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공방 이승희가 된 지 10년을 넘어 11년을 향해간다. 그동안의 시간을 뒤돌아보면 신기하기만 하다. 어떤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 하고 있는지 궁금할 테지만 나도 몰랐다. 바쁜 일상 틈틈이 메모를 습관화하고 퇴근 전엔 공방일지를 적고, 집에 와서 잠들기 전에 일기를 적는 삶을 살았다. 기록을 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고, 10년이란 시간은 결코 적지 않은 시간이지만 그렇게 쉽지 않고 적지 않은 시간을 지나 지금에 이르렀다. 안 그래도 바쁘고 정신이 없는데 그 와중에 기록까지 하느라 애를 먹었지만 그렇게 남겨둔 기록은 내가 힘들고 지칠 때마다 중력처럼 나를 붙잡았다. 기록 때문에 힘들었지만 기록 덕분에 여기까지 왔다.
책공방에 사람들이 오면 특히 사무실에 들어서면 정말 ‘뜨악’하곤 한다. 우선은 책장이 예뻐 놀라고 그다음엔 물건이 너무 많아 놀란다. 으레 이건 다 어디서 왔으며, 누구의 소유냐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그럼 난 나만 빼고 모두 선생님의 물건이라고 웃으며 답하곤 한다. 이렇게 많은 물건을 소유한 선생님은 하고 싶은 일도 무척 많은데 그중 하나는 ‘소장 목록’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2014년 내게 주어진 첫 미션은 바로 이 목록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수습 기간을 마치고 정직원이 된 내게 주어진 첫 임무였다. 벌써 슬럼프가 온 것인지 새해에 초에 주어진 미션을 1월 한 달을 끝날 때가 되어서야 겨우겨우 마무리를 지었다. 내가 이 일에 재능이 없는 것인지 새해 들어 마음을 못 가두고 있다. 시간이 오래 걸린 것은 물론 사진을 찍고 치수를 재는 작업 과정 중에도 계속해서 마음에 불만이 차올랐다.
다 끝나고 보니 그리 투덜거릴 만한 일도 아니었는데 왜 그랬을까 싶다. 멋들어지게 하고 싶은데 그게 잘되지 않아 그랬을까. 이번 일뿐 아니라 세상만사의 많은 일이 지나 놓고 보면 별일이 아닌데 당시에는 정말 화가 나고 짜증이 나서 어찌할 바를 모를 때가 많다. 새해 초부터 어믄 일에 홀로 용을 쓰다 보니 여러 생각이 든다. 올해의 신고식 같은 느낌이라 이를 두고두고 기억하며 조금 멀리 내다보며 살아 봐야겠다. 그리고 연말엔 내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확인해 보면 흥미로울 듯하다. 140129
책공방에 들어온 지도 1년이 가까워져 오고 있다. 그런데 그때나 지금이나 그렇게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물론 내가 책공방에 익숙해지고 선생님과도 친해졌지만 생기를 점점 잃어가고 있다는 소소한 변화는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것과 별개로 일적인 면에 있어서 나 스스로 제법 능숙해졌다고 느끼고 선생님한테도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아직 어림도 없다. 능숙은 고사하고 쥐뿔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는 것만 같다.
선생님의 요청에 따라 이것저것 마구마구 미션을 수행해야 할 때는 정신이 하나도 없어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런데 이따금 선생님이 없고 관람객도 없이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야 할 때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고뇌에 빠지곤 한다. 선생님 없이도 나 혼자 으쌰으쌰 해서 뭔가 새로운 일을 도모하고 해야 할 텐데 나에게 과연 그만한 내공이 있을까 싶었다.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선생님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기획자가 되어야 한다’, ‘자꾸 새로운 사람을 만나야 한다’ 하는데 나에게 둘 다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머리로는 이해하고 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런데 엊그제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문득 ‘네가 제자리를 찾은 것 같아 좋아 보인다’는 이야길 했다. 그 이야길 마주하니 그동안 잠시 잊고 있었던 것들이 떠올랐다. 처음 책공방에 와서 느꼈던 기분, 다른 사람들이 내게 이렇게 멋진 곳에서 일해서 행복하겠다고 했던 이야기, 또 나 스스로 책공방과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일 등등. 무엇보다 그동안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되어 매일매일 호기심으로 가득 찼던 날들이 떠올랐다. 그렇게 그동안의 시간을 돌이켜 보았다.
