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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희 Jul 31. 2020

50. 두 달 동안 동고동락했던 책이다

한국 디자인, 어디로 가는가 / 최범 / 안그라픽스


50. 두 달 동안 동고동락했던 책이다

한국 디자인, 어디로 가는가 / 최범 / 안그라픽스


190629 평론가의 글이라 그런지 그의 글은 굉장히 단호해서 날카롭다는 느낌을 준다. 어렵고 힘든 때에 책만큼 위로를 줄 수 있는 존재도 흔치 않다. 이 책을 만나던 때도 그러했다. 우연찮게 시간이 남아 들렀던 알라딘을 서성이다 이 책을 만났다. 다른 여러 가지 책을 제끼고 이 책을 손에 쥔 것은 ‘어디로 가는가’라는 철학적인 질문이 마음에 들어서였다.


그때 당시 나는 누구라도 붙잡고 묻고 싶었다. ‘ㅇㅇㅇ란 무엇이냐고 이러한 것이 진짜 ㅇㅇㅇ이냐고 ㅇㅇㅇ와 관련한 사람들 한 명 한 명에게 따져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의 날카로운 말들을 마주하며 나는 간접적으로나마 속이 시원해졌다. 그리고 감히 나도 그처럼 날카로운 말을, 세상이 좋아하는 이야기가 아닌 세상에 필요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노라 마음먹었다.


이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정치학자 최장집 교수는 ‘민주화’ 이후 한국 민주주의가 더 나빠졌다고 말한다. 나는 ‘세계화’ 이후 한국 디자인이 더 나빠졌다고 말하고 싶다.” 이것이 이 책의 첫 문장이다. 나는 이 문장에서 디자인이 아닌 책문화도 그러하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이 책의 여러 문장들은 나의 마음에 들어와 나의 머리를 분주하게 했다.


그 후 이 책은 이렇게 이어진다. “‘세계화’ 이후 디자인 담론이 크게 증폭됐지만 정작 현실은 더욱 천박해지고 있는 것이 한국 디자인의 문제이다.” 이어지는 내용에서도 나는 디자인 문화 대신 책 문화로 대체하여 책 문화도 그러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물론 디자인과 책 문화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고 디자인과 달리 세계화가 책문화에 영향을 끼친 것보다는 다른 전반의 것들의 영향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책에서 저자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구호가 높아질수록 상대적으로 현실은 더욱 초라하게 느껴지는 법이다.’라는 뜻에서 하는 이야기이다.


‘디자인의 문화 수준이 디자인의 산업적 발전에 근본적인 밑거름이 된다는 인식의 전환이 요청된다.’ 책을 읽으며 몇 번이나 곱씹고 곱씹었던 문장이다. 이 문장을 곱씹으며 나는 출판 분야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 문장을 이렇게 고쳤다. ‘출판 아니 책 문화 수준이 출판 산업 발전에 근본적인 밑거름이 된다는 인식의 전환이 요청된다.’ 이 문장 하나로 인해 내 머릿속에선 온갖 생각들이 소용돌이쳤다.


책은 문화인가부터 시작해 책 만드는 사람들은 문화예술 종사자인가 하는 생각, 예술에도 순수 예술과 상업 예술의 분류가 있듯 (그 경계가 애매모호하지만) 책 또한 마찬가지가 아닐까. 왜 책 안에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들은 문학이라는 이름 하에 작가라 칭하고 그것을 갈고 다듬어 더 멋진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편집자는 그 범주에서 빠져있는 것일까. 또 책의 한 분야인 디자인의 경우는 그 범주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은 왜인가. 책에 들어가는 글을 쓰는 사람,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작가이고 왜 이 책을 어떻게 하면 독특한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는 기획자는 작가가 아닐까. 영화감독처럼 북 디렉터도 그 창작성을 인정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별별 생각이 다 솟구쳐 올라왔다.


