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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희 Aug 01. 2020

51. 기록이 책이라는 증거 1

코끼리 가면 / 노유다 / 움직씨


51. 기록이 책이라는 증거 1

코끼리 가면 / 노유다 / 움직씨


190703 서울국제도서전 당시 책공방은 다들 어쩜 하나같이 저질 체력인지 힘겨워하며 한 명이 앉으면 다 같이 앉고 한 명이 일어나면 다 같이 일어났다. 그리고 틈만 나면 의자에 앉아 있다가 우리 책에 관심을 갖는 분이 있을 때만 일어나곤 했다. 그런데 책공방 바로 맞은편에 자리한 앞집은 우리와 많이 달랐다. 스텝이 세 명이나 있는 책공방과 달리 거의 홀로 지키다시피 했던 앞집의 그분은 거의 항상 서서 자리를 지켰다. 참 대단했다. 나중에 책공방 책에 관심을 보여주시며 셋째 날인가 현금으로 시원하게 개시를 해주셨다. 고마운 마음에 우리 또한 현금을 들고 가서 그곳의 책을 살펴보게 되었다.


솔직히 나는 평소에 페미니즘에 대해 관심을 크게 두지 않은 터라 별 생각이 없었다. (내가 책문화에 계속해서 이야기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나 또한 어떠한 분야에 있어 관심이 소홀함을 깨닫고 반성한다. 물론 모든 분야에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이렇게 무관심한 동안에 몇몇의 사람들은 자신을 희생하며 메시지를 전하고 그로 인해 세상은 변한다. 그리고 그렇게 변한 세상의 혜택은 목소리를 내지 않았던 그런 목소리에 무관심했던 나도 함께 누리게 된다는 지점에서의 반성이다.) 암튼 그래서 선생님과 인턴에게 가서 책을 고를 것을 주문했고 책을 한 권 샀는데 다른 책 한 권을 선물로 주셨다. 내가 읽은 책은 바로 그 책이고 이 책은 그렇게 책공방에 선물로 들어오게 되었다.


잠시 살펴보려다가 쭈욱- 읽게 되어버린 이 책은 내가 대단했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분의 책이었다. 그리고 놀랐던 것은 아무런 정보도 없이 이 책을 접했던 지라 당연 창작, 픽션인 줄 알았던 이 책의 내용이 나중에 알고 보니 실화, 즉 논-픽션의 책이었다 사실이다. 내가 이 책을 마주했던 기분은 마치 룰루랄라- 방심하고 있다가 로드킬의 흔적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끔찍함과 슬픔과 분노와 반성 등 여러 감정이 뒤죽박죽-되는 딱 그런 기분이었다. 때로는 외면하고 싶은 진실이나 마주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하지만 내가 인상 깊었던 것은 그의 문장이었다. 내게 복잡다단한 느낌을 전해주는 이야기를 그는 참 예쁜 문장으로도 적어 내려갔구나 생각했다.


책을 읽는 동안 내용도 내용이었지만 저자의 문장들이 참 좋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다. 분명 에세이인데 마치 시를 읽는 느낌이었다. 내가 그런 느낌을 받기 시작한 첫 문장은 바로 ‘처음도 끝도 아니었어’라는 문장이었다. 만약 나였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그것이 몇 번째였는지를 기억해내어 정확히 몇 번째였고 그 뒤로도 몇 번이나 그런 일이 있었다고 표현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나와 많이 달랐다. 이 문장 안에는 여러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여러 번이었다는 말과는 다르지만 같은 의미를 지닌 이야기였다. 처음도 아니었고 끝도 아니었다. 이전에도 여러 번 있었고 이후에도 여러 번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내 마음에 들어왔던 본문의 내용을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다. 한 자 한 자 옮겨 적었다.


{흔적 없이 사라진 이야기 시간 속에 분명 있지만 없는 것처럼 된 이야기, 누군가는 이미 기억에서 지웠고 또 누군가는 잊으라고 해도 잊혀지지 않는 이야기, 우리들의 이야기/ 거리의 반항아같은 너의 꾸밈이 세상 기준에 맞추어 가는 나의 은밀한 순응과 타협을 떠올리게 했다./ 말을 헤아려 들었고 속엣말도 제법 잘 꺼냈다. 툭 내뱉는 말이 거침없었다. / 연비 좋은 자가용을 갖는 일보다 차 없이도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건강에 힘울 쏟아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 “서울살이 힘들지 않아요?” 순간 콧등이 시큰했다./ 생존 경쟁은 갈수록 버거워지고 나는 한계에 다다랐다. / 원치 않게 남의 이야깃거리가 되고 말았다. / 동거인과 다투었고 그녀의 일방적인 요구를 듣느라 잠을 못 잤다./ 불한당 무리에는 내 오랜 친구도 있었다. 나무를 좋아한다던 친구였다. 함께 이상을 논하며 인생은 아는 냥 같이 폼도 잡았다./ 안녕, 코끼리. 난 널 잘 알아. 어릴 때 지나간 물웅덩이를 칠십 년이 지나도 찾을 만큼 기억력이 좋다면서? /사람의 이름은 가족이나 성별처럼 태어날 때 자기 마음대로 정할 수 없어 / 구미는 누구에게나 낯선 도시야/ 코끼리, 그 일은 처음도 끝도 아니었어. / 죽은 자들도 죄지은 이가 아니다./ 칼날이 거두어 갈 숨을 걸고서도 자기 목소리를 지킨 사람들이었다. / 엄마의 낡아 빠진 조언은 나를 위험 속에 계속 머물게 했다./ 아주 사소한 순간이 나를 침묵하게 했다./ 범죄 사건의 방관자가 된 이유는 추악한 범인들을 가족으로 여긴 탓이다. / 우리가 겪은 일은 ‘세상이 절대 알아서는 안 될 더러운 이야기’로 말했다. / “식물을 잘 키우는 사람이 연애를 잘 한대요. 서울로 돌아올 때까지 잘 키워요.” / 다음 여정에서는 나도 세렝게티의 할머니 코끼리처럼 현명해질 것이다./ 기억의 무게만큼 아는 것이 많으며 함정이 있는 길은 굳이 걷지 않고 포악한 맹수가 와도 소리를 내어 쫓아내거나 여차하면 머리로 치받을 수 있다. 경계를 벗어나 독립한다. 우리는 살아남았고 앞으로 더 안녕히 살아갈 것이다.}


책을 다 읽고 나서는 이 또한 기록이라는 구절로 생각을 정리했다. 앞으로 ‘기록이 책이다’라는 문장을 실현한 또 하나의 사례로 이 책을 소개할 생각이다. 그의 용기에 응원의 기립 박수를 쳐주고픈 마음뿐이다. 이 책 이전에 무언가를 생각하지 않고 무심결에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삶을 살고 있지만 정작 나는 내가 처음 알게 된 책의 즐거움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만 같다. 정말 오랜만에 이야기 책을 읽으며 정보를 얻기 위한 책 읽기, 관련 분야의 책 읽기가 아닌 다른 분야의 책 읽기가 필요함이 절실함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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