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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희 Jul 17. 2020

40. 양질의 기록은 양질의 콘텐츠다

남영동 5층 15호실 / 김근태 / GT클럽 희망

40. 양질의 기록은 양질의 콘텐츠다

남영동 5층 15호실 / 김근태 / GT클럽 희망


180901-1014 최근에 나왔던 영화인 ‘공작’을 재밌게 봤다. 영화를 보고 얼마 후 영화이자 실제에서 ‘흑금성’이라 불렸던 실제 인물의 인터뷰도 접했다. 국가를 위해서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걸었던 그는 상황이 갑작스럽게 변하자 몇몇 사람들에 의해 한 순간에 공작원에서 간첩 신분이 되고 만다. 간첩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쓴 것도 모자라 몇 년간의 감옥생활까지.


영화에서나 현실에서나 어떻게 죽지 않고 견딜 수 있었을까, 어떻게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을까 무척이나 안타깝다는 생각과 대단하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는데 인터뷰에서 그 대답을 찾을 수 있었다. 감옥생활을 하던 중에 그는 미친 듯이 썼다고 했다. 견디기 힘들었을 텐데 어떻게 그것들을 다시 떠올리고 할 수 있었냐는 질문에 그렇게 쓰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서 살기 위해 썼노라 답변을 한 것이 인상 깊었다.


몇 년 전에 ‘남영동 1985’라는 영화를 봤을 때 받았던 충격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영화를 본 날은 물론이고 며칠 동안이나 기분이 울적했다. 영화를 보고 식사시간이 되어 밥을 먹어야 하는데 밥 먹는 것조차 죄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지금 현재 내가 누리는 사회가, 자유가 이러한 분들에 피와 눈물 위에 세워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끔찍했다. 이 영화를 찍는데 이 책과 같은 기록이 토대가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요즘 나는 대부분의 픽션이 현실을 뛰어넘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전까진 너무나 당연하게 기상천외한 이야기는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많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요즘 생각이 많이 달라지고 있다. 생각지 못한 일 혹은 이야기 중 그렇게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보다 실제 있었던 일의 비중이 훨씬 높고 디테일할 것 같다고 생각한다. 요즘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말도 안 되는 일도 그러하고 이 책의 내용도 그러해서 이러한 생각을 갖게 된 듯하다.


책을 읽는 처음부터 끝까지 참 아팠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일그러지곤 했다. 도로에서 차에 치여 죽어 있는 동물들을 보는 기분이었다. 외면하고 싶을 정도로 끔찍한 이야기이기 때문이고 너무 안타까운 마음이고 죄스러운 마음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마음속으로 하는 기도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내려서 사체를 수습해 묻어주는 것이 정석이겠으나 나에겐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볼 자신도 그것을 만질 자신도 없다. 마음으로는 백번 그래야 한다 생각하고 매번 그런 마음이지만 빠른 속도를 핑계로 위험을 핑계로 나의 용기 없음을, 비위 약함을 정당화한다. 책을 읽다 보면 하느님에게 욕을 하는 부분이 나온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라는 마음보다 ‘오죽했으면’하는 마음과 ‘그럴 만도 하겠다’하는 마음이 훨씬 더 컸다.


어떠한 기록, 그 자체는 우리 생각처럼 흥미진진하거나 완벽하지 않다. 하지만 기록만이 가질 수 있는 진정성과 특별함이 있다. 뭔가 모르게 묘한 끌림 때문에 이 책을 읽게 됐다. 아마도 고인이 되신 노회찬 의원의 소식을 듣고 허망했던 마음 탓이었던 것 같다. 극악무도할 정도로 나쁜 짓을 했던 사람들은 잘만 살아가는데 그에 비해 작다고 할 수 있는 잘못을 못 견디고 어떤 사람들은 괴로움을 못 이기고 스스로 꺾어진다. 기록은 지난 간 일이다. 하지만 기록은 지나간 것을 통해 우리에게 값진 열매를 내어 놓는다. 때로는 그렇게 해야 한다는 가르침이고 때로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기록이 뭐가, 왜 중요하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자판기식 사고가 보편화된 요즘과 같은 세상에 기록은 참 어려운 이야기이다. 투자했다고 해서 바로바로 결과물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기록을 열심히 하고 있는 나조차도 때때로 이걸 해서 뭐하냐는 생각이 종종 찾아오는 것을 막지 못한다. 하지만 기록은 투자한 만큼의 결과물은 물론 그 과정 자체에서 기록자 스스로가 얻게 되는 결과물 또한 이미 충분히 값지다고 말할 수 있다. 지금 이 글이 제 3자에게는 의미 없는 이야기일 수 있으나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를 찾아왔던 생각과 감정을 정리하고 이렇게 저장하는 과정 자체만으로도 나에게는 긍정적인 효과와 의미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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