책을 읽다 보니 그때 당시 지자체 활성화 전략으로 너도나도 디자인을 거론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금 여러 지자체에서 책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그 속속들이 들여다보며 정말 의지를 가지고 하는 곳은 많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어떠한 콘텐츠를 이용하기 바쁘지 이를 제대로 구현하는 데는 무관심한 듯하다. 물론 관심이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낫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마냥 좋다고 할 수는 없다. 아니다 누군가의 말처럼 잘못하느니 안 하느니만 못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무언가를 잘 하지 못하는 것을 사람들은 모두 지켜볼 것이고 그로 인해 그 방식이 아니라 그 자체를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즉 책 자체를 싸잡아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잠시 스쳐 지나가는 이들이 일하다 보니 일에 대한 애정은 물론 전문성 확보도 어렵다. 지방자치단체가 어떠한 사업에 주력하는 것은 그에 대한 무언가 의식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이슈화시킬 무언가가 필요한 것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사람을 키우려는 노력을 등한시할 수는 없다. 사람은 공장에서 찍어내는 물건이 아니라 매우 예민한 나무와도 같다고 생각한다. 농사가 얼핏 보기엔 씨만 뿌리면 싹이 나는 것처럼 쉬워 보이지만 씨앗에 따라 토양에 따라 기후에 따라 온갖 다양한 변수가 있다. 사람 농사는 더욱 그러하다.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만 하고 그랬다고 해서 꼭 잘 되리라는 보장도 없다. 다만, 그렇지 않았을 때 보다 그랬을 때에 확률이 쑤욱- 하고 올라가는 것뿐이다. 그런데 요즘 그렇게 사람을 키우는 곳이 없다. 대체로 공장에서 물건을 찍어내듯 자판기 식으로 사람이 키워진다고 생각하고 그러길 바라는 듯하다. 사람뿐 아니라 대부분의 것들을 그렇게 다루는 것 같다. 그래서 어떠한 콘텐츠를 활용한다기보다는 쓰고 버린다는 느낌이 든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의 다양한 상황들을 이해할 방법이 없다. 지금 이 책에 나온 글이 써진 몇 년 전에 다들 디자인에 열을 올렸는데 지금은 다 사라지거나 힘을 잃고 허울만 남았다.


내가 이러한 사실에 더욱 화가 나는 건 몇 년 전에 ‘디자인’이 그랬듯 지금은 ‘책’이라는 콘텐츠가 그렇게 쓰이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히 우려스럽다. 여기저기 다 ‘책의 도시’를 선포하고 책에 엄청난 관심이 있는 냥 이야기한다. 그렇게 누구나가 이야기할 만큼 ‘책’은 좋은 콘텐츠이며 한편으론 만만한 콘텐츠여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좋은 거면 일단 한다는 것 자체가 좋은 것 아니냐 할지 모르지만 넘치면 모자람만 못하고 잘못하면 아니 한 만 못하게 되는 이유는 앞서 말했듯 그 자체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피로감으로 오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무언가를 먼저 하는 사람들은 항상 뒤에 오는 사람들에 대한 부채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말하면 세상에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냐고, 이런 거 저런 거 다 생각하면 아무것도 못 한다 할지 모르지만 지금 우리가 접하고 있는 이상하고 요상한 사회 제도 대부분은 잘못하는 사람들이 있어 그 잘못을 못하게 하려다 보니 그러한 결과를 얻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 까다롭게 안 해도 잘하면 굳이 까다롭게 법을 만들지 않아도 되는데 자꾸 제도를 악용하고 원칙이나 양심을 무시하고 하니 점점 까다롭게 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싶다.


블랙 컨슈머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가장 많은 피해를 보는 것은 그런 소비자를 상대하는 기업이 아니라 같은 입장에 처한 소비자이다. 그들이 많아질수록 다른 소비자들은 이전에 기본적으로 받았던 서비스를 지속적으로 받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진짜 상품이 불량이어서 환불하려고 하는데 블랙컨슈머가 많아지면서 환불 절차가 까다로워져 상품의 불량이 내가 구입하기 이전부터 있었던 것임을 증명해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과 같다. 보험사기단이 많아지니 일반 사람들도 보험사기단으로 인식해 이 일이 사기가 아님을 증명해야만 보험금을 받을 수 있는 구조가 되는 것과 같지 않을까 싶다.


