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장르소설 9

고즈넉이엔티 (230616~230705)

by bookyoulovearchive




김호야, 「눈밭, 자두 씨」 (23/06/23)


‘냉동인간’이라는 소재는 종종 찾아볼 수 있지만, 이렇게 어두운 면을 다루는 소설은 꽤나 새로웠다. 아빠를 얼려도 될지는 자신에게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아빠를 해동시키는 건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니. 너무 잔인하다. 죽은 것도, 그렇다고 산 것도 아닌, 있지만, 없는 사람인 아빠. 돈이 없어서 계속 냉동 상태로 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암 치료를 계속 할 수도 없는 상황. ‘희망을 선택하는 데도 돈이 든다’는 말이 너무나 씁쓸하게만 느껴졌다.


아빠는 돌멩이가 눈사람의 씨앗이라고 말했다. 느티나무 아래 세워둔 눈사람은 햇살에 허물어져갔고, 발길질에 파였고, 진회색 얼룩으로 사라졌다. 눈사람이 품었던 돌멩이 따위는 까맣게 잊었다. 땅을 파고 씨앗을 심고 흙을 덮고 기다리면 비로소 무언가가 시작된다. 시간은 흘러야 했다. (p.38)


결국 아빠는 돌아가셨고, 장례를 치르고 돌아가는 길, 아빠가 뱉었던 자두 씨앗, 그리고 물컵에 남은 물 얼룩만이 누리 곁에 남아 아빠가 이 세상에 존재했었다는 걸 보여준다. 씨앗을 심어야 새로운 생명이 나오는 것처럼, 새로운 생명도 열매를 맺고 또다시 다른 씨앗을 남긴다. 작가의 말에 나온 것처럼 ‘죽음이 영영 이별은 아니라는 것’. 어떤 끝은 또 다른 시작이란 것, 뭐든지 자연스러운 시작과 끝이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오아린, 「조던 시카고를 신고 목을 맨 남자」 (23/06/23)


제목과 글 설명만 봤을 때는 자살을 하러 간 사람이 준비를 마친 후 잠깐 잠이 들어 눈을 떴을 때 자신이 죽으려고 매달아 둔 올가미에 걸린 여자를 보고 살인자로 몰릴까 봐 어떻게든 시체를 숨기려고 하는 내용을 예상했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는 이야기였다.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며 평소라면 꿈도 꾸지 못할 조던 시카고 1994를 ‘폼 나는 마지막’을 위해 거액을 주고 구매하면서도, 월세집에서 죽게 되면 내야 할 거액의 청소료는 아까워 돈이 들지 않는 묫자리를 찾는 박철수. 돈이라는 게 대체 뭔지. 죽음을 준비하는 데도, 죽은 후 시신을 수습하는 데도 돈이 든다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인데,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는 게 굉장히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좀 서글퍼지기도 했다. 「눈밭, 자두 씨」에서는 ‘희망을 선택하는 데도 돈이 든다’ 더니, ‘죽음’을 선택하는 데도 돈이 든다는 게.


그가 찾아 둔 죽음을 위한 장소에는 ’낙엽이라는 죽음이 가득‘하고, 바스락거리는 낙엽 소리를 들으며 박철수는 마지막이라도 외롭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한다. 그는 죽음을 눈앞에 둔 순간, 죽음이라는 낙엽 이불을 덮고, 일종의 죽음의 예행연습이라고도 하는 잠에 빠져든다. 그렇게 잠이 들었다 깨어나자 살인자로 몰려 바로 경찰서 행이라니!


