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식원 가서 폭식하고 왔습니다 (4)

《헌치백》

by 책여사


지난밤 휘몰아치던 요크셔의 폭풍은 잦아들었다. 히스클리프의 광기 어린 사랑이 휩쓸고 간 자리는, 단식원의 조용한 침묵으로 채워졌다. 드디어 퇴소 당일 아침. 길고도 짧았던 자발적 유배 생활도 이제 진짜 끝이다. 지난 5일간 짜여진 프로그램을 충실히 지키며 책 읽기에 몰입했다면 이곳에서의 마지막 시간은 오롯이 나만의 루틴으로 채우며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워밍업을 해야지. 여느 때와 같이 새벽 5시에 일어나 스트레칭과 양치로 몸을 깨웠다. 따끈한 소금차를 마시며 하루를 여는 독서와 필사를 이십여 분 동안 이어 한다. 별것 없는 이 새벽의 루틴이 오늘의 오후 다섯 시를, 나의 매일을 책임진다고 믿는다. 오늘도 나에게 나를 잘 부탁하며 하루를 연다.



그러는 한편, 마음속으로 며칠간 이어진 활자 폭식의 대미를 장식할 마지막 디저트를 즐기고 싶은 마음이 자리하고 있음을 느낀다. 퇴소 준비로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는 아침이지만, 그전에 단 한 시간이라도 더 활자에 시간을 내어주고 싶다. 새벽 루틴과 더불어 하루 중 빼놓을 수 없는 한 시간 이상 걷기와 한 시간 독서까지를 한 큐에 해결하는 것이 당장의 목표. 어제까지 종이책으로 읽기를 즐겼다면 오늘은 상비용으로 챙겨 다니는 전자책을 펼쳐야지. (읽을 활자가 없는 상황은 그야말로 비상사태이므로 늘 상비약처럼 전자책을 챙긴다. 다들 그렇지..?) 촘촘히 하고 싶은 일이 많은 아침이라 약간 조급하지만 그보다 큰 설렘을 안고 운동복 위에 두툼한 코트를 걸친다. 패딩 목도리에 마스크, 모자까지 푹 눌러쓰고 살그머니 단식원 문을 빠져나오는 기분이란. 속세로 한 발짝 들어서는 기분은 마치 금단의 구역으로 넘어가는 듯 조심스럽다. 이게 얼마만의 나 홀로 나들이냐.






단식원이 위치한 골목은 여전히 회색빛 건물들 사이로 삭막한 냉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옷깃을 다시 한번 여미고, 크게 숨 한번 내뱉고 한겨울 찬 바람을 정수리로 맞으며 걷기 시작한다. 단식원에서 광안리 바닷가까지는 직선 코스로 30여분. 눈은 발 끝만 바라보며 헛둘헛둘 힘차게 보폭을 넓힌다. 정수리를 얼릴 듯 그칠 줄 모르는 바람에 ‘하고 싶은 걸 하기 위한 모든 과정이 아름답지만은 않지...’ 한숨 같은 생각이 절로 고개를 든다. 그렇지만 따뜻한 카페에 앉아 해변을 바라보며 활자를 탐독할 시간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 바람이쯤, 뭐 그리 대수랴. 어느새 골목 끝 시선이 닿는 곳에 광안대교가 보이기 시작한다. 바로 이거지! 내가 원했던 오션 뷰. 매캐한 시멘트 냄새 대신 짭조름한 소금기 머금은 바닷바람이 나를 반긴다. 지금까지 매섭게만 느껴지던 칼바람이, 탁 트인 바다 앞에서는 둥글고 부드럽게 내 피부를 감싸는 것만 같다. 역시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에만 필터가 있는 게 아니었다. 후각과 촉각도 내 마음에 따라 갖가지 필터를 통해 느끼게 됨을 온몸으로 알게 된 아침이다. 정말이지 모든 건 생각하기 나름이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나무 관세음보살.’ 킥킥거리듯 중얼거리며 올라가는 입꼬리에 온몸이 달뜬다.