책에서 저자는 디자인 문화는 ‘경험된 것’이라 주장한다. 더 나아가 이를 좀 더 폭넓게 확대하여 문화는 ‘경험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험이 부재한 상태에서 무언가를 생각하고 주장한다. 혹은 부분적인 경험을 전체로 확대하고 얕은 경험은 깊은 경험으로 확대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겉으로 보았을 때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아 보인다. 문화는 어느 한순간의 그 영향력이 나타나지 않고 다른 것들과 달리 평가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떠한 사안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관계자는 그 사안에 대해 객관성을 잃어 메시지에 힘이 실리지 않고 그렇지 않은 비 관계자는 전문성이 없어 메시지가 정확하지 못하다. 그리고 제3 자라 할 수 있는 일반 사람들은 관심이 없다. 그래서 무엇이 잘못되었다 이렇게 해야 한다 공식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혹은 하는 사람이 없다.


나는 이 책의 저자처럼 책 문화와 관련해서도 그 외의 다양한 문화와 관련해서는 날카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평론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예전엔 이런 사람들의 필요성을 잘 알지 못하였다. 그냥 입으로 떠드는 사람들이라고만 생각했다. 정말 얕은 생각이었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그만큼 글을 읽어야 하는 것과 같이 제대로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노력이 필요하다. 경험을 더해갈수록 무언가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진짜’의 부재가 문제임을 깨닫는다. 이 분의 글에는 날이 서있다. 얼마 전 뵈었던 어떤 분의 이야기에서도 날이 서 있어서 참 좋았다.


두 분 모두 옳은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해 나는 이 두 분의 팬이 되었다. 그런데 나와 같은 사람들은 많지 않다. 사람들은 대체로 싫은 소리를 하는 사람보다 듣기 좋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내가 작년부터 지금까지 줄곧 생각하고 있는 것 중에 하나는 싫은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입에 쓴 약이 몸에는 좋다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나 약이 쓰면 아무리 좋다 해도 먹기가 고역스러운 것 또한 사실이다. 싫은 소리는 듣기 싫은 소리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어야만 한다.


이 책에는 이런 인용 구절도 등장한다. “생존을 이어가기 위해 무엇이 되어도 좋고 아무 곳에 있어도 되는 절충주의는 대단한 적응력과 흡수력을 가지지만 새로운 스타일의 문화를 만들어가지 못한다_ 조혜정” ‘생존’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위대하긴 하지만 참 무서운 존재임을 실감한다. 이 단어의 힘은 너무도 막강하여 그 앞에선 거의 대부분의 단어들이 힘을 잃는다. 당연한 이치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정당화되고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 않을까 싶다.


저자의 글에서 나는 그때 당시의 현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책은 디자인이라는 한 분야, 한 시대의 축을 기록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0년이 된 이야기가 왜 철 지난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고 바로 어제 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것일까. 근본적인 이야기라 그런 것인지 저자의 안목이 탁월했던 것인지 사회가 아직도 변하지 못한 것인지 모르겠다. 책 내용 중 ‘정보란 그것이 전달하려는 대상만이 아니라 그것을 접하는 주체에 대해서도 알려준다.’라는 문장도 인상 깊었다.


이 얇디얇은 책을 두 달 동안이나 잡고 있었던 것은 나의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와 쉬이 넘어갈 수 없을 정도로 내게 생각을 분출할 수 있는 매개체의 역할을 톡톡히 해준 탓이다. 처음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는 그 날카로움에 시원함을 느꼈으나 뒤로 갈수록 시원함을 넘어 분주함으로 다시 뜨거움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책을 다 읽고 난 지금은 답답한 마음이 되었다. 그래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나는 이에 대해 명확한 답을 내어놓지 못하고 있다. 삶을 살아가는 것은 끊임없이 나만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나는 이제껏 그래 왔듯 앞으로도 역시 나만의 답을 찾아가며 살 것이다. 그 사실은 변함이 없으나 솔직히 좀 고되다. 그래도 어쩌랴 이것이 나인 걸. 선택의 여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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