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쓰는 임주아와 책만드는 이승희의 서신교환
친애하는 그대에게
<시쓰는 임주아와 책만드는 이승희의 서신교환>
9월도 며칠 남지 않았고,
그러면 겨울이 이내 닥치겠지요.
한 가지 일에만 전념할 수 있는 사람이
가장 행복할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이오덕•권정생의 『선생님, 요즘은 어떠하십니까』 중에서
주아님,
지금은 내가 9월 20일 오후 10시 13분입니다.
어제 오후에 여산 집에 가서 자고 오늘 아침 일곱 시 반쯤 일어나 아홉 시부터 두시 반 까지 밤을 줍고 집으로 돌아와 늦은 점심을 먹고 여섯 시까지 밤을 크기 별로 선별하고 썩거나 이상 있는 것들을 골라내는 작업을 했습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니 이런저런 일들로 복잡했던 생각과 마음을 잠시 동안 잊을 수 있어 좋았습니다. 저희 집 밤은 ‘옥광(玉光)’이라는 품종인데 이름 그대로 빤딱빤딱- 빛이 나고 가시 옷의 밤송이에서 알밤이 쏙쏙- 빠져 줍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주아님도 저와 같이 ‘노동-명상’을 원한다면 고급-밤 주울 기회를 선물하겠습니다.
편지를 쓰기로 약속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늦게 시작한 것은 우리가 편지를 쓰기 시작하고 처음 있는 일입니다. 약속 시간에 아슬아슬해질 때는 마음이 조급하지만 아예 늦을 것 같으면 오히려 초연 해지는 것처럼 지각이 너무 뻔한 상황이 되고 보니 마음이 그저 그렇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마음이 가벼운 것은 아닙니다. 주아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고 약속을 지키지 못한 내 자신이 싫기도 합니다. 다만, 평소에 저였다면 이 상황에 대해 어쩔 줄 몰라하고 스트레스를 받았을 텐데 오늘은 그렇지 않을 뿐입니다.
저희가 이렇게 편지를 쓰기 시작한 것도 15주가 되어 갑니다. 네 달 가까이 되는 시간이 짧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냥 긴 시간도 아닌데 이제 일요일이 제게는 편지를 쓰거나 받는 날이 되었습니다. 그대에게 편지를 받는 날에는 몰라도 제가 쓰는 날에는 어떠한 일을 하거나 약속을 잡는 일도 피하게 됩니다. 편지만 봤을 때는 그냥 슥슥- 써 내려간 것처럼 보이지만 그간의 편지를 쓰기 위해 저는 꽤 많은 시간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편지를 쓰곤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제 그 시간을 조금 줄여보려 합니다. 아니 생각의 무게를 조금 가벼이 하려고 합니다.
처음엔 그저 카톡이나 통화, 만남에서 이루어지지 못하는 긴 호흡의 이야기를 하고자 그저 서로 즐겁자고 시작한 일이었는데 하다 보니 자꾸 욕심을 내게 됩니다. 서로에게 쓰는 편지이지만 브런치에 연재를 하고 SNS에 공유를 하니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봐주었으면 좋겠고 이 편지를 본 사람들로부터 긍정의 피드백을 받고 싶어 집니다. 이러한 욕심이 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로 여겨질 만큼 흔한 수순이지만 저는 이 당연함이 불편합니다.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오로지 주아님만을 대상으로 그대에게 나의 생각과 마음을 전하는 본질에 충실하고 싶습니다. 이 편지가 공개되어 누군가 저의 글을 보게 되는 것은 저에게도 그들에게도 보너스 같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보너스는 말 그대로 있으면 좋고 없어도 뭐라 할 수 없는 것이니 연연하지 않으려 합니다.
역시 저는 인싸가 되기는 글러 먹었나 봅니다. 그대의 기대에 부흥하지 못해 미안합니다. 지난 편지에서 주아님의 말처럼 ‘인싸’ 중에는 확실한 콘텐츠 없이 다른 사람의 것들을 컨트롤 씨, 컨트롤 브이 해서 자신의 것인 양 별 게 아닌데 마치 대단한 것인 양 꾸미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지역에도 더 가까이 우리 주변에도 자신의 콘텐츠 없이 문화, 예술, 지역, 도시재생, 마을 만들기, 사회적 경제 등 모든 분야의에서 자신이 전문가라 말하고 각종 회의에 참여해 발언하는 ‘모두 다 전문가’를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물론 그들 또한 그들 나름의 노력을 하고 그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능력은 있을지언정 진성성이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줄 알아볼 수 있는 시각을 갖출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앞으로의 세상은 모두가 ‘진짜와 가짜’를 알아볼 수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지금도 진짜 같은 가짜들이 너무 많은데 앞으로는 더 많아질 것 같습니다. 예전에 뉴스에 나오는 것들이 대부분 사실이었는데 요즘은 채널에 따라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이 너무 많이 생산되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무늬만 진짜인, 진짜처럼 행동하는 가짜들이 많아지는 것이고 그것이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는 점입니다. 저는 그런 세상이 몹시 두렵고 저 또한 그런 모습이 될까 우려스럽습니다.
