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공방 공방일지
정말 다이나믹한 하루였다. 아주 흥미진진했다. 오늘 내 계획은 고급 손님 맞이하고 써야 하는 글 한 꼭지쓰고 시작만 해두었던 사업계획서도 얼추 뼈대 갖춰 모양을 만들고 수요일에 있을 수업 준비하고 틈이 나면 밀린 일지도 쓰려했다. 그런데 오늘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손님 맞이와 수업 준비를 제외하고 아무것도 못 했다.
몇 달 전 책공방은 일이 있어 오사카에 갔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책공방이 하는 일에 관심을 보이는 친구를 만났다. 오사카 친구들이 반갑게 맞아주고 여러모로 신경써주어 참 고마웠다. 그 보답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나중에 우리 공방에 놀러오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좋은 시간을 보내고 좋은 기억을 갖고 돌아왔다. 그리고 어제 오사카에서 만난 그 친구가 공방에 찾아왔다. 서울에서 몇 시간이나 걸리는 이곳에 찾아 온다니. 내가 그곳에 갔던 때의 그 마음이 떠올라 나도 덩달아 신이 났다.
오는 날이 장날이라고 정말 삼례 장이 열리는 날이라 시장 구경도 함께 했다. 저건 뭐고 저건 뭐라고 설명해줘야 하는데 언어가 안 되니 침묵 속에 손가락만 무척 바빴다. 그리고 간간히 메시지를 확인한 후 웃음소리 그리고 중학 수준의 영어 단어들 만이 소리로 전해졌다. 군밤을 사주려고 하니 군밤은 일본에도 있다고 해 호떡을 사 먹었다. 하나에 칠백원짜리 호떡을 손에 하나씩 들고 만원 짜리를 내미니 아주머니가 쌔하다. 잔돈을 달라는 뜻인 것 같아 죄송하다 잔돈이 없다 하니 그럼 다음 장에 주라고 그냥 가란다ㅎㅎㅎㅎㅎㅎㅎ 호떡은 이미 한 입 먹었고 잔돈은 없고 아주머니는 그냥 가라고 하니 그냥 가야하나 다른데서 바꿔 갖고 와야 하나 하는데 이 친구 눈치를 챘는지 지갑에서 천원짜리를 꺼낸다. 눈치가 백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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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에 호떡에 귤도 한 보따리 사고 뻥튀기도 한 보따리 사서 공방으로 돌아오는데 그 좋았던 날씨는 온데간데 없이 강풍이 불기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바람이 세구나 그러다 말겠지 했는데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공방으로 돌아와 친구에게 몇 시 쯤 돌아가느냐 물으니 가는 표를 예약해야 하느냐 묻는다. 오잉? 다른 날 같으면 괜찮을 텐데 오늘은 일요일이고 그것도 저녁시간이라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가차표를 확인해 보니 안 좋은 예감은 늘 맞는 것처럼 역시나 좌석이 없다. 이를 어쩌나 싶어 계속해서 새로고침을 해보지만 매진 글씨는 바뀔리 없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바람은 더욱 세게 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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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행버스 예매가 되면 좋을텐데 삼례는 왜 예매도 안 되는지. 중간중간 취소표가 나오는지 확인하고 정 안되면 그냥 버스를 타고 가기로 하고 일단 공방을 둘러보기로 했다. 특별히 준비해 둔 가죽에 금박 작업을 하고 망치질을 해서 뚝딱 책 만들기 체험도 했다. 공방에 많은 기계를 두고 그 친구는 이게 다 한국에서 쓰던 기계들인지 물었고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우리 공방에 있는 기계들은 미국에서 만들어진 기계도 있고 독일에서 만들어진 기계, 일본에서 만들어진 기계도 있고 다양하다. 그러나 모두 우리나라에서 우리 선배들이 사용했던 기계들이다. 그것이 책공방의 정체성이고 자부심이다. 그런데 그 친구는 딱 그 지점을 알아봐주었다. 고마웠다.
오사카에서 만났을 때 그 친구는 이스라엘로 유학을 간다고 했는데 이번에는 십일월 부터는 대만의 레터프레스 공방에 인턴쉽 과정으로 간다고 했다. 그 이후에는 제본학교에 갈 지 어떻게 할 지 고민이라고 했다. 영어를 잘 하기에 따로 공부를 한 것이냐 물으니 교환학생으로 뉴욕에서 3년 정도 있었다고 했다. 나는 언어도 안 되면서 뭐가 그렇게 궁금했는지 손가락을 정신없이 움직였다. 내가 많은 질문을 한 탓인지 그 친구도 나에게 몇 년 동안 이곳에 있었는지 선생님과 둘이 일을 하는지 등등을 물어 왔다. 우리가 그렇게 침묵 속에 손가락이 바쁜 대화를 나누는 동안 바깥 날씨는 태풍이 올 것 같은 날씨로 변해갔다.
