인들로 비추어 봤을 때 영향력이 그리 크지 않은 세대이나 세계적으로 이 세대들이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우리나라 밀레니얼 세대에게 먹히는 아이템은 세계의 다른 밀레니얼 세대에게도 먹힐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우리 세대는 숫자도 적고 돈도 많이 없지만 세계적인 지표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세대이므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내가 여러 장 중에서 조영태의 ‘밀레니얼은 다 똑같아?’를 재밌게 보았던 이유는 다른 장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쉽게 풀어쓴 이야기라고 믿고 싶지만 그것과 더불어 아마도 내 또래에 대한 긍정적인 이야기였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용이 대체로 흥미로웠고 이것이 모두 절대적인 사실이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중에서 이 문장이 가장 마음에 닿았다.


본문| 138 성공하려는 열망이 큰 이들에게 ‘워라벨(일과 삶의 균형)’은 적합한 가치관이 아니다.


몇 년 사이에 꽤 많이 쓰이고 있는 ‘워라벨’에 대해 나는 조금 회의적이다. 워라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삶의 척도, 내 행복의 기준이 무엇인가에 대한 인지와 판단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워라벨’을 이야기할 때 보면 마치 이것만 지키면 행복이 저절로 주어지는 것처럼 워라벨이 지켜지지 않으면 행복하지 않은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이 나로선 조금 불편했다. 나의 경우 일이 끝나고 퇴근을 해도 머리의 스위치가 꺼지지 않는 사람이라 그럴 수도 있고 내가 하는 일의 특성이 스위치를 켠다고 바로 일이 쭉쭉 되지 않는 탓이기도 하다.






내가 가장 인상 깊었던 김영미의 ‘밀레니얼 세대에게 가족이란’에는 정말 기가 막힌 이야기가 나온다. ‘밀레니얼은 다 똑같아?’에서 이야기했던 밀레니얼 세대의 가능성이 모두 완벽한 사실이길 바랐다면 이 장에서 이야기되는 밀레니얼 세대에게 미치는 가족의 영향력은 거짓말이었으면 싶을 정도로 믿고 싶지 않은 영영 몰랐으면 싶은 이야기였다. 대부분의 것들이 개인의 역량에 의해서 좌우된다고 생각하고 싶지만 그것은 정말 몇 프로 되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모의 영향력에 의해 많은 것들이 결정지어진다. 막연하게만 생각했던 이 이야기들이 사실임은 물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뚜렷했다.


본문| 96 개인들이 삶에서 선택의 자유가 확장되는 가운데 공동체의 규정력이 희박해지고 개인들의 차이가 극대화되고 있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지만 오히려 가족 배경의 결정력이 더욱 강화되는 역설적인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97 청년층에서 가족 배경의 영향력이 대학, 진학, 취업, 소득 전반에서 다른 연령층과 비교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었다. 98 가족 배경이 소득에 유의미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이다. 사회 경제적 지위가 높은 부모 밑에서 자란 청년들일수록 더 고소득의 일자리를 가지고 있었다./ 104불평등 지수가 높은 국가일수록 세대 간 사회 이동성 지수가 뚜렷하게 낮았다./ 불평등은 파워 집단이 자녀의 재능과 상관없이 성공할 수 있도록 게임의 규칙 자체를 바꿀 수 있는 권력의 불균형 상태를 초래한다. 무엇보다 착잡한 것은 불평등이 영유아 발달 과정에 영향을 미쳐 아이들의 인지 능력의 격차를 만들어 낸다는 점이다./ 불평등을 줄여 교육 경쟁에서 적절한 성과만을 거두어도 안정적이고 꽤 괜찮은 생활을 누릴 수 있다면 중상층 부모들의 계층 하강 이동에 대한 공포를 낮출 수 있으며, 자녀의 교육 투자에 올인하고 기회 사재기를 하는 행동을 줄일 수 있다. 선순환의 실마리는 상품화에 저항하는 보편 복지를 위한 세대 간 연대에 있다.


내가 가장 기가 막혔던 것은 다른 연령층보다 청년층에서 가족 배경의 영향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내용이 아니라 청년층의 기회 공정성에 대한 인식 차이였다. 한국 사회의 기회 공정성에 대한 인식이 부모의 사회 경제적 지위에 따라 큰 차이를 보였다는 점이다.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은 청년은 이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심지어 최상층의 가족 배경을 지닌 청년층은 다른 청년층에 비해서는 물론 비슷한 층위의 중년층보다도 더 긍정적으로 평가한다고 했다. 자신이 가진 것이 많을수록 이 사회가 공정하다고 평가를 했다는 것은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자신이 가진 것이 공정하고 정당하게 주어진 것이라고 여긴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살아가고 이 사회가 지금의 시스템이 조금 무서워졌다. 가진 것이 많이 없다고 생각하는 나 또한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가족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남석의 ‘오늘의 중국 청년들’은 루쉰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루쉰은 “청년들아, 나를 딛고 올라라.”라고 하며 자신이 청년세대를 위한 사다리가 되겠다고 한다. 이 문장을 마주하며 마음이 찌르르- 했다. 지금 우리 청년들에게 필요한 어른은 이렇게 자신의 품을 내어 줄 수 있는 어른이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시대에 청년들에게 이렇게 너른 품을 내어 줄 어른은 존재하지 않는다. 더 정확히 이렇게 우리 청년을 품어줄 만큼 너른 품을 가진 어른이 흔치 않다. 그건 우리 30대 중반의 청년 세대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게도 20대의 사회 초년생에게 내어 줄 품은커녕 내 앞가림을 하기도 벅찬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 오히려 멋모르는 그들이 부러울 지경이다. 나도 나이 들어 저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할 정도로 행복해 보이는 어른이 없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이들은 자신들의 이익에 눈이 먼 정신 혹은 마음에 병이 있고 정신이 맑은 이들은 경제적으로 퍽퍽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고유경의 ‘세대, 기억의 공동체’의 제목이 나는 무척 마음에 들었다. 최근 공동체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종종 했는데 내가 생각하는 공동체는 ‘경험의 공동체’라는 결론에 도달했었는데 세대를 공동체 관점에서 해석한다면 ‘경험’이 아닌 ‘기억’이라고 표현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마지막 장인 정혜선의 ‘미래 세대의 눈물과 함께‘에서는 마음이 많이 찔렸다. 최근 들어 아주 조금씩 환경이나 기후를 위한 노력을 실천하려 애쓰고 있으나 아주 작은 실천에 불과하다. 더구나 이 조그마한 관심조차도 관심을 가졌던 날보다 관심을 갖지 않았던 날이 더욱 많고 지금도 여전히 순간순간 나의 편의를 우의에 둘 때가 많기 때문이다. 이 장은 그런 나를 겨냥한 듯 따끔하고 뼈아픈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툭툭 내던지고 있었다.