다만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저희가 이야기를 했던 ‘인싸’는 각종 행사나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인싸’의 의미보다는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큰 사람이라는 뜻의 ‘인플루언서’에 더 가까운 듯합니다. 이에 따라 앞선 이야기를 정정하자면 저는 인플루언서가 되기는 글러 먹었지만 우리 지역이나 제 분야에서 ‘인싸’가 되어 볼 생각입니다.
사실 주아님이 제게 처음 스타니 인싸니 이야기하였을 때 오래전부터 선생님이 제게 하셨던 이야기라 무척 웃음이 났습니다. 두 사람 모두 저를 아끼는 탓에 하는 이야기인 것을 너무 잘 알지만 아싸 기질이 충만한 저에겐 터무니없는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제가 ‘인플루언서’는 아니지만 ‘인싸’라도 되어 볼 생각을 하게 된 데는 주아님과 제 스승인 선생님 영향이 큽니다.
그러니 그대는 계속해서 까불어 주시길 바랍니다. 그대의 까붐이 제게 용기가 되어 이만큼이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시간이 많이 흘렀을 때 서로가 어떤 모습일지 벌써부터 궁금해집니다. 저는 지금처럼 그대에게만 인플루언서가 되어도 충분합니다. 조금만 욕심을 내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대와 같은 찐-들에게 인플루언서가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만 같습니다.
그동안 그래 왔듯 주아님에게 편지를 쓴 지 2주가 흘렀고 주아님으로부터 답장을 받은 지 1주가 흘렀습니다. 뭐라 딱 떨어지는 이유를 제시하지 못하겠지만 지난번에 만났을 때 말했던 것처럼 ‘입방뼈’라는 이름은 몹시 임주아스럽습니다. 웬만해선 확신 따위 하지 않는 성격이지만 이 생각은 저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라 확신합니다. 주아님은 지난 한 주 동안 깁스를 풀고 세모집으로 출근을 재개했을 것입니다. 몇 개월 전에 1년 8개월간의 직장생활을 마치고 잠시 자유의 몸이 되어 자유를 만끽했던 것처럼 또 다른 의미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으리라 상상해봅니다. 하지만 그때와 달리 이번엔 집행유예라는 점을 항시 염두에 두어 완치하길 바랍니다.
지난 2주 동안 각종 모임과 여러 미팅 등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다가오는 2주 동안에는 더 많은 일들이 있을 예정입니다. 완주군에서 진행하는 희망 일자리 사업으로 매주 완주군 소재 관광지 중 한 곳을 취재해 사진과 글을 완성하는 일을 지난주부터 시작했습니다. 평소 맥락 없이 여기저기 그려지는 벽화를 달갑지 않게 생각했는데 하필이면 그 주제를 맡게 되었습니다. 내가 납득이 가지 않는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긍정적으로 소개하려니 마치 내 자신을 속이는 것만 같아 머리가 많이 아팠습니다. 이와 별개로 돌아오는 주부터는 ‘내가 좋아하는 삼례’에 대한 이야기를 쓰기로 했고 돌아오는 토요일엔 멀티미디어 자격시험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더불어 ‘책공방, 20주년‘을 앞두고 선생님이 사진집을 제작키로 해 기획과 편집을 맡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이번 주는 굉장히 바쁜 한 주가 될 것 같습니다.
그 결과 제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이라 할 수 있는 제 책의 원고 작업은 이렇게 시급한 일들로 인해 뒷전으로 밀리게 되었습니다. 벌써 구월도 스무날이 지나고 열흘을 앞두고 있습니다. 부디 저와 달리 주아님의 시 열 편 가다듬기 계획은 착착- 진행되길 바랍니다. 지지난번 편지에서 소개해 주신 ‘이것은 메모입니다’의 시 내용은 주아님의 설명을 듣고 나니 어색함이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졌습니다. 부족한 제가 괜한 이야기를 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저의 오른손은 주아님이 걱정해 준 덕분에 많이 호전되었습니다. 아무래도 포토샵과 일러스트를 배운다고 힘주어 마우스를 장시간 잡았던 것이 원인이었던 모양입니다. 손목 보호대를 구입해서 조심조심 사용하고 일주일 정도 한의원에 다니니 대번에 좋아졌습니다. 매일매일 일기 쓰는 것도 무리가 되는 듯해 이 또한 짧게 쓰려고 깨알 같은 노력도 진행 중입니다. 그대의 마음이 듬뿍 담긴 ‘손가락 꽁꽁- 처방’은 다음 기회에 꼭 활용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은 9월 21일 01시 05분입니다. 날짜가 바뀌었지만 제가 잠들지 않았으니 저의 하루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우겨 봅니다. 마지막으로 저 위에 인용글이 이오덕과 권정생 선생님 중 누구의 편지글일지 맞춰보시기 바랍니다. 대부분의 퀴즈가 그러하듯 정답을 맞히면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2020년 9월 21 일지만 20일로 우기고 싶은
자기 합리화 대마왕 이승희 드림
<시쓰는 임주아와 책만드는 이승희 서신교환>은 매주 일요일에 업데이트됩니다. 시쓰는 임주아의 브런치 주소는 https://brunch.co.kr/@zooalim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