바깥 날씨가 심상치 않으니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하는 중간중간 코레일앱에 접속을 해보았지만 손가락만 아플 뿐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더 늦기 전에 일찌감치 버스터미널에 나가보기로 했다. 버스 시간 딱 맞춰 갔는데 좌석이 없으면 큰일이니 가서 조금 기다리더라도 안정된 상태에서 기라리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옷을 차려 입고 나가려고 하니 비가 더 세차게 오고 바람 또한 거세졌다. 이를 어쩌나 심난했다. 이런 날씨에 터미널까지 걸어갔다가는 신발이며 옷이 다 젖어 만신창이가 될 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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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엄두가 안나 혹시나에 기대보기로 했다. 예전에 삼례역에 가면 친절한 직원 분께서 혹시 취소되는 표가 나오면 잡아주겠다며 시간이 남았으니 대기실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으라 하셨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진짜 운좋게 좌석을 잡아주셔서 너무 감사하다 하니 사람이 없으니 가능한 일이라며 당신이 기차도 자주 안 다니는데 이런 맛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느냐 하셨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런 행운을 기대했으나 그때 그 직원분이 아닌 다른 분이 계셨고 내가 그렇게 부탁을 드리자 그럼 옆에 있는 아주머니께서 화를 내실거라고 하셨다. 아주머니께서는 좌석이 없어 입석표를 구입하신 모양이었다. 아차 싶어 외국인이라 부탁을 한번 드려 본 것이라 설명하고 그럼 익산에서 용산가는 KTX 좌석이 있는지 물으니 바로 몇시 차가 있다고 해서 냉큼 구입했다. 아까는 그렇게 몇 번을 해도 안 되던 것이 이렇게 간단히 해결되니 신기했다. 다만 삼례에서 익산가는 기차 시간이 애매해서 기차가 아닌 다른 방법을 이용해야 했다. 긴장한 상태로 이 상황을 지켜보는 친구는 내 손에 표를 거머쥐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봤을땐 대단하다는 뜻인 것 같았다ㅎㅎㅎ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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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까지는 안전하고 편리하게 택시를 이용하는 것으로 하고 시간이 남아 공방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아까보다 비가 더 세차게 내리는 것도 모자라 천둥번개가 쳤다. 공방까지 걸어서 2분도 채 안 걸리는 거리이나 이 정도 비와 바람에 나설 엄두가 안나 조금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그런 우리가 짠해 보였는지 날씨가 정말 너무하다 생각했는데 친구 마중나왔던 분께서 어디까지 가느냐며 태워다주겠다고 한다. 말만으로도 너무 감사했다. 허나 그러기엔 너무 가까웠고 우리의 옷은 아까 역까지 오는 동안 많이 젖은 상태였다. 이 친구가 운이 좋은 것인지 오늘 따라 친절한 분들이 이렇게 튀어나오니 어깨가 으쓱으쓱-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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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기다리다 조금 나아져서 공방으로 돌아왔다. 저녁시간이 가까워지는데 이 날씨 밖에 나가 먹기도 그렇고 배달을 시키자니 그것도 배달하시는 분께 죄송스러웠다. 기차시간에 맞춰 택시도 예약을 하고 아침에 엄마가 싸주신 잡채와 미역국으로 간단하게 저녁식사를 했다. 이러한 상황이 웃겨서 우리는 서로 자꾸 웃었다.
엥간해야 이러니저러니 하겠는데 날씨가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저녁 식사 후 나는 오늘 못한 일을 조금이나마 하고 그 친구에게는 자유시간을 건넸다. 그러다 내가 만든 책공방북쇼 아카이빙북을 보여주니 원더풀-을 외쳤다.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에 누군가 원더풀을 외쳐준다는 사실은 꽤 기분좋은 일이었다. 그렇게 다시 이야기 꽃을 피우다 보니 예약한 택시가 앞에 와있다는 연락이 왔다.
택시를 타기 전 우리는 허그-로 인사하며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 기껏해야 두 번째 보는 사이인데 깜짝 놀랄 날씨를 함께한 탓인지 우리는 무척 친한 사이가 된 듯했다. 두 번 만난 사이인데도 그것도 언어가 안 되서 거의 대부분 핸드폰을 통해 의사소통을 했는데도 낯가림 많은 내가 허그를 하며 인사를 나눌 정도로 마음에 교감을 이룬 것도 내가 오사카에 갔을 때는 지진이 나고 내가 도쿄에 갔을 때는 태풍이 왔고 일본 친구가 우리 공방에 오니 그 좋던 가을 날씨가 한여름 장마철 날씨로 변해버린 사실이 너무나 흥미롭다. 오늘은 정말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날로 오래오래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이 친구를 만날 때 마다 두고두고 이날이 회자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책공방 우여곡절은 한 꼭지가 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