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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희 Jul 16. 2020

39. 가끔은 말랑말랑한 것도 좋아

빈티지팩토리 / 안지훈 / 학고재

39. 가끔은 말랑말랑한 것도 좋아

빈티지팩토리 / 안지훈 / 학고재


181005-06 “빈티지 제품이라고 해서 모두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좋은 제품으로 인정받으려면 고유의 디자인을 통한 독창성과 높은 품질이 보장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누가 제품을 디자인하고 생산했는가를 찾는 작업이 중요하다. 수집은 그 대상이 무엇이 되었든 물건이 지닌 가치를 발견하는데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발견은 일상에서 이루어진다. “ 본문 중


땀이 후끈나도록 하는 운동을 해야 운동했다는 느낌이 드는 것처럼 나는 생각할 거리, 기억하고 싶은 거리가 많아야 책을 읽었다는 느낌이 든다. 내가 그런 책을 주로 읽어서인지 내 성향 탓인지 어쨌거나 나는 책을 참 더디게 읽는다. 그런데 내가 평소에 보는 책이 가마솥 밥이라면 이 책은 컵라면처럼 간편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휘리릭 읽었다. 처음에 선생님이 이 책은 한 두 시간이면 충분하다고 하였는데 그 말이 진짜였던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 주에 책 정리를 하다가 보관하지 않아도 될 책들이 나왔고 그중에 내가 읽어보고 판단할 만한 것들 몇 권을 챙겼다. 지금 읽으려고 읽어야 해서 읽을 책들이 얼핏 열 권 정도가 되고 살짝 발만 담궈 놓은 책도 대여섯 권 정도 되는데 이 무슨 욕심인가 싶으면서도 차마 책을 놓지 못했다. 한번에 여려 권을 읽는 사람이면 그냥 그런가보다 하겠으나 나는 한 권씩 읽는 사람이니 지금 이 상황은 대략 난감이다. 그런데도 선생님의 이야기에 ‘그래요?’ 하며 읽기 시작한 책은 정말 술술 넘어갔다. 그러나 술술 넘어갔다고 해서 마냥 가볍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빈티지 물건을 수집하는 저자는 자신을 이야기 수집가라고 소개했다. 수집의 백미는 그것들을 다 모아놓은 결과물이라고 생각한 나에게 저자는 결과가 아닌 과정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모은 물건을 만나게 되기까지의 과정, 그 물건을 선택한 이유, 그것을 자신의 공간으로 데려오기까지의 과정, 사용하면서 느낀 점 등을 두루두루 풀어 놓았다. 그리고 그 안에 그 물건의 사진과 구입가격과 일반적인 설명을 곁들였다. 에피소드만 모아 놓았으면 정말 가벼웠을텐데 그렇게 그 물건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을 곁들이게 되면서 가볍지만은 않은 그런 책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설명이 있어야 그 물건의 히스토리나 브랜드 가치를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저자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기 때문이다. 모르면 혹은 궁금한 사람은 찾아보면 된다 생각할 수 있으나 내가 찾아서 보는 것과 책의 내용으로 접하는 것과는 꽤 큰 차이가 있다.


나는 우리가 어떠한 음식의 맛을 기억하는 정서는 그 맛이 정말 뛰어난 맛이어서가 아니라 그때 당시 감정 상태와 분위기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보니 이는 비단 음식만이 아니라 사물을 보는 시각에도 적용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때 당시 엄청나게 예쁘게 보였던 사물이 나중에 보아도 예쁠 때도 있긴 하나 아닌 경우도 종종 있었다는 것을 떠올리게 되었다. 저자는 물건의 이야기를 하기보다 물건에 얽힌 이야기을 하고 있다.


내가 생각했을 때 상대적으로 부유했던 유년시절과 유학생활을 한 것으로 보이는 저자의 이야기에 아주 살짝 거부감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옛날 우리 아빠가 즐겨신던 금강제화 구두가 ‘처치스 윙팁 레이스업 슈즈’ 구두의 디자인와 거의 흡사하다는 사실은 무척 흥미로웠다. 내가 살면서 이러한 것들에 눈을 뜨지 않았다면 그 구두는 그냥 금강제화의 뿅뿅뿅 구두였을텐데 그 구두가 어떤 브랜드에 영향을 받았고 그 앞에 구멍을 그렇게 뚫게 된 이야기를 알게 되니 뭔가 신기했다. 이것 또한 내가 궁금했다면 충분히 찾아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이렇게 흥미롭게 기억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책을 읽는 내내 부러웠던 것 중 하나는 유럽의 빈티지 문화다. 저자는 벼룩시장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벼룩시장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이들이 아닌 건전하고 의미있는 소비활동을 하고 싶은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운영해 왔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맞장구를 쳤다. 요즘 내가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는 건강한 소비다. 이를 저자는 건전하고 의미있는 소비활동이라고 구체화시켜 주었다.


지역에서 예술가들이 지원에만 목을 맬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예술에 대한 소비활동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싸고 좋은 것을 찾기 보다 조금 비싸도 의미있는 것에 무게를 두는 소비의식이 자리잡았으면 좋겠다. 헌 것에 대한 거부감보다 싸고 가치없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강해졌으면 좋겠다. 나 또한 잘 실천하지 못하고 있고 누군가는 배부른 소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허나 내가 그 길로 가고 있지 못해도 올바른 방향이 어디인가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내가 그길로 걸을 수 있게 되었을 때 방향을 잃지 않고 잘 찾아 갈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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