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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로케 May 19. 2021

요망한 포트폴리오

최근 포트폴리오라는 걸 만들어봤다. 처음에는 '아, 이거 대체 어떻게 만드는 거지?' 막막했는데, 인터넷 검색을 해보며 (아쉽게도 내 주위엔 포폴을 만들어 본 사람이 없어 조언을 구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이렇게 저렇게 만들어봤다. 생각보다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건 재밌었다. 빈 종이에 그동안 내가 어떤 일을 했는지 하나씩 그려가는 느낌이었는데, 조잡스러운 일은 다 빼고 굵직한 일만 써 놓고 보니 '나'라는 사람이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포트폴리오를 한 번 만들고 나니, 왠지 내 주변 사람들도 만들어보면 좋을 것 같았다. 특정한 목적을 갖고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도통 알 수 없다면, 한 번쯤 내 일을 정리해 보고 싶다면, 더 늦기 전에 만들어 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34년 만에 처음 만들어본 포트폴리오를 통해 포폴 전도사가 되어 친한 지인들에게 포폴 만들 것을 적극 권유했다. 


'내 업무엔 포폴이 딱히 필요 없는데', '내가 하는 일엔 포폴 적용시킬 게 없는데'라는 피드백을 많이 받았다. 아니, 그럼 내가 하는 일은 포트폴리오가 필요한 일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포트폴리오, Portfolio의 사전적 의미는 '(구직 때 제출하는) 작품집'이다. 내 말은, 구직 때 제출하지 않아도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뭐였는지 시간이 지나서 기억조차 나지 않기 전에 작품집을 하나 만들라는 의미다. 포트폴리오를 만들 수 없는 업무는 없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건 반드시 언젠가 한 번쯤은 시간을 들여 나만의 '업무 작품집'을 만들어 볼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해 보니 그랬다.


그런데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굵직한 업무를 정리하며 포폴을 만들고 나니 '앞으로 해도 될 일'과 '앞으로 안 해도 될 일'이라는 항목이 명확하게 구분되어 보였다. 그랬다. 내가 어떤 일을 할 때 나의 포트폴리오는 굉장히 분명하게 '이 일은 너에게 앞으로도 도움이 될 거야. 그런 한 줄 쓰기도 어려운 쓸데없는 일은 하지 말아 줄래?'라고 내 귀에 속삭였다. 아, 이 요망한 것. 나는 요즘 이 요망한 포트폴리오의 속삭임에 마음이 무수히 요동친다.


예전에는 어떤 일이 재밌어 보이거나, 구미가 당기거나, 막연히 나중에 도움이 되겠지라는 생각이 들면 무조건 오케이를 외쳤다. '한 번 해보죠'라는 게 내 입장이었다. 그런데 모래알같이 무수히 많은 일들을 거르고 걸러보니, 정작 옥석으로 남는 애들은 별로 없었다. 물론 모든 경험은 자산이지만, 나도 이제 나이가 드는지, 아니면 열정조차 바스라 졌는지, 딱 받은 만큼만 일하고 싶다는 게 요즘 나의 모토다. 받은 만큼 열심히 일하고, 남은 열정은 다른 곳에 쓰고 싶은데요. 그래, 이게 내 솔직한 마음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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