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은 쌩쌩 꼬리를 흔든다 (상)

부산 만덕동 줄리엣

by 책여사



나와 상현이는 1학년 3반 반장, 4반 반장 커플로 교내에서 나름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공식 커플이었다. 반장 커플의 탄생이라는 기념비적 사건에 온 학교가 들썩였지만, 정작 진짜 폭풍은 학교 담장 너머에서 불어왔다.



우리의 연애 소식을 알게 된 양가의 가풍은 그야말로 완전히 다른 두 세계의 충돌이었다. 우리 집은 “예비 사위 언제 데리고 오냐”며 풍악이라도 울릴 듯한 기세로 커플 티를 사다 주는, 당황스러울 만큼 호의적인 분위기였다면, 상현이네 집은 말 그대로 엄. 근. 진(엄격, 근엄, 진지) 그 자체였다. “학업에 집중해야 할 시기에 연애는 무슨 연애냐! 정신 차렷!” 하는 호통이 떨어졌고, 가풍과 너무나 잘 어울리게 자란 상현이는 그 이야기를 내게 필터 없이 그대로 전해버렸다. 부모님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해 더 열심히 공부해서 인정받겠다는 다짐까지가 그의 본심이었지만, 하루아침에 사랑하는 이의 부모님께 미움받는 신세가 된 나에게 그의 마음은 전해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우리는 중학교 1학년, 딱 ‘로미오와 줄리엣’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나이에 집안의 반대로 첫 이별을 맞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우리는 독약 같은 걸 마시지는 못했고, 그날 이후 10년도 넘는 세월 동안 수십 번의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며 ‘깐 데 또 까’의 현현이 되었다. (차라리 그때 독약을 마시는 게 깔끔했을지도...)






부산 만덕동의 줄리엣, 바로 나. 나는 사흘 밤낮 식음을 전폐하고 스스로 주리를 틀며 방에 틀어박혔고, 조성모의 ‘To Heaven’을 무한 반복해 들었다.


‘괜찮은 거니 어떻게 지내는 거야 / 나 없다고 또 울고 그러진 않니…’


마를 줄 모르고 자꾸만 솟아오르는 눈물이 그렁거리는 내 앞에 자꾸 내 슬픔의 몰입을 방해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예비 사위 타령하며 커플 티를 사다 주던 엄마.


‘제발 이러지 마 볼 수 없다고 / 쉽게 널 잊을 수 있는 내가 아닌 걸 잘 알잖아…’


극적으로 치닫는 멜로디와 가사에 따라 감정도 클라이맥스로 치솟아야 했을 바로 그때! 삐걱 방문을 열어 빼꼼 나를 바라보던 엄마. 아무리 기억을 되새겨 봐도 엄마의 두 눈은... 이럴 수가. 깔깔 웃고 있었다. 20도쯤 열린 문틈으로 엄마의 머리카락과 이마, 눈 1.5개와 콧등이 얼핏 보일 뿐이었지만 (그마저도 내 눈물이 시야에 필터를 먹여 흐릿했다) 장난기 가득 반짝이는 안구, 웃지 않고서야 저만치 올라올 리 없는 광대의 각도와 눈가의 주름… 아- 정녕 엄마는 이별을 모르는가!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다. 사흘 밤낮, 무한 반복되던 이별의 노랫말에 힘입어 스스로 비련의 여주인공 자리를 꿰찬 나는 다음날 무작정 상현이가 다니는 학원 앞으로 달려갔다. 아마도 그가 걸을 것으로 예상되는 경로를 왕복해 걷기를 수십 차례. 우연을 가장한 그와의 만남은 성사되지 않았고 예상 경로의 우측 끝에 있던 편의점 아르바이트생과 유리 벽 너머로 자꾸만 눈이 마주쳤다. 민망한 내 마음을 하늘만은 알아준 건지, 주황색으로 변한 서쪽 하늘 위로 해가 지며 미처 거두지 못한 채 내 얼굴에 덕지덕지 묻어있던 복잡한 표정을 가려주었다. 이젠 어떻게 해야 하나 갈피를 잡지 못해 망설이던 내 발걸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점점 더 거세지던 바람. 아- 정녕 바람은 이별을 모르는가!



차디찬 바람에 떠밀리듯 도착한 곳은 상현이네 집 앞 공중전화 부스. 주머니와 가방을 뒤져보니 동전 여러 개가 나왔다. 고맙게도 따뜻하게 달궈져 있던 동전을 양 주머니에 나눠 넣고 한참을 쥐고 있었다. 쿵쾅거리던 내 심장의 온도만큼 동전이 뜨거워졌을 때 '찰칵' 동전을 굴려 넣어 친구 집에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저 희윤이 친구 지혠데요, 희윤이 집에 있어요?” 처절한 내 소식을 들은 희윤이는 “이지혜 미쳤나!! 니 그러다가 얼어 죽는다!” 하고는 이내 내가 있는 공중전화 부스로 핫팩을 가져다주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고맙다는 말도 못 했네. 고마웠어 정말.) 또 다른 친구는 붕어빵을 가져다주었던가. (정현이었나? 고마ㅂ… 아뿔싸! 지금 생각해 보니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붕어빵 먹느라 정신이 팔린 나를 상현이가 본 건 아니었을지. 25년 만에 처음 이 장면에서 소름이 돋는다) 맞춰지지 않는 퍼즐 같은 과거의 시간 안에서 나는 입김을 호호 불어가며 오지 않는 그를 기다린다.






그 시절 나는 사랑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는, 충성심 넘치는 진돗개… 아니, 똥강아지였다. 주인이 오지 않아도 꼬리뼈 빠져라 꼬리를 쌩쌩 흔들며 기다리는 미련하고 짠한 습성. 그 습성은 몸만 훌쩍 커버린 20대에도 여전했다. 시간은 흘렀지만 ‘그’ 상현이와의 개껌보다 질긴 인연은 그때까지도 이어졌고, 무대는 부산 만덕동에서 미국으로 옮겨졌다.



과연 미국에서 저를 기다린 건 무엇이었을까요?
수요일 2편에서 이어집니다... 커밍 쑨...

(글은 매주 일요일 오전 11시 발행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