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그저 아주 충실한 답변

시쓰는 임주아와 책만드는 이승희 서신교환

by 이승희

친애하는 그대에게

<시쓰는 임주아와 책만드는 이승희 서신교환>

13. 그저 아주 충실한 답변


“이 일기장이 다시 이야기되는 시간 속에서 나는 다시 태어난다.” 나도 바로 그런 글을 쓰고 싶다. 감칠맛이 있고 리듬감이 있는 글을- 언어가 상징하는 미학적 경험의 원천이자 구조인, 신화적 다의성에 어울리는 깊고 낭랑한 글을-

(수전 손택의 일기와 노트 1947-1963)
다시 태어나다 중에서


주아님, 오늘은 일요일이 아닌 월요일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그대의 편지를 마주하곤 정신이 바싹-들었습니다. ‘교훈으로 끝나는 글, 재미없이 늘어놓은 글’이라는 대목에서 마음이 쿵-쿵- 하고 내려앉았습니다. 이 두 요소는 제가 생각하는 제 글의 아킬레스건입니다. 특히 저의 지난번 편지가 그랬던 것만 같아 마음이 마구 찔렸습니다. 물론 주아님은 저의 글을 빗대어 그리 표현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그저 도둑이 제 발 저린 것 마냥 저의 부족함을 나름 잘 안다고 생각하는 저라서 마음이 저릿저릿-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렇게 저의 아픈 곳을 콕-콕- 찌르는 그대가 싫지 않고 좋습니다.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제 곁에 주아님이 있어 제 안에 존재하는 우물이 탁해지지 않고 끊임없는 자정 작용을 통해 맑음을 유지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저는 오늘 병원 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오전에 수업에 다녀와 점심을 챙겨 먹고 신경과에 갔다가 피부과에 갔다가 한의원에 다녀왔습니다. 포토샵이며 일러스트를 배운다고 하루에 세 시간 넘게 마우스를 힘주어 사용하고 자료 조사 및 정리 등의 업무로 PC를 사용했습니다. 그밖에 기타 메모 및 일기 쓰기 등을 손 글씨로 쓰곤 하는데 그러한 탓에 저의 오른손이 파업 조짐을 보였습니다. 오른손의 파업을 막고자 몇 주 전부터 응급처치로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기 시작했습니다. 평소 다니던 곳이 멀어 집 근처에 있는 한의원에 갔는데 침을 맞고 나자 제 의지와 달리 턱이 덜덜덜- 떨리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하필 태풍 마이삭- 왔던 날인데 몸도 마음도 어수선해서 곤욕을 치렀습니다. 천만다행으로 다음 날 아침이 되니 정도가 많이 가라앉긴 했는데 며칠 째 지속되었습니다. 계속해서 이 상태가 지속되면 어쩌나 했는데 병원에선 몸이 움직이기 위해서는 뇌에서 신호를 주게 되어 있는데 턱 쪽에 회로가 임의로 생긴 것 같다고 스트레스받지 말고 푹- 쉬면 괜찮아질 거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마음이 한결 놓입니다.


사람들은 책만드는 사람이라고 하면 호기심을 드러내지만 요즘 저의 일상은 이처럼 특별할 게 없습니다. 사실 해야 할 일이 잔뜩-인데 손에 잡히지 않아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책을 읽기만 하고 책 원고를 쓰거나 책을 만들거나 하지 못하는 날이 많습니다. 침을 맞으러 가기 하루 전 날부터 제정신이 돌아와 내팽개쳤던 원고를 다시 쓰기 시작했는데 바로 다음 날 그런 일이 있어 균형이 또 깨져버리고 말았습니다. 물론 이 또한 나약한 제 탓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제 자신이 탐탁하지 않아 속상한 날이 많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문득 주아님은 어떤 일상을 보내고 있을까 궁금해지곤 하지만 따로 연락을 하거나 하지는 않게 됩니다. 괜히 저의 무거운 마음을 나누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난번 편지에서 초등학교 6학년의 주아님을 잘 만났습니다. 아마 저라면 친구의 배신에 상처를 받고 집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을 텐데 ‘용감한 임주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서 외출을 감행하고 막간을 이용한 취미 생활도 포기하지 않았더군요. 저와는 달리 용감한 주아님이 샘이 날 정도로 부러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릴 적 일기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주아님도 역시 부러웠습니다. 저 또한 보란 듯이 어릴 적 일기를 선보이고 싶은데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이사하는 과정에서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부모님께 전해 듣기로는 저는 어릴 때 무척 착한 아이였다고 합니다. 다섯 살 터울의 동생을 잘 돌보았고 종종 노래를 불러주곤 했다는데 어쩜 이렇게 새까맣게 기억이 안 나는지 모르겠습니다. 일기와 같이 어린이였던 이승희도 함께 사라져 버린 것인지 기억이 파편처럼 흩어지고 흐릿하기만 합니다.


