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은 쌩쌩 꼬리를 흔든다 (하)

아- 잔인한 아메리카의 습도여..!

by 책여사


독일에서 인턴을 하던 여름, 휴가철을 맞아 미국에 있는 그를 보러 가기로 결심했다. 아직 공부하는 그에게 쥐꼬리만큼이지만 일을 해서 돈을 벌고 있는 내가 가는 것이 마땅하다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가난한 외국인 노동자였기에 밤잠을 줄여가며 조금 더, 조금 더 싼 티켓을 찾아야 했다. 결국 비행기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15시간이 넘는 대기 시간을 버티며 그를 향해 날아갔다. 경유지 공항에서 쪽잠을 자고 끼니를 굶어가며 마침내 도착!



그러나 재회의 순간은 아름답지 못했다. 머릿속으로 상상하던 재회의 뜨거운 포옹을 나눌 새도 없이 그와 함께 나온 사촌 누나에게 어색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오...” 잔인할 만큼 습한 날씨와 달리 건조한 분위기에 압도된 나는 어깨도 제대로 펴지 못하고 짐을 트렁크에 싣고 그와 그의 사촌 누나가 탄 차에 구겨지듯 몸을 실었다. 뒷좌석에 혼자 앉아 어색한 침묵을 견디는 사이 사촌 누나가 “어디서 무슨 냄새가 나는데…? 너흰 모르겠니?” 하는 게 아닌가.



부산 만덕동 로미오와 줄리엣의 시절, 나의 작은 행동에도 쉽게 붉어지던 상현이의 얼굴이 오늘은 다른 이유로 붉게 달아올랐다. 그도 느끼고 있었던 거다. 그 냄새의 출처를. 아, 정말이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었다. 사실 사촌 누나가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같은 여자라면, 아니, 사람이라면 좀 모른 척해 줄 수도 있지 않았나. 나는 내 입으로 말해야 했다. “경유지에 대기하는 동안 너무 습하고 더워서 저한테서 나는 냄새인가 봐요.” 그 순간 나의 세계는 눅눅한 티셔츠처럼 비참하게 구겨져 버렸다. 아- 잔인한 아메리카의 습도여!



도착한 다음 날, 그는 내게 이별을 고했다. 맙소사. 그 고생을 하고 온 바로 다음 날. 쉰내를 지우려 가져온 모든 옷을 세탁하고, 널어둔 빨래가 채 마르기도 전이었다. 도대체 왜 그때여야 했단 말인가. 과연 진정으로 냄새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이미 식어버린 마음을 유예할 필요를 더는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을까. 이유가 뭐라도 상관없었다. 지금껏 보아온 영화, 드라마의 클리셰대로라면 당장 상대의 따귀를 때리거나 짐을 싸고 그 집에서 뛰쳐나와야 했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아니, 그러지 않았던 것 같다. 펑펑 우는 대신 흐르는 눈물을 쓱 닦아내며 짐짓 쿨한 척 선언했다. “그래, 알겠어. 대신 내가 여기 머무는 일주일 동안은 내 마음대로 할 거야.” 어금니가 깨질 듯 입을 앙다물었다.



그런데 이별을 통보받은 내가 ‘제멋대로’ 한 행동은 고작 이런 것이었다. 학교 가는 그를 위해 아침마다 토스터에 식빵을 넣고 잼을 바르는 일. 어설프게 싼 도시락을 그의 손에 쥐여주고 멀어지는 뒤통수를 바라보는 일. 그도 사촌 누나도 없는 텅 빈 집에서 섬유유연제 향 쨍하던 그의 옷들을 가지런히 개어보는 일. 그가 살고 있는 낯선 동네의 골목골목을 하염없이 산책하는 일. 마치 영역 표시라도 하듯, 내 마음의 냄새를 그곳에 조금이라도 묻혀두고 싶다는 듯이. 결국은 떠나야 할 나를 불쌍히 여기는 일.







그날 이후 오랫동안 생각했다. 과거로 갈 수만 있다면, 이번엔 직항으로 날아가 혼자 슬퍼 어쩔 줄 모르는 나의 손목을 낚아채고 미련 떨지 말라고 소리치고는 그곳에서 시원하게 꺼내 줄 텐데. 그런데 이제는 그 시절, 사랑을 위해 온몸이 흔들리도록 꼬리를 흔들던 내가 부끄럽지도 불쌍하지도 않다. 오히려 너무나도 사랑스럽다. 사랑받고 싶어서,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서 자존심 따위는 개나 줘버렸던(정말 한 마리 개가 되었던) 그 여자아이. 그 아이가 있었기에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온몸으로 배웠으니까. 사람의 마음이란 일방적인 희생이나 기다림으로 얻을 수 없다는 것, 그러나 그 마음을 다 쏟아부어 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후련함이 있다는 것도. 그토록 치열하게 누군가를 사랑해 봤기에, 이제는 나 자신을 더 사랑할 줄 아는 어른이 되었다. 비록 그 시절의 주인(?)은 내 곁을 떠났지만.



이제는 거리에 누군가를 밤새워 기다릴만한 공중전화 부스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세월이 흘렀고, 그럴 마음도 체력도 없다. 또 어디를 가든 돈 때문에 내 시간을 대신 지불하지 않아도 될 만큼 지불 능력을 갖춘 어른이 되었다. 이보다 더 좋은 해피 엔딩이 또 있을까.



“오빠, 내가 옛날에 첫사랑 기다리느라 공중전화 부스에서 밤새운 얘기 했었나?”



남편은 ‘또야?’ 하는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눈을 감아버리지만, 나는 굴하지 않고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며 킥킥댄다. 듣거나 말거나 혼자 신나 조잘거리는 나를 어린아이 보듯 하는 이 남자의 눈빛 덕분일까. 한때 모든 이별 노래 가사에 눈물 쏟고, 모든 이별 장면에 과몰입해 가슴 치며 울던 기억들이 이제는 제법 귀엽고 사랑스러운 안줏거리가 되었다. 그러고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내 사랑은 언제나 쌩쌩 꼬리를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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