“대체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긴 건지 이해가 안 가요. 전 그냥, 그냥 죽고 싶었을 뿐입니다.......” (…) "저는 말입니다, 갈 때만이라도 폼 나게 가고 싶었어요. 근데 그것조차 안 될 줄은 정말 몰랐어요.” (p.74-75)


’자신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건 오직 자신의 목숨뿐‘이라 생각했던 박철수는 자신의 바람처럼 ‘폼 나게 가지도 못하고’ 살인자라는 누명까지 쓰게 된다. 그런데 그를 도와주러 기적처럼 나타난 구독자 400만 명에 달하는 진실 TV 채널의 운영자 왕산호. 그가 박철수의 진실을 밝히는데 도움을 줄 것이라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진실은 따로 있었다. 문득 애드가 앨런 포의 「검은 고양이」의 주인공이 떠올랐다. 왜 완전범죄를 꿈꾸고 성공을 거의 눈앞에 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범행을 티 내지 못해 안달인 걸까? 나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자신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건 오직 자신의 목숨뿐‘이라던 박철수의 생각은 두 번의 자살시도 후 바뀌었을까? 사실 첫 번째 자살 시도는 잠이 드는 바람에 해보지도 못했기 때문에 (사실 난 잠도 일종의 죽음이라 했을 때 죽음을 체험한 것과 다름없다 생각하긴 했다) 또다시 자살을 시도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제대로 회색 후드 올가미에 목을 매고 어둠이 찾아왔단 구절에 박철수가 죽은 줄 알고 정말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다시 깨어난 박철수의 모습에 그의 미래에도 희망이 있을 거란, 근거 없는 믿음이 생겨났다. 그래서 작가의 말에서 ‘희망을 주는 글을 쓰고 싶었다’는 말과, ‘올가미는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다’는 말이 참 좋았다. 박철수가 죽음 또한 자신이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것이라는 걸 깨닫고, 죽기 위해 단단히 묶었던 올가미만큼 다시 살아가기 위해 조던 시카고의 신발끈을 단단히 묶고 세상으로 묵묵히 걸어 나가길 바라게 되었다.




김경락, 「이터널」 (23/07/04)


죽기 직전까지 젊음을 유지할 수 있는 대신, 백 살이 되는 생일날 법률에 따라 영면에 들어가 내 육체는 소멸되고 내 기억은 디지털 파라다이스로 가게 된다면 당신의 선택은?


젊음을 유지하며 영생을 사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은 있지만, 젊음을 유지하는 대신 죽음을 맞이하는 날이 정해져 있다는 설정은 조금 새롭게 느껴졌다. 이야기 속 세계에선 자연을 거슬러 젊음을 유지할 수 있고, 대신 그 대가로 삶은 백 살 생일에 강제로 중단되고 육체는 소멸되며, 기억은 디지털 데이터화되어 디지털 파라다이스로 가게 된다. 젊음을 선택하는 것이 결국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라는 모순적인 상황. 젊음을 선택한 이들은, 결국 자신의 죽음 또한 자신이 선택한 것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었을까?


꿈속에서도 나는 어린 시절의 모든 게 그리워져 눈물을 흘렸다. 자연이 주는 변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시절. 지금 내게는 그 시절의 그 누구도 남아 있지 않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고, 젊음은 영원한 듯했지만 나는 결국 혼자임을 알았다. (p.120)


한 생명이 태어나, 성장하고, 자연스럽게 노화를 맞이해 늙어가며,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영원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거스른 자연은 그만큼 대가를 요구한다’는 말이 소설이 끝나갈수록 피부로 와닿는 듯했다.


존재의 소멸은 소멸이지만, 조금 다른 방식으로 소멸을 맞이하게 된 주인공. 강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주인공은 그래도 자유로워졌을까? 아니면 젊음을 선택하고 자연을 거스르려 했던 자신의 처음의 선택을 마지막까지 계속 후회했을까?




정종균, 「13분 27초」 (23/07/04)


삼촌은 미쳐 버려 환영을 봤던 걸까? 아니면 이미 무간지옥에 갇혀 새로운 13분 27초를 만들어 가고 있지만 그곳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해 주인공에게는 보이지 않는 걸까?