주아님의 조언대로 브런치와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을 다르게 활용해보려고 노력 중입니다. 시키는 대로 하면서도 마음은 계속 내키지 않습니다. 이렇게 계속 짧게 쓰다 보면 어느 순간 긴 글을 영영- 쓰지 못하게 될 것만 같은 기분입니다. 지난번 편지에서 말한 것처럼 그렇게 짧게 쓰다 보면 제 마음이나 생각도 가벼워만 질 것 같아 겁이 납니다. 그리고 제 안에 여전히 ‘내 마음이야’라는 생각이 호심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그래도 실패한 날보다 성공한 날이 많습니다.


(주아님, 월요일에 시작했던 편지였는데 일주일이 흘러 다시 월요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인싸 이야기’를 보며 무척 당혹스러웠습니다. 혹여나 누군가 이 이야기를 보고 비웃진 않을까 하는 염려가 되는 것은 제가 자신감이 부족한 탓일까요? ‘인싸’라니. 저는 이제껏 단 한 번도 유명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지난번 속초 여행에서 나누었던 많은 이야기 중 하나는 요즘엔 인싸가 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때 저는 몹시 씁쓸했습니다. 나 같이 나서는 것을 내켜 하지 않는 사람들이 살기엔 힘이 든 세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나마 요즘에서야 제가 하고자 하는 일들이 어느 정도 사람들의 관심이 필요한 지라 나름 열심히 노력 중입니다. 그렇게 그동안과 달리 자꾸 나서는 연습을 하는 중인데 그쪽 방면으론 소질이 없는 것 같아 자꾸 뒷걸음질을 치게 됩니다.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어제 ‘책방 토닥토닥’에서 진행했을 강의도 그 노력의 일환입니다. 지난 월요일부터 제 머릿속은 온통 ‘어떤 이야기를 하면 좋을까’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습니다. 수요일 즈음 가닥을 잡고 분주히 자료를 만들고 있었는데 코로나로 인해 온라인으로 진행하기로 했던 일정을 10월로 미루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잔뜩 긴장을 하며 준비 중이었는데 한 달 넘게 시간이 생기니 마음이 놓이기도 하고 열심히 하던 마음의 긴장이 풀어져 허탈하기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대의 시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앞부분에서 술술 읽히다 ‘독자적이란 무엇인가 생각하면서’ 이 부분은 마음에 쿵- 와서 닿았는데 그다음에 ‘피 묻은 꿩’의 등장이 저에겐 묘연합니다. 핫브레이크를 먹고 읽는 시집에서 등장하는 것인지 무엇인지 저에게는 주아님의 맛깔난 해설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부족한 저의 의견이라도 참고하고자 한다면 ‘식탁’의 반복은 숨은 의도가 없다면 빼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첫 번째 식탁을 살리고 ‘식탁 의자’보다는 말이 안 되지만 익숙한 표현인 ‘식탁에 앉아’로 두 번째는 식탁 대신 ‘흥건한 바닥에’으로 하면 보는 사람인 저의 마음이 편해질 것 같은데 시적으로는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끝부분이 재미없다는 주아님의 어려움을 무언가 멋지고 신박하게 풀어주고 싶은데 마음만 굴뚝같지 머릿속은 백지입니다.


주아님, 시간이 참 느리고도 빠릅니다. 에어컨을 켜지 않을 수 없었던 날들을 지나 이제 전기장판이 생각나는 날이 찾아왔습니다. 이번 편지는 여러 장의 종이가 엮여 책을 이루듯 여러 날의 이야기를 하나의 편지로 엮어 보고 싶었습니다. 주아님과 주변 사람들의 말처럼 책만드는 것과 관련된 이야기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대실패입니다. 그것도 모자라 하지 않았던 지각까지 하고 말았습니다. 시간이 흐름과 함께 제 마음도 함께 타들어 갑니다. 주아님은 매번 이런 마음을 견디고 있었던 것인지 궁금해집니다.


아참 그리고 주아님 지난번 제가 합격한 자격증은 일러스트가 아니라 포토샵입니다. 일러스트는 오는 11일에 결과가 나옵니다. 떨어지면 조용히 넘어가려 했는데. 그대 덕분에 그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대가 나의 창피를 책임지는 일이 없길 바라며 저와 한 마음으로 빌어주셔야겠습니다.


월요일에 쓰기 시작한 편지에 다시 월요일이 되어 마침표를 찍습니다.

2020년 09월 07일 새벽에 이승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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