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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희 Mar 21. 2024

시퍼러딩딩한 4월이다

짭짤이 토마토와 바나나 이야기


오늘도 글러 먹었다. 어제도 열 시쯤 집에 와서 이것저것 하다 보니 시간이 뚝-딱 가버려 4시에 잤는데.

이거 이거 오늘도 조짐이 좋지 않다. 생각 상자가 열리고 이야기의 물꼬가 트였다.


아침부터 분주했다. 순간의 실수로 일이 번거롭게 되었다. 적립을 하면 안 되는데 적립을 해야 저렴하게 살 수 있다는 말에 냉큼 '그럼, 해주세요' 했던 것이 사달이 났다. 역시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덕분에 어제 갔던 마트에 오늘 다시 가서 적립 없이 영수증을 받아야 했다. 적립을 안 하니 자릿수가 달라졌다. 줄어든 게 아니라 늘어났다. 내 돈도 아닌데 내 돈처럼 아까웠다. 나는 내 것이든 남의 것이든 아까운 건 똑같이 아깝다. 큰 병인 줄 알면서 쉬이 고쳐지지 않는다. 어쩌면 선생님이 나를 아끼는 이유 중 하나일지도.


이왕 간 거 영수증 발행만 하고 오기 아쉬워 간 김에 다른 것도 살 요량으로 매장에 들어갔다. 참새가 방앗간을 못 지나치듯 3,980원짜리 바나나를 지나치지 못하고 집어 왔다. 아주 시퍼러딩딩한게 딱 내 스타일이었다. 마트에서 볼 일을 보고 다른 볼 일을 보러 이동했다. 그렇게 아침을 시작하니 오전이 사라졌다. 배가 고파져 바나나 한 개를 떼어먹었다.



근데 와- 껍질이 잘 안 까질 정도로 싱싱했다. 아니 싱싱을 넘어서 쌩쌩했다. 이제까지 먹었던 것 중 최강이었다. 싫으면서 좋았다. 지금 당장 맛있지 않아서 싫었지만 곧 엄청 맛있어질 거라 좋았다. 삶은 이런 식이다. 좋은 것만도 싫은 것만도 없다. 그 와중에 우리는 끊임없이 선택을 하고,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진다. 그리고 우리의 선택은 무언가를 충분히 알고 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훨씬 많다.  


어제 보다 추워진 날씨에 잔뜩 움츠리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현관문 앞에 택배 상자가 쌓여있다. 열어보기 싫은 물건 하나, 꼭 필요한 물건 하나, 친구가 보내온 짭짤이 토마토 박스 하나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요즘 한창인 짭짤이 토마토. 짭짤이 토마토는 그냥 토마토가 아니다. '안 먹어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 먹은 사람은 없다'는 진부한 표현을 쓸 수밖에 없을 정도로 정말 맛있다. 토마토는 당뇨인 아빠가 그나마 맘껏 먹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식량 중 하나다. 맛잡이 아빠는 맛없는 토마토를 사다 드리면 잘 안 드시고 짭짤이 토마토를 사다 드리면 정말 열심히 드신다. 그렇게 흡족하게 드시는 모습이 보고파 이맘때쯤 되면 종종 사다 드리곤 했다. 작년에도 몇 번 사드렸는데 너무 익은 것이 오거나, 맛이 덜한 것, 병든 것이 와서 망설이던 참이었는데 마침 친구가 보내준 것이다.


시간이 늦어 맛이나 보려고 하나 씻어 먹었는데. 왘- 마법의 약이라도 넣은 것마냥 달디달다. 밤 양갱보다 더. 진짜다. 토마토가 너무 맛있었다. 자신이 맛있었던 것을 내게도 보내준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웠다. 내가 종종 갖는 마음이라 더 크게 와닿았다. 요즘 나는 뭐 대단한 일이 아니라 어쩌면 너무너무 사소한 일과 이야기, 생각, 감정에 오래 머물러 있곤 한다. 엄청나거나 대단한 일들은 예전만큼 재미가 없다. 몇 년 사이 나는 정말 많이 변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토씨 하나 안 바뀌었을 정도로 똑같은 구석도 많지만. '예전엔 그랬는데 지금은 아니야'와 '과거의 나는'이라는 말을 자주 쓰기도 하고, 예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혹은 보이지 않았던 또또는 이해되지 않았던 것들이 이해가 되고, 중요하게 여겨질 때가 많다.



정말 정말 오랜만에 글을 쓴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낮에 먹었던 새파랗디 새파란 바나나와 지난 토요일에 친구가 보내준 짭짤이 토마토 때문이다. 할 말이 없어서 글을 못 쓰고 안 쓰지 않았다. 오히려 할 말이 너무 많아서, 어떤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엄두가 안 나서, 한 번 시작하면 댐이 무너지듯 이 말 저 말 너무 많이 쏟아 낼까 봐. 쓰지 않고 지냈다. 그래도 일기는 꾸준히 쓰고 있다. 다행한 일이고 행복한 일이다. 어느 때인가는 일기를 쓰다 생각의 구렁텅이에 빠져 한나절을 우습게 보내기도 한다. 그렇게 뭐 한 일 없이 이 생각, 저 생각하다 시간을 보내서 그런지 시간은 쏜살같이 여겨지곤 한다. 일을 해도 놀아도 멍 때려도 시간이 너무 빨리 간다. 이제 그냥 축복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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