나도 그들이 했던 것처럼 울고, 두려워하고, 웃고, 피하고, 기도하고, 반항하면서 매번 다른 13분 27초를 완성하겠지. 거기는 그저 새로운 무대일 뿐이야. (p.151)


‘우리 역시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죽음을 기다리면서 무수히 많은 13분 27초를 반복하고’ 있으며, ‘결국 지옥이라는 곳은 별것 아닐지도 모르며, 어쩌면 살아 있다는 게 곧 죄이고, 우리는 각자의 지옥 속에서 그 죗값을 치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작가의 말이 가장 섬뜩하게 느껴졌다. 비디오 안에 갇힌 세 명과 그 비디오를 바라보고 있는 삼촌. 인간 세계에 대입해 생각해 보면, 우리 인간은 지구의 많은 생물들과 자연환경을 착취하고 잔인하게 괴롭히고 있는 삼촌 같은 존재일 지도, 그래서 정말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이 죄이고,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는 지구 파괴의 과정을 온몸으로 느끼며 살아가는 동안 그 죗값을 치르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국술호, 「이원화」 (23/07/05)


나의 이름을 달고 나를 대체할 AI를 내가 교육해야 한다면 난 무엇을 알려줄 수 있을까? 내가 누구인지도 잘 모르는데, 또 다른 ‘나’를 만드는 게 가능할까?


대체 불가능함이라는 게 항상 특별한 것에 붙는 단어인 줄 알았는데 자신과 같은 흐지부지한 존재에도 쓰일 수 있는 거구나, 하고 상현은 생각했다. 자신을 완벽히 대신할 수 없다는 이드의 말에 상현은 다행스러움을 느끼면서 동시에 아쉬움을 느꼈다. (p.167)


상현은 왜 다행스러움과 아쉬움을 동시에 느꼈을까? ‘나’라는 존재가 대체 불가능하다는 것, 그 누구도 나를 완벽히 대신할 수 없다는 건 매우 다행스러운 일 아닌가? 아쉬움을 느낀 이유가 궁금하다.


사실 제목은 「이원화」지만, 마지막에 도상현 AI 상담사가 ’끝을 모르고 증식하는 상담 건수‘에 대응하려 무한히 증식되는 상황을 보았을 때 나를 대체할 누군가를 만든다는 것이 단순하게 ‘이원화‘로 끝나는 게 아닐 거란 생각이 드니 섬뜩해졌다.




백다도, 「그녀의 이중생활」 (23/07/05)


누군가를 좋아하는 데 꼭 이유가 필요한 건 아니지. 타인이 좋아하는 것을 함부로 폄하하거나 한심하다 여겨선 안 되는데, 무의식적으로 그런 편견을 가졌던 몇몇 기억들이 떠올라 반성하게 되었다. ’좋아하는 마음 그 자체는 모두 소중한 것‘이고, 누군가는 그 마음으로 인해 살아갈 힘을 얻는다는 작가님의 말이 애틋해서 좋았다.


남들이 보기에는 이 사랑이 나를 포기하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난 이 사랑으로 기뻐하고, 순간적으로 흘러갈 행복을 감지하고 누릴 수 있게 됐다. (p.224)


누구나 주변에 ’덕질‘ 중인 친구 한 명쯤은 있지 않을까. 나에겐 누군가가 이상하게, 한심하게 여길까 봐 드러내놓고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을 밝히지 못하는 친구도 있고, 너무나 자랑스럽게 호시탐탐 ‘내 새끼’ 자랑 타임을 노리는 친구도 있다. 모두 너무 귀엽고 또 귀엽다. 사실 누군가를 맹목적으로 좋아하는 일이 이제 쉽지 않다고 느낀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데는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가 들기 때문이다. 그 사랑으로 기뻐하고, 그 순간의 행복을 만끽하며 살아갈 힘을 얻는 사람들이 소중하고 또 대단하다 느껴진다. 모두가 당당하게 좋아하는 이를 자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좋아하는 데는, 별다른 이유가 필요하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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