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두 세상의 공존

시쓰는 임주아와 책만드는 이승희 서신교환

by 이승희

<친애하는 그대에게>

시쓰는 임주아와 책만드는 이승희 서신교환

도종환의 부드러운 직선 중 '폐허 이후' 전문

21. 두 세상의 공존


사막에서도 저를 버리지 않는 풀들이 있고
모든 것이 불타버린 숲에서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믿는 나무가 있다
화산재에 덮이고 용암에 녹은 산기슭에서도
살아서 재를 털며 돌아오는 벌레와 짐승이 있다
내가 나를 버리면 거기 아무도 없지만
내가 나를 먼저 포기하지 않으면
어느 곳에서나 함께 있는 것들이 있다
돌무더기에 덮여 메말라버린 골짜기에
다시 물이 고이고 물줄기를 만들어 흘러간다
내가 나를 먼저 포기하지 않는다면

- 도종환의 부드러운 직선 ‘폐허 이후’ 전문


오늘 하루는 어떻게 보내셨나요? 그동안 무수히 써왔던 ‘안녕’이라는 단어를 썼다 지웠습니다. 안녕이라는 단어는 ‘아무 탈이 없는 편안함‘이라는 뜻을 지녔는데 상대가 안녕치 못한 걸 뻔히 알면서도 습관적으로 무의미하게 껍데기 같은 인사를 그대에게 건네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책공방이 지금 자리에서 떠나야 할 날이 50일이 채 남지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근 두 달 사이 사람들을 참 많이 만났습니다. 제가 만난 사람들 중에는 지역 의원님들도 있었습니다. 책공방 소식을 알고 계셨고 이러한 결과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을 밝히셨습니다. 한낱 지역 청년인 제가 요청한 만남에 응해준 것도, 저와 같은 생각을 가졌다는 것도 저에게 긍정적이라 잠시 희망을 갖기도 했습니다.


담당 공무원을 제외하고 제가 아는 모든 사람들은 심지어 지역 의원님 또한 삼례에서 책공방이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이야기합니다. 물론 제 앞이라서 제 주변의 사람들이라서 제가 사는 세상이라 그러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결정을 내린 이들 또한 제가 사는 세상과 그리 멀지 않은 아니 맞닿아 있는 세상에 살고 있을 텐데 어째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지금의 상황이 되었을까요.


저는 요즘 두 세상에 살고 있는 기분입니다. 하나는 책마을을 만들겠다고 유치한 책공방을 잠시 운영을 맡았던 수탁업체와 세트로 묶어 정리하려는 세상이고 나머지 하나는 책공방이 가진 가치와 가능성을 소중히 여겨 책공방을 지키려는 세상입니다. 전자의 세상엔 실체는 없고 권한만이 있고 후자의 세상엔 실체가 있으나 권한이 없습니다.


지난해 11월 30일, 저는 근로계약 만료 통보를 받았습니다. 2018년 삼례문화예술촌의 수탁업체가 삼삼예예미미 협동조합에서 아트네트웍스로 변경하는 과정에서 직원의 고용 승계에 대해서 저희 선생님을 제외하고 어느 누구도 관심 갖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여러 이유로 저의 근로계약은 미뤄졌고 우여곡절을 겪고 8개월 만에 수탁업체인 아트 네트웍스와 근로계약을 맺었습니다.


마음은 타들어갔고 몸은 메말라갔던 시간이었습니다. 그 시간을 견딘 것은 누구의 요구도 아닌 제 선택이었습니다. 처음엔 포기하고 싶었으나 나중엔 여기서 물러서면 평생 비겁한 사람으로 살아가야 할 것 같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다시는 이러한 일을 겪고 싶지 않았던 저는 근로계약을 맺으며 책공방 운영 기간 동안 근로계약 자동 연장을 요구하였습니다. 계약서에도 명시할 것을 요구했으나 다른 직원과의 형평성 문제로 거부해 구두 약속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작년 말 아트네트웍스 대표는 이 약속을 번복한 채 계약 만료 통보와 함께 재계약 의사 없음을 밝혀왔습니다.