이른 아침이라 인적 드문 해변은 한산하고 자연은 볼륨을 키운다. 촤아-촤아아- 쉼 없이 부서지는 파도 소리,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걸까 궁금해지는 끼루룩-끽끽- 갈매기 소리, 저 멀리 반짝이는 윤슬마저도 반짝반짝 소리를 내는 것만 같다. 해변 한가운데 데크에 앉아 나를 둘러싼 모든 풍경과 소리 속에 나를 잠시 방치한다. 이 순간을 위해 지난 모든 날들이 있었던 걸까 싶을 만큼 막연하게 큰 감동이 가슴을 부풀린다. 조금만 더 이 감동속에 나를 부려두고 싶지만 아쉽게도 더 지체할 시간이 없다. 이제 전망 좋은 카페에서 카페인을 수혈할 차례. 바다가 정면으로 보이는 카페로 향한 나는 2층 창가에 자리를 잡고 따뜻한 카페라테 한 잔과 전자책을 내려놓는다. 다시 밀려오는 행복감. 여기가 진짜 무릉도원이었네. 이렇게 쉽게, 이렇게 자주 행복해도 되는 걸까 혼자 되뇌다 이내 이것도 능력이라며 스스로 치하를 내린다. 그저 누리시게나- 허허허. 오랜만에 식도를 타고 흐르는 커피의 향기. 부드러운 우유 거품이 남은 입술을 혀로 핥으며 비로소 내가 속세의 중생으로 복귀했음을 실감했다. 며칠간의 절제된 식단 끝에 맛보는 라테는 단순한 커피가 아니라 액체로 된 행복 그 자체였다.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따뜻하게 이완되는 기분을 느끼며 여유롭게 전자책 리더기를 켰다.






짧게 주어진 이 시간 내가 선택한 책은 얼마 전부터 눈여겨보고 있었던 이치카와 사오의 《헌치백》. 그런데 첫 페이지를 넘기자마자, 라테 향기 가득하던 평화가 산산조각 났다. 중증 장애 여성 작가가 써 내려간 날 것 그대로의 문장들이 아늑하던 주변 공기를 예리하게 찢고 들어왔다. 선천성 근질환으로 척추가 무너져 내린 채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살아가는 화자가 토해내는 욕망은 서늘하도록 적나라했다. “내가 임신하고 중절하는 걸 도와주면 1억 엔을 줄게요”. ‘임신과 중절’이라는, 이른바 정상인들의 특권을 자신도 누려보고 싶다는 그 도발적이고 파괴적인 고백이라니.



《폭풍의 언덕》이 혀를 마비시키는 얼얼한 마라맛이었다면, 《헌치백》의 도입부는 깊게 타락한 속세의 맛이었다. 봐서는 안 될 것을 봐 버린 것 같은 불쾌함에 안면 전체가 구겨졌다. 동시에 한껏 커져버린 동공과 더불어 약간 떨리는 손끝으로 얼른 리더기를 끄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누군가 내가 이런 책(?)을 보고 있다는 걸 알아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 그러나 여기서 멈출 수 없게 만드는 힘이 대단한 불손한 책이었으므로, 나는 조심스럽게 아무도 없는 주위를 살피며 다시 리더기를 켰다. 읽는 동안 온몸이 찬물을 뒤집어쓴 듯 번쩍번쩍 각성되었다. 그 각성효과 덕분에 퇴소를 앞둔 해방감보다 이 책을 마저 읽고 싶다는 욕망이 더 거대하게 부풀어 올랐다. 오- 앞으로 읽어야 할 문장들이 내 눈앞에 거대한 쓰나미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내게 허락된 한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고 아쉬운 마음으로 갈무리하며 빈 라테 잔과 리더기를 내려놓았다. 마지막까지 읽어 치우고 싶은 활자욕이 뻐근하게 차올랐지만, 신데렐라의 마법이 풀리듯 이제는 현실로 복귀해야 할 시간이었다. 다시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단식원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묘한 긴장감으로 묵직했다. 5일간의 완벽했던 은둔과 지독했던 활자 폭식, 그리고 오늘 아침의 달콤한 일탈이 내 몸에 어떤 결과를 남겼을지 최후의 성적표를 확인할 시간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처음엔 그저 수상하게만 보였던 단식원. 그러나 어느새 내 방처럼 아늑해진 단식원 문을 열고 들어서자 퇴소를 앞둔 나를 데리러 온 남편의 기대에 찬 얼굴과 인바디 기계의 무심한 얼굴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 이제 심판의 대좌에 오를 차례다.