본문| 182 대기 중 온실 가스 증가로 인한 기후 변화는 세계 곳곳에서 인간의 삶에 직접적인 재난을 불러오고 있다./ 알고 있으면서 알리지 않는 것이 어른으로서 더 무책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기후 위기는 투발루나 몰디브 같은 섬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류의 생존 자체가 달린 문제다 기후 위기에 대한 인식 없이는 세계도 미래도 없다. 184 유럽의 10대 들은 자신들이 기후 변화에 대해서 제대로 교육받은 첫 번째 세대이자, 기후 위기로 인한 생태적 재난을 막을 수 있는 마지막 세대라고 했다. / 바로 여러분이, 대부분의 언론들이 지금 이 순간까지 계속 사실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릅니다. 과학을 존중한다면, 과학을 이해한다면 사실을 말해 주어야 합니다. 194 “이전의 안정적인 기후를 회복하는 것은 어려울지라도 더 큰 비극을 막기 위해 당장 행동해야 해.”/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는 여러 개가 있어. 하나의 티핑 포인트를 막지 못했다고 해서 다른 티핑 포인트도 막을 수 없는 건 아니야. 우리가 최대한 빨리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면, 완전한 붕괴는 막을 수 있어.” 199 나는 학생들이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도 못할 만큼 성숙하지 않은 ‘어른으로 자라나는 걸 원하지 않는다.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은 우리 어른들로 충분했다. / 아픈 현실이라도 정서적 공감을 나눌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라면, 정치권의 무책임함과 동시에 청소년의 분노를 마주하고도 무너지지 않을 힘을 키워 나갈 수 있지 않을까. / 회복탄력성을 갖춘 사람으로서 건강하게 살아나갈 수 있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 책을 읽고 딱 두 가지만을 기억할 수 있다면 난 이 두 단어를 기억하고 싶다. 그것은 바로 티빙 포인트(tipping point), 회복탄력성(回復彈力性)이다. 예전의 나는 성실함을 매우 높이 사는 사람이었고 지금도 성실함에 대해 굉장히 후한 값을 주는 편이다. 잘하든 못하든 열심히 하는 것, 하루도 빠짐없이 무언가를 한다는 것의 가치, 그 과정에 담긴 힘을 나는 존중한다. 지금도 그러하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성실함보다 더 우위에 두는 가치가 있다. 그것은 넘어졌다가도 다시 일어서는 힘이다.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는 어떤 일이 처음에는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미미하게 진행되다가 어느 순간에 균형이 깨지면서 거대한 변화로 바뀌는 순간을 뜻한다.


지난봄부터 여름으로 넘어오는 때에 나는 매일매일 한 시간 걷기 운동을 시작했다. 일찍 일어나 내가 계획한 일을 하고 매일 한 시간씩 걸으며 나는 나 스스로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한 달을 넘어 두 달이 되어갈 무렵 몸에 무리가 왔다. 몸도 마음도 건강해지는 중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몸에 무리가 되었는지 아직 젊은 나이인 나에게 대상포진이 찾아온 것이었다. 그렇게 운동은 멈춤 상태에 들어갔고 최근에 어느 한의사 선생님께서 쓰신 글을 통해 매일매일 운동을 하는 것은 몸에 무리가 갈 수 있고 주 2~3회 정도 천천히 걷는 것도 우리 몸에 운동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우리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전환점이 되어줄 터닝 포인트도 중요하지만 어쩌면 그보다 티핑 포인트가 더 중요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몸도 환경도 사람도 우리에게 계속해서 사전에 신호를 주지만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 신호를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무시하면 걷잡을 수 없는 사태에 이를 수 있다. 그렇게 이미 일이 벌어진 뒤에 이를 이전 상태로 돌리는 일은 이전의 무언가를 유지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그렇기에 나는 이제 매일매일의 꾸준함보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힘을 더 우위에 두기로 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항상 생각하며 그것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설사 그 티핑 포인트를 지키지 못해 상황이 엉망이 되었더라도 그 이후의 상황에서의 티핑포인트 혹은 최선을 지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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