그랬다. 내가 책공방에 와서 열심히 해보겠다고 한 것은 내가 이쪽에 무슨 특별한 재능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처음 해보는 일이라 내가 잘할지 못할지는 모르지만 한 번 해보겠다 한 것이다. 한번 해봐서 잘하면 완전 땡큐지만 잘하지 못하더라도 내가 책을 좋아하고 아이들을 좋아하니 그렇게 좋아하면 못 하는 것도 어느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조금 해보니 (노력은 쥐뿔 하나도 안 하고) 그리 특별한 재능도 없는 것 같아 나는 슬그머니 겁이 났던 모양이다. 그런데 친구의 이야길 듣고 정신이 번쩍 들며 깨달았다.
내가 지금 이 시간과 책공방을 소중하게 생각하는구나. 그래서 잘하고 싶은데 잘되지 않아 이것들을 놓치게 될까 봐 불안하구나.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지금처럼 몰입했던 시기가 있었나? 임용 고시 준비할 때도 공부를 열심히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몰입의 시간은 아니었던 것 같다. 열심에는 집중력이 있다면 몰입에는 흡입력이 있다. 이렇듯 열심과 몰입은 힘의 종류가 다르다. 140319
홀로 공방을 지킬 때면 자연스레 생각이 많아지고 무언가를 정돈하고 정리하게 된다. 이번 주도 선생님이 출타 중인 틈을 타 이것저것 정리를 하다 내 흔적들을 돌아보게 됐다. 오늘은 그날그날 주어지는 선생님의 미션을 수행하느라 밀려버린 일기를 쓰다 그 일기장에 처음 썼던 일기를 보게 됐다. 당시에는 너무 창피해 남은 물론이고 나조차도 보고 싶지 않았다. 잘 쓰지 못한 글에 부끄러움까지 더해지니 피하는 수밖에 없었다.
잘 쓰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마음은 마음일 뿐 결과물의 퀄리티는 별개의 문제였다. 하지만 내게 주어진 일은 해내야 했기에 정말 어쩔 수 없이 쓰는 것 자체에 의의를 두고 썼다. 그런데 시간의 힘일까. 몇 개월이 지난 지금 그때 그 글을 읽어 보니 그렇게 못 볼 수준은 아니었다. 물론 그렇게 잘 쓴 글이라 할 수는 없지만 창피할 만한 수준까진 아니었다. 적어도 잘 쓰고 싶어 잔뜩 힘을 준 껍데기 같은 글은 아니었고 내가 쓴 글이라 그런지 그때 그 마음이 온전히 담겨 있었다. 내가 쓰는 글은 기록을 위한 글이니 그거면 족했다.
그리고 작년 8월, 여러 가지 문제로 힘들었던 시기에 신문 기사를 보고 마음을 새롭게 다지며 썼던 글도 마주했다. 신문 기사는 영국의 문화 중심지라 할 수 있는 ‘에든버러’와 관련한 내용이었다. 기사 내용이 좋아 전문을 옮겨 적고 그 밑에 그 기사 분량의 A4용지 한 페이지 정도의 코멘트 아닌 코멘트를 적어 두었다. 그때 꽤 인상 깊게 읽었던 기사는 다시 봐도 역시 유용하고 좋았다. 그리고 나의 글 또한 덩달아 좋은 글처럼 둔갑해 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다.)
그때 당시엔 뭔가 ‘기록을 남기기 위해’ 이 글을 적었다기보다 그냥 그때 그 마음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어서 적어 둔 것이었다. 이렇게 지나고 보니 ‘아, 내가 이때 이랬구나!’ 하며 그때의 나를 만날 수 있는 좋은 매개체가 되었다. 이 글이 없었더라면 난 그때의 나를 만날 수 없었을 것이고 만나더라도 아주 희미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글을 통해 분명하고 또렷하게 과거의 나를 만나게 되었다. 그 글을 써두었던 내가 기특해 엉덩이를 두들겨 주고 싶을 정도다. 그뿐만 아니라 ‘아 나 좀 괜찮았네?’ 하는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남들이 보기엔 별거 아닌 글일지도 식상한 글일지도 모르지만 모든 일의 시작이 반인 것처럼 내가 쓴 글은 일단 내 마음에 들어야 하는데 일단 통과에 위로까지 받았으니 반절 그 이상이다. 14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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