양말을 벗고 차가운 금속 발판 위에 두 발을 올렸다. 양손으로 기계의 손잡이를 꽉 쥐고 서 있는 1분 남짓한 시간. 왠지 최종 심판을 기다리는 죄수처럼 침이 꼴깍 넘어갔다. 지이잉- 이내 프린터에서 나의 5일을 증명할 최후의 성적표가 삐딱한 소리를 내며 뱉어졌다. 결과지를 받아 든 원장님 너머로, 나보다 더 결과가 궁금했을 남편이 목을 쭉 빼고 다가왔다. “오, 체지방 1.8킬로 감량! 거봐, 내 말 듣고 오길 잘했지? 확실히 효과 있네!” 인간 AI 남편은 본인의 솔루션이 완벽하게 적중했다는 사실에 한껏 고무되어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5일 만에 체지방 1.8킬로 감량은 확실히 기대 이상의 결과였지만 내 시선은 그보다 더 아래 작게 적힌 다른 항목에 가만히 꽂혀 있었다.



‘골격근량 +0.1kg.’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남편은 저 작고 소중한 0.1kg의 근육이 매일 아침 강가와 바닷가, 러닝머신 위를 걸은 결과라 믿어 의심치 않겠지만, 나는 안다. 저것은 그리 단순한 근육이 아니라는 것을. 저 0.1kg은 《핑거스미스》와 《폭풍의 언덕》 두 권 도합 1,400페이지가 넘는 거대한 벽돌 책들을 며칠사이 읽어낸 자랑스러운 뇌 근육이다. 또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토해내는 그 격정적이고 미친듯한 삶의 소용돌이를 고스란히 감당해 낸 내 심장, 심장이 열일한 덕분에 늘어난 결과인 것이다. 이곳에서 비워진 것은 비단 내 몸의 독소와 군살만이 아니었다. 쉼 없이 울려대던 일상의 소음과 얄팍한 산만함이 빠져나간 자리는 고요하고 투명해졌고, 그 자리에 가갸거겨고교구규 활자가 만들어낸 근육이 새롭게 자리하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보통 ‘단식원’이라 하면 속세를 떠나 곡기를 끊고 고통스럽게 굶주림을 견디는 곳이라 생각한다. 입소 전의 나 역시 그랬다. 하지만 나에게 지난 5일은 생애 가장 탐욕스럽고 지독했던 ‘폭식의 시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내 입으로 들어가는 물리적인 음식은 하루 고작 700칼로리로 철저히 제한되었지만, 고요해진 뇌로 쏟아부은 활자의 칼로리는 그야말로 폭발적이었다. 역설적이게도 나는 배가 완벽하게 비워진 이곳에서 가장 배가 불렀다. 육체의 허기가 극에 달하자, 감각의 촉수는 놀랍도록 예민해졌고 일상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었던 영혼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듯한 포만감을 비로소 느꼈다.






“집에 가면 뭐 먼저 먹고 싶어? 보통 단식 끝나는 날엔 보상 심리 때문에 떡볶이나 마라탕 같이 자극적인 거 당긴다던데. 너 떡볶이 좋아하잖아. 떡볶이?” 짐을 싣고 운전대를 잡은 남편이 내 눈치를 살피며 묻는다. 그의 말대로 며칠을 굶주린 다이어터들에게 억눌렸던 식욕이 터져 나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일 태다. 그런데 남편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입안에는 나도 모르게 침이 고이고, 뭐라도 당장 씹어 삼키고 싶어 손끝이 찌릿찌릿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내 머릿속엔 조금 전 읽다 덮은 《헌치백》, 캐리어 깊숙한 곳에 눈물을 머금고 밀어 넣었던 928쪽짜리 《제인 에어》와 이미 집에 도착해 있을 세라 워터스의 소설들이 가득 차 있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손만 씻고 《헌치백》부터 읽어 치워야지. 그다음엔 소파에 누워 묵직한 책 등을 쫙 펼치겠지. 새로운 자극으로 가득할 문장들을 또 한 번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는 나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짜릿한 도파민이 척추를 타고 흐른다. 나는 여전히 배가 고프다. I'm still hungry…!



*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낸다는 뜻의 불교 화엄경 핵심 가르침



✳︎ 글은 매주 일요일 오전 11시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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