당시 삼례문화예술촌의 위탁자였던 완주군은 수탁업체와 근로자 간의 일어난 일에 대해 (심지어 전임자가 문제가 생길 경우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제3자라며 뒷짐을 지고 물러났습니다. 약속은 한 사람은 약속을 한 적이 없다고 하고 책임을 지겠다는 사람은 사라지고 말로 하는 약속과 공무원의 말을 믿은 ‘저’ 한 사람만이 덩그러니 남겨졌습니다. 이 일이 외부로 알려지자 사람들로부터 공분을 샀고 그제야 아트네트웍스는 책공방에 예산을 넘겨줄 테니 저를 직접 채용하라고 했고 완주군도 이에 동의하고 나섰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는데 더욱 기가 막혔던 것은 군 담당자의 반응이었습니다. 당시 완주군은 법정 문화도시에 지정되기 위한 예비사업을 추진 중에 있었는데 심사 과정 중에 이 일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일로 인해 그동안 쌓아온 완주군의 이미지가 얼마나 큰 타격을 입었는지 모른다고 안타까워했습니다. 그 말은 마치 제가 지역에 먹칠을 했다고 나무라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 말을 듣고 기가 막혀 ‘저는 일방적으로 맞았고 맞아서 아프다고 소리를 쳤는데 어떻게 때린 사람이랑 맞은 사람이랑 똑같이 잘못했다고 할 수 있느냐’ 되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외부에서 볼 때 책공방이나 아트네트웍스나 둘 다 똑같다고 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어차피 계속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니 아트네트웍스의 제안대로 근무를 하라고 했으나 저는 그럴 수 없다고 했습니다. 저는 계속해서 일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사랑하고 아끼는 이 공간에서 상식이 통하고 약속이 지켜지길 바라는 것이라고. 제 편을 들어달라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맞고 틀린지에 대해 정확하게 판단해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 것이 공무원의 역할이니 그 역할을 제대로 해주십사 간곡히 부탁드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주군은 작년 12월 ‘공동체’를 주제로 예비 문화도시 사업에 선정되었고 저는 올해부터 자유로운 신분이 되었습니다. 아마도 제 부탁을 받아들이기는커녕 오히려 그분들의 기분을 상하게만 한 모양입니다. 그러니 지금과 같은 결과가 나온 것이겠지요. ‘살기 좋은 완주’를 표방하고 ‘공동체 문화도시’를 추구하는 완주에서 일어난 일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일들입니다. 제가 사는 세상은 이렇게도 다릅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공동체와 문화도시에는 지역 청년인 저도 7년 동안 뿌리내린 책공방도 없는 모양입니다. 저는 이렇게도 다른 두 세상에 발을 딛고 살아가고 있음을 상기합니다.


2013년 삼례문화예술촌 개관과 함께 삼례역 자리에는 세계 막사발 미술관이 자리해 있었습니다. 삼례문화예술촌의 수탁업체가 변경됨에 따라 막사발미술관도 계약 해지 및 폐쇄 조치에 들어갔습니다. 이후 2년간 방치되다 올해부터 문화도시추진단이 들어왔고 ‘문화도시지원센터’로 탈바꿈 중에 있습니다. 아마도 삼례문화예술촌도 지금의 소란이 잠잠해질 때까지 방치되다 1~2년 뒤에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될 것입니다. 임동창의 풍류학교가 그러했고 막사발미술관이 그러했듯 책공방 또한 어느 순간 그저 잠시 머물다 간 공간으로 더 오랜 뒤에는 기억하는 이보다 기억하지 못하는 이가 더 많아질 것입니다.


주아님으로부터 시작된 챌린지가 진행된 지 일주일째 진행 중입니다. 챌린지 소식을 듣고 제 마음은 몹시 뜨거웠습니다. 자신의 일도 아닌데 오로지 자신이 생각하는 가치와 소중함을 지키고자 실천에 나서는 그대가 참 멋지다고 생각했습니다. 내 옆에 이렇게 멋진 사람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그동안 외로웠던 마음을 감싸주어 참 따뜻했습니다. 그러나 주아님, 우리는 실패할지도 모릅니다. 이제 막 챌린지를 시작해 서서히 뜨거워지는 지금, 참으로 김빠지는 이야기로 들려 매우 언짢을 수 있겠지만 저는 그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우리는 ‘삼례 책공방’을 지켜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그럴만한 힘이 없음을 인정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지는 것이 너무 뻔한 아니 이미 진 싸움에 뛰어든 것인지도 모릅니다. 누구보다 간절히 기적처럼, 많은 사람들의 성원에 힘입어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일어나길 바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패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이 일로 인해 주아님이 괴로워하기보다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침묵하지 않았다는 자부심을 갖고 더 행복한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행복’에 있음을 우리는 잊지 않아야 합니다.


이천이십년십일월이십이일밤을지새우며

차가운냉정을가진이가 뜨거운열정을가진이에게


#시쓰는임주아 #책만드는이승